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낭인(浪人).
뒷골목의 해결사이자 돈만 된다면 제 부모라도 팔 종자들이었다.
무림맹에 들어오기 전, 주호는 뒷골목 생활을 전전할 때 잠시간 발을 담갔다 뺀 경험이 있었다.
서로 뒤통수를 치는 것은 예사요, 의뢰의 정보를 가지고 웃돈을 받고 표적에 넘기는 등 신의(信義)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이 대부분이었다.
그 역시 몇 번이고 배신을 당해 정말로 죽을 뻔한 적이 수두룩했으니.
‘하지만 그들이 왜?’
낭인과 척 진 적은 없었다.
마교나 혈천신교 쪽이었다면 자신들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테니 이런 번잡스러운 짓은 하지 않았을 터.
“…….”
주호는 눈앞에 선 낭인들을 살폈다.
으레 그렇듯 전부 일류 언저리에 달하는 수준. 개중엔 제법 싹수가 보이는 이도 있었지만, 낭인이란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리 눈여겨볼 정도는 아니었다.
“과, 광혼색마 유정남! 분명 큰 상처를 입었다고 들었거늘……!”
선두에 선 낭인이 삿대질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뭐?”
그 이해 못 할 말에 주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광혼색마는 무엇이고, 유정남은 또 누구인가.
“누구보고 색마라는 것이냐.”
터무니없는 누명에 주호의 두 눈 위로 날카로운 살기가 깃들었다.
꽈드득.
움켜쥔 손으로 섬뜩한 뼈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자 그 앞에 있던 낭인이 사색이 된 얼굴로 제품을 뒤져 한 장의 서찰을 꺼내 들었다.
“거, 건장한 풍채에, 처녀들의 정혈을 빨아 얻은 젊고 훤칠한 외모. 부, 분명 틀림없는…….”
탁.
순식간에 낭인의 곁으로 이동한 주호는 그 손에 들린 서찰을 빼앗아 들었다.
“…이건.”
그리 완벽히 닮지는 않았지만, 서찰에 그려진 얼굴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가관인 것은, 그 밑에 적힌 설명이었으니.
광혼색마 유정남.
“…세 개의 마을에서 열일곱 명의 처녀를 겁탈하고 잔혹하게 살해한 색마라고?”
으득.
절로 이가 갈리는 내용이었다.
대체 어떤 녀석이 자신을 희대의 색마로 오인해 낭인들에게 척살 의뢰를 내렸단 말인가.
“의뢰자는 누구지?”
“원칙적으로…….”
낭인은 주춤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으나, 이내 주호의 손에 목을 잡혔다.
“컥, 커억…….”
“원칙이란 것이 목숨보다 무거운가 보군.”
쿵.
주호를 중심으로 해일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와 주위를 짓눌렀다.
목을 잡힌 낭인을 비롯해 그 나머지도 질식할 것 같은 얼굴로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말하라. 감히 누가 이딴 것을 의뢰했는지.”
낭인들은 제 목숨을 귀히 여기는 족속이었다.
불어 강자에겐 한없이 약했으니, 곧 주호의 손에 붙들린 낭인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푸, 푸른 가면을 쓴 남자가…….”
“푸른 가면?”
알 수 없는 이야기에 그가 이마를 찌푸렸을 찰나, 상태창이 불쑥 눈앞에 튀어 올랐다.
[살기를 감지했습니다.]
쐐애애애애액-!
그와 동시에 뒤쪽으로 거센 파공성이 들이닥친다. 주호는 헛바람을 내뱉음과 동시에 목을 붙잡은 낭인의 몸을 내던졌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황급히 그것을 쳐냈다.
캉-!
짙은 청색의 강기가 마치 유리가 부서지는 것처럼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
주호는 굳은 표정으로 검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덜덜-.
아무리 갑작스러운 공격이라지만, 고작 일격을 막아낸 것으로 작지 않은 충격이 검을 타고 느껴졌다.
자박.
