#92화
“말하는 것만 보면 천마(天魔)와 마주한 줄 알겠군.”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말해오는 사마천의 모습에 주호는 조소를 지으며 검신에 손을 가져갔다.
이때까지는 상대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 수동적으로 싸운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상황이 치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을 보니 정말로 데려온 것은 낭인 무리가 끝이라는 것일 터.
“후우…….”
짧게 숨을 뱉어낸 그는 천천히 검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뼈가 시릴 정도의 냉기가 풍기며 평범했던 검의 형태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신검(神劍) 청룡(靑龍).
단목우현과의 싸움에서도 꺼내지 않았던 신검의 진정한 모습이 나타났다.
물결치는 무늬가 새겨진 검신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그것에서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사마천이 제 언월도를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신검(神劍)인가. 사신의 기물은 처음 보는군.”
“영광으로 알도록 하여라. 무려 삼백 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니.”
나지막하게 내뱉은 주호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피차 서로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지만, 패배하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
청명한 만월이 떠오른 가운데 적막은 가득 차오른다. 그와 반대로 내려앉은 적막은 절정에 달했으니.
타닷-!
둘의 신형이 동시에 사라졌다.
얼핏 어둠에 모습이 지워진 것 같았지만,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거센 폭음과 휘황찬란한 불꽃에 그들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회천(回天)-!”
한계까지 회전된 언월도의 끝이 벼락같이 내질러졌다.
이미 한 번 본 초식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파괴력을 풍기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수십 줄기의 강기가 산맥을 강타하자 백 근이 넘는 화약이 터진 듯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슈우욱-.
간발의 차이로 그것을 피해낸 주호가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를 뚫고 뛰쳐 올랐다.
여기까진 아까와 같은 상황이었지만, 뒤이어 닥쳐올 미래는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청룡검식-.”
시퍼런 귀화가 신검 위로 피어오른다. 그것은 곧 주위를 뒤덮은 연기를 가르며 사방을 휩쓸었고, 이내 이쪽으로 닥쳐오고 있던 사마천을 향했다.
“현검(絃劍).”
청룡검식(靑龍劍式)
현검(絃劍), 흐름의 검
쿵.
“……!”
막대한 압력이 사방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에 헛바람을 토해낸 사마천은 달려들던 것을 멈추고 제 기운을 끌어올려 그 기세에 대항했다.
샤아아아악-!
주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높게 치켜세운 검을 천천히 내리그었고, 그의 의지에 따라 시퍼런 강기가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쏟아져 내렸다.
“크윽-!”
사마천은 제 언월도를 힘껏 회전시켰다.
그 위에 서린 강기가 검막과는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났으니. 곧 떨어져 내리는 강기들을 막아냈지만, 일격을 막을 때마다 무릎이 잘게 떨리며 조금씩 굽혀졌다.
“이, 런 것쯤은……!”
파아아앗-!
언월도의 자루를 움켜쥔 사마천의 팔 위로 시퍼런 힘줄이 솟아올랐다.
딛고 선 바닥은 이미 초토화된 지 오래지만, 그 막대한 힘에 저저적 갈라지며 균열이 터져나갔다.
“역천(逆天)-!”
이름 그대로 순리를 거슬러 오르듯 그의 언월도가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그 주위를 휩쓸었으니. 주호는 검을 앞으로 들어 올린 채 내공을 끌어올려 몸을 뒤덮는 호신강기를 만들어내었다.
파바바바바박-!
폭풍과도 같은 기세가 그의 전신을 강타했다.
있는 힘껏 대비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원래 서 있던 자리보다 한참이나 더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큭.”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신검을 내리자 땅 위로 깊게 파인 족적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를 움직여 구덩이에서 발을 빼낸 주호는 깊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후우…….”
사마천 역시 이전과 같이 여유롭지는 않았다. 조금 전의 반격에서 한껏 힘을 끌어다 썼는지 제 언월도에 기댄 채 호흡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거 참. 나도 예전 같지 않군. 몇 년 전이라면 이런 것쯤은 어렵지 않게 막아냈을 텐데.”
나이를 먹은 노인처럼 등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이며 작게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다시 흉흉한 눈빛을 드러냈다.
“대충 몸은 풀었으니, 이제 제대로 해봐야지?”
“내 쪽은 아직 덜 풀렸는데.”
주호는 짐짓 여유로운 척 어깨를 으쓱였다.
사마천은 넉살 좋게 웃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그리 여유로울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
자박.
그의 발이 황폐해진 대지를 짓밟았다.
주위는 이미 둘의 공방으로 초토화된 지 오래였다.
긴 세월 동안 자리 잡았던 산맥은 그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렸고, 무성한 초목과 삼림은 장작으로도 쓸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잔해로 그 흔적만 남기고 있었으니.
휘리릭-.
손안에서 언월도를 크게 회전시킨 사마천은 이내 그것을 다잡고 이전보다 더 강대한 투기를 내뿜었다.
“참으로 재미있어. 궁기는 별 신경 쓸 수준은 아니라 했고, 혈귀는 한 수 밑의 하수라 했거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힘을 숨기지는 않았을 터니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까지 성장했다는 것인가?”
“…….”
주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퍼런 안광을 내뿜으며 제 검을 다잡았고, 사마천의 투기를 밀어내며 기세를 피워 올렸다.
