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할 일도 없는 놈들이군요. 고작해야 후기지수 몇몇 모이는 그런 대회에…….”
“상징성이 있으니 말이지.”
주호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학관 측의 입장에서 보자면 교류 대회는 뜻깊은 행사이지만, 세간의 시선으로는 그저 하나의 행사일 뿐이었다.
문제는 행사에 참여하는 면면이 작은 무림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
구파일방 그리고 세가 연합을 비롯한 명문부터 수많은 중소 문파까지 그 방위를 가리지 않았다.
만일 사상자라도 발생한다면 적지 않은 소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위쪽에는 알리지 않는 건가요?”
남궁연의 물음에 주호는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그들의 습격을 받은 너희에게조차 터무니없다고 여겨진 이야기다. 더욱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행사의 결실을 눈앞에 둔 와중에 일개 교관의 몇 마디 말로 그 방향을 좌지우지하기엔 어렵겠지.”
“그래서, 교관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야기대로라면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당천유가 물었다.
그를 비롯한 후기지수들은 이미 주호가 일개 교관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이야기를 알고 자신들에게 말해주는 것일 터.
“…….”
주호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이건?”
엉겁결에 그것을 받은 당천유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잿빛 색 위로 맹(盟)이라 음각된 패였다.
“나는 맹주님 직속으로 움직이는 그림자다. 따라서 이런저런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았지. 이번 정보 역시 날 통해 맹주님께 직접 보고되었으니 이쪽에서도 나름대로 준비할 것이다.”
“아…….”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으나, 납득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간 보였던 범상치 않은 무위와 청화루에서 엮였던 불명의 세력까지. 모두 무림맹과 연결점이 있다면 해소되는 의문점이었으니.
‘과연.’
특히 위천강은 속으로 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의 아귀를 짜 맞췄다.
제 삼의 세력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무림맹의 그림자라면 그간 들었던 의문이 전부 설명되었다.
남은 의문은 딱 하나였다.
‘신교가 녀석들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내 쪽으로 향하는 정보 중 그것에 관한 것이 은폐되었거나.’
어느 쪽이든 둘 다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더는 신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그것을 파헤쳐볼 생각이었다.
“빠질 사람은 빠져도 좋다. 아마 닥쳐올 위험은 이전의 것들보다 적지 않으니.”
“…설마 여기까지 와서 발을 뺄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주호의 말에 선우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각자 품고 있는 생각은 다르지만, 귀결되는 결과는 같았으니. 그 확고한 뜻을 본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경계를 늦추지 마라. 교류 대회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은 분명하니. 교관뿐만이 아니라 같이 대회에 참여한 관생마저 녀석들의 편일 수도 있다. 너희 일곱을 빼고는 아무도 믿지 말도록.”
주호는 잠시 위천강을 의식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본신인 천마신교는 몰라도 위천강 자체는 이제껏 혈천신교와의 연결점을 보인 적이 없었지 않은가.
‘설령 배신한다고 하더라도…….’
주호는 가만히 제 신검(神劍)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이제껏 수백의 마인을 베어낸 그의 감각은, 아직 무뎌지지 않았다.
***
정천 학관과 천무 학관의 교류 대회가 며칠 앞까지 다가왔다.
그간 주호는 바삐 움직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끝냈다.
무림맹에 방문해 단철량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천우희와 사신문에 사정을 설명해 지원을 요청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교류 대회를 중지시키고 내부 감사를 통해 혈천신교의 인원을 솎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명분도 없을뿐더러 섣불리 움직였다간 괜한 역풍만 맞을 수 있었다.
단철량 역시 맹주는 여러 이해관계에 묶여 있는 위치인지라 유사시가 아니라면 직접 적으로 나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해올 정도였다.
“무공이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영웅담처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더군.”
때는 교류 대회가 열리기까지 약 이주 가량 남은 어느 날, 청명한 보름달이 뜬 밤 아래 주호는 천우희와 함께 야행을 나서고 있었다.
“…갑자기 웬 청승이야?”
밤길을 이동하던 중 한숨과 토해진 말에 천우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옛적에는 고수가 된다면 세상만사를 손짓 하나로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허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을 따름이었지.”
남부럽지 않은 무공을 손에 넣었지만, 눈앞에 닥쳐온 적 하나조차 공격할 수 없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이었다.
천우희는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는 뜻으로 어이가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곤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실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러면 손짓으로 세상만사를 처리하기에 아직 당신 무공이 낮은 거 아니야?”