무성한 낙엽을 짓밟는 소리가 적막을 깨트리며 울려 퍼진다. 고작 한걸음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은 그 주인의 존재감이 범상치 않기 때문이리라.
곧 어둠을 가르고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호의 시선은 그 얼굴 윗부분을 뒤덮고 있는 푸른 가면으로 향했다.
“저, 저 사람이오! 저 사람이 의뢰했소!”
주호가 발하는 기세에서 벗어난 낭인이 목을 붙잡으며 컥컥거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쯧쯧, 버러지 같은 낭인들로는 역시 무리였나.”
괴한은 혀를 차며 뒤쪽에 있는 낭인들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곧 주호 쪽으로 향했으니.
“당대의 청룡이라. 명성이 자자하기에 보고 싶었거늘 찾아온 보람이 있었군.”
“…….”
주호는 상태창을 보기도 전에 녀석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태창]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이름: 사마천
별호: 청혈도제
직업: 혈천신교 칠혈성(七血星)
나이: 마흔둘
소속: 혈천신교
무공: 파형회륜도
경지: 초절정(四/十)
호감도: 中上
‘칠혈성이라.’
적혈마검 진무혼 역시 칠혈성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그것은 즉 그 둘을 포함해 일곱 명이 있다는 상징일 터.
스릉-.
사마천의 뒤로 기다란 언월도가 나타났다.
그는 그것을 가볍게 돌리는 것으로 바람을 일으키더니, 이내 주호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어떤가. 만월이 청명한 가운데 본인과 한껏 어울려봄이.”
싸늘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
주호는 검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사마천을 바라보았다.
‘천우희 쪽은 이미 멀리 떠났겠군.’
상대의 경지는 자신과 동수.
다만, 이쪽은 이전 은영혈귀대 대주인 단목우현과 싸울 때와는 달리 제 경지의 완숙에 든 상태였다.
“아, 걱정은 하지 마시게. 자네 뒤쪽에 있는 떨거지를 제외하면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으니. 나는 방해받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거든.”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 느껴지는 기운은 없었다.
물론 그와 같은 칠혈성인 적혈마검 진무혼이 모습을 숨긴 채로 있다가 결정적일 순간에 암습을 가해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호는 충분히 제 몸을 내뺄 자신이 있었으니.
“그러면 방해꾼부터 처리해야겠지.”
웅웅-!
하늘 높이 세워진 언월도의 날 위로 짙은 강기가 서렸다.
“…헉!”
주호의 뒤쪽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낭인 무리는 자신을 향한 살기에 비명을 토해냈다.
그러곤 사전에 짜놓기라도 해둔 듯 각자 다른 방향을 향해 필사적으로 땅을 박차 달아났다.
“재미있군.”
쐐애애애액-!
강기에 휩싸인 언월도가 거칠게 어둠을 찢어발겼다.
그럴 때마다 하나의 목숨이 사라지며 허공에 시뻘건 피가 흩뿌려졌으니, 울긋불긋한 이파리의 색이 절정에 이르렀다.
“…같잖은.”
주호는 비스듬히 선 채 냉소를 머금었다.
그는 딱히 협객도 아니었고, 성인군자도 아니었다.
자신과 관계되지 않은, 심지어 조금 전까지 이쪽을 색마라 여기며 목숨을 노려오는 이들을 지켜줄 정도로 정이 넘치지 않았으니 그저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하아…….”
선혈이 낭자한 한가운데서 사마천은 그 비릿한 내음을 깊게 음미했다.
그러곤 이내 천천히 몸을 돌리며 가만히 서 있던 주호를 향해왔다.
“이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푸른 가면을 쓴 귀신이 활짝 웃었다. 그 귀기 어린 표정에 두 눈을 가늘게 뜬 주호는 거두어두었던 검을 다시 뽑아들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정리하려 했던 녀석들이다.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고 해두지.”
“…자네는 사신문의 그 케케묵은 놈들과는 다르군.”
“다르다?”
“녀석들은 마치 제 놈들이 이 강호의 수호자가 된 것처럼 정의와 협의를 부르짖지. 실로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야. 그 역사를 조금만 파고들다 보면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거늘.”