하지만 이전과 같이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사마천 역시 이쪽을 탐색하듯 같은 간격을 유지하며 천천히 이쪽을 맴돌았다.
‘이쪽을 얕잡아 보고 있나.’
주호는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을 호적수로 보고 있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찌 된 자신감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엔 오히려 더 좋은 이야기였다.
‘그 방심이 네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이윽고 푸른 만월이 바람에 밀려온 구름에 가려졌을 때.
핏-.
세상이 어둠에 뒤덮이자 둘의 신형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푸르고 짙은 강기가 서로의 목을 물어뜯었고, 다시금 거센 폭발이 사방을 뒤덮으며 그 주위를 휩쓸었다.
한 번의 공방은 순식간에 열 번이 되었고, 머지않아 백번의 교환에 치달았다.
한치의 밀고 밀림 없는,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싸움이었으니.
캉-!
날카로운 쇳소리가 고성을 내며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검과 도를 두고 서로를 마주 보는 형태로 멈춰 서게 되었다.
“좋다. 인정하마. 당대의 청룡은 날 즐겁게 하기에 충분한 상대이니.”
“딱히 네놈을 즐겁게 할 마음은 없는, 데!”
주호는 거칠게 검을 튕겨내며 경합을 끊어냈다. 그러곤 파죽지세의 기세로 사마천의 권역을 베어 가르며 그 지척까지 이르렀고, 날카로운 기세로 신검을 휘둘렀다.
그그그극-!
언월도 위에 덧씌워진 호신강기가 회심의 일격을 막아낸다. 짙은 미소와 함께 태세를 정비한 사마천이 재차 움직일 찰나.
저벅.
느닷없는 인기척이 그들의 감각을 일깨웠다.
“…….”
주호와 사마천은 약속이라도 한 듯 훌쩍 물러나 거리를 뒀다. 그러곤 어둠에 가려져 있던 한 곳으로 시선을 보내자, 누군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검. 네놈이 어떻게 여길…….”
“이렇게 소란을 피워대는데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적혈마검 진무혼.
천무학관에서 환영검 소연신을 자처하고 있는 혈천신교의 고수였다.
청혈도제 사마천과 마찬가지로 얼굴에 붉은 가면을 쓴 그는 입가를 일그러뜨리더니 거침없는 기세로 발걸음을 놀려 그들의 지척까지 이르렀다.
“도제, 네놈. 내 분명히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잠깐 손속만 섞는 거잖아. 그리고, 죽여서 입을 막으면 그만 아닌가?”
“우리의 적은 사신문만이 아니다. 구태여 지금 단계에서 그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거늘.”
사마천은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았지만, 진무혼은 거센 기세를 피워 올리며 그 말을 일축했다.
“낭인까지 움직여 일을 벌인 탓에 상황이 얼마나 골치가 아파졌는지 네놈은 신경도 쓰지 않겠지.”
“…쩝.”
칠혈성 내부에도 상하 관계가 뚜렷한 듯 사마천은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못했으나, 이내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죽여야 하지 않겠어?”
절그럭.
그 말에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주호는 제 검을 다잡았다.
한 명이라면 승부를 볼 수 있지만, 비슷한 경지의 고수가 둘이라면 홀로는 승산이 없다.
하지만 도주할 자신은 충분히 있었기에 가늘어진 눈으로 상황을 주시했으나, 적혈마검 진무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의 소란이 있었다. 당연히 저쪽에도 이야기가 들어갔지.”
“그러면……”
“무림맹의 타격대가 지척까지 이르렀다. 일각 이내에 이곳에 당도하겠지. 이전처럼 마교에 뒤집어씌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진무혼의 시선이 주호를 향했다.
시커먼 눈동자 위로 적색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린다. 그것에 주호는 그가 사마천보다 한 수 위의 고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가. 민망하지만, 결착을 내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듯 싶은데.”
언월도의 끝으로 머리를 긁적인 사마천이 고개를 돌려 주호에게 물었다.
무림맹이 연관되면 피차 곤란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시선이었다.
“…다음을 기약하지.”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객기를 부릴 상황은 아닐뿐더러, 괜히 그들을 자극해 생사결이라도 벌이게 된다면 자신만 손해일 따름이었으니.
무림맹의 타격대가 이쪽으로 온다고 하여 순순히 물러나는 그들의 의중을 짐작할 수는 없었으나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적어도 둘. 냉정히 생각한다면 못 해도 한둘은 더 있겠지.’
교류 대회 측엔 정천과 천무 학관에 소속된 고수들이 있다.
그 둘을 합하면 어지간한 문파보다 큰 규모를 자랑했으니 그들 단둘로 끝이 아닐 터.
“그러면.”
진무혼이 땅을 박차고 자리를 떠나자, 짧게 인사를 내뱉은 사마천 역시 그 뒤를 이어 땅을 박찼다.
스산한 바람이 황폐해진 땅을 쓰다듬는다. 홀로 남게 된 주호는 그들의 기척이 사라지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검을 거두었다.
“…말 그대로, 소란도 이런 소란이 없었군.”
하남 성읍과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지만, 산맥이 무너지고 지형이 바뀔 정도의 싸움이 있었으니 누군가 이쪽을 눈치채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닐 터다.
곧 저 멀리서부터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수십의 기척이 느껴졌으니. 다시 한번 짧게 한숨을 내쉰 주호는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