“그런 의기 넘치는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던 차라.”
주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언제까지고 깨끗한 척 고고한 모습으로 있으려는 생각은 이미 옛적에 버린 지 오래다.
말로는 정파니, 정도이니 하지만, 무림인의 태생은 남을 짓밟는 것에 있다.
더 강한 무공을, 더 높은 신분을 원하는 것도 살아남기 위해서였으니.
“허나, 그것도 선이 있기 마련이다.”
시퍼런 귀화가 그의 두 눈에서 피어올랐다.
주호는 정의의 집행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지 않은가. 적어도 그가 보기엔 혈천신교는 악이었으며, 사흉수는 그릇된 것이었다.
쿵.
청룡신공의 기운이 주변을 짓누른다. 이전 낭인들을 상대로 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중압감이었다.
“…청룡의 기운인가.”
사마천은 전신을 뒤덮는 저릿저릿한 기운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위쪽에서는 아직 자신들의 행적을 노출 시킬 때가 아니니 가급 적 충돌을 피하라 했지만, 별로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행적이 노출되는 것이 문제라면, 목격자를 전부 쳐 죽여 입을 막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붕붕붕붕-.
그의 손에 들린 언월도가 머리 위에서 세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딛고 선 땅 위에 자란 풀들이 그 흐름을 따라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고, 종래엔 갈가리 찢어져 사방으로 흩날렸으니.
“회천(回天)-.”
짙은 청색의 강기가 그 위에서 휘몰아친다. 그러곤 곧 사마천의 의지에 따라 한점으로 모여들었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벼락같이 내질러졌다.
콰아아아아아앙-!
거센 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그 반동으로 자욱한 먼지가 일어난 가운데, 주호는 힘껏 땅을 박차고 올랐다.
“어딜 가시나.”
파아앗-!
곧바로 지척까지 따라붙은 사마천이 히죽 웃으며 언월도를 휘두르자 다시금 짙은 청색의 강기가 그 위에서 줄기줄기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잠운(潛雲)-.”
주호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처음엔 검 끝에 손을 가져다 댄 모습이었으나, 이내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휘둘러지며 사마천의 공격에 맞섰다.
파바바밧-!
서로의 강기가 충돌해 사정없이 부서진다. 푸르고 짙은 편린이 사방으로 흩어졌을 때,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둘은 조금의 거리를 둔 채 다시금 땅에 내려앉았다.
“이거 참. 궁기는 네놈을 별로 신경 쓸 수준이 아니라 했거늘. 제 상태가 아니라 해도 보는 눈까지 낮아졌을 줄이야. 혈귀 쪽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길 잘했군.”
“혈귀는 은영혈귀대주를 뜻하는가.”
“그렇네. 칼질을 제법 한다면서 칭찬하더군.”
“제법이라.”
짧게 숨을 토해낸 주호는 사뭇 가라앉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혈천신교에는 너와 같은 수준의 고수가 몇이나 있지?”
청혈도제 한 명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문파의 수장으로 꿇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더해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로 추론할 수 있는 숫자는 사흉수의 넷과 칠혈성의 일곱. 족히 두 자릿수에 달하는 숫자였으니.
“왜, 두려운가?”
사마천은 히죽 웃으며 제 언월도를 까딱였다.
그 도발적인 모습에 쓴웃음을 지은 주호는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번거로운 일이 많아져서 귀찮을 따름이다.”
“솔직하지 못하군. …그래, 한 가지 정도만 말해주자면.”
사마천은 제 언월도를 크게 한 번 휘둘렀다.
거친 광풍이 사방을 휩쓸고, 땅 위엔 날카로운 것에 쓸려나간 상흔이 깊게 남아 있었으니.
“지금 보인 것이 네 전력이라면, 오늘 이 자리를 살아나갈 수 없을 테니 헛된 기우일 따름이다.”
깊은 어둠이 서린 한 쌍의 눈동자가 주호를 바라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