“…….”
주호의 말문이 막혔다.
“맞지?”
“…할 말이 없군.”
옅은 미소와 함께 물어오는 천우희의 목소리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남 성읍을 벗어난 그들은 다른 도시로 넘어가는 산맥이 굽이친 외진 곳에서 멈춰 섰다.
교류 대회 직전 하남 성읍의 옆 도시인 태허에서 사흉수의 흔적이 발견된바.
호북에서 올라오는 주작단과 합류해 그곳을 조사하러 가는 천우희를 배웅하기 위한 것이었다.
“흔적만 조사하러 가는 거니까 아무리 늦어도 교류 대회 사흘차의 날까진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동안이 관건이로군. 뭐, 무림맹 측에서도 준비를 하고 있으니 사흘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
주호는 혈천신교의 무리가 대회 초장부터 일을 벌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첫 교류 대회인 만큼 현재 무림 문파들의 이목이 쏠린바.
그들의 목적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면 이목이 시들시들해진 중반 차에 습격해오는 것이 더 효과적일 터였다.
“또 모르지. 항상 그랬듯이 마교의 이름으로 둘러댈지는.”
마교는 그들에게 있어서 좋은 핑곗거리였다.
세간에서는 청화루의 사건이 그랬듯 그들의 공작은 전부 마교의 이름으로 덧씌워져 있었으니.
쉬시시식-.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저 멀리서부터 다수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곧 피풍의를 입은 수십의 인원이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 가운데 제일 출중한 이가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단주를 뵙습니다.”
“고생했어요, 부단주. 오는 길에 특별한 일은 없었죠?”
“예, 따로 보고드릴만한 것은 없습니다.”
주작단 부단주 단벽진.
건장한 풍채의 사내였다. 나이는 이립 중반인 절정의 고수로, 주작단의 이름에 걸맞은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청룡께도 인사드립니다. 문에서 뵌 뒤로 벌써 몇 달이 흘렀군요.”
천우희에게 인사를 마친 그는 이내 주호에게도 포권을 올렸다.
일전 사신문에 방문했을 당시 청룡단을 비롯한 다른 단의 요인들과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부단주.”
“항상 저희 단주님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듣자 하니 매번 술 상대를 해주신다고…….”
“제가 아니면 누가 그녀와 대작해주겠습니까.”
“부디 앞으로도 고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단주님을 부탁드릴 수 있는 건 청룡뿐이니까요.”
그녀를 주제로 이야기하니 죽이 잘 맞았다.
그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농을 던지자, 천우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둘을 노려보았다.
“…이것들이.”
하지만 주호와 단벽진은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화제를 바꿨다.
“참, 태허 쪽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무래도 교류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쪽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은데.”
“사흉수의 지부로 보이는 몇 개의 조직이 특정되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지원이 오고 있으니 늦어도 보름 안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여차할 때를 대비해 다른 쪽에도 이곳을 봐달라고 요청했으니까 우리가 조금 늦어도 크게 문제는 없을 거야.”
짧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곧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보았다.
“숨 돌릴 시간은 충분했지? 그러면 서두르자.”
“존명.”
천우희의 말에 주작단원들이 하나가 되어 대답해왔으니.
짧게 고개를 숙이며 이별을 고하는 단벽진에 주호 역시 눈짓으로 나중에 보자며 화답해주었다.
쉬시시식-.
주작단원들은 이곳에 왔을 때처럼 날랜 몸놀림으로 어둠을 향해 몸들 던졌고, 이내 그 기척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도 이만 가볼게.”
“무운을 빌지.”
가벼운 인사말이었다.
천우희는 그 끝에서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은 듯 잠시 멈칫거렸지만, 이내 몸을 돌리고 먼저 간 일행의 뒤를 쫓았다.
“…….”
주위는 순식간에 적막에 잠겼다.
어둠 사이로 흘러온 가을바람만이 울긋불긋한 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흔들며 제 존재를 알려왔으니.
“날이 좋구나.”
주호는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들었다.
교류 대회 전, 마지막 휴일이었다.
담우양을 비롯한 다른 교관들은 한결같이 술이나 마시자며 꼬드겨왔지만, 달이 너무 밝은 날이라 밤거리를 거닐고 싶었다.
천우희만 아니었더라면 산책이라도 했을 터였으나, 밤중 이렇게 홀로 산길을 노니는 것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다수의 기척을 감지했습니다.]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 때 눈앞에 떠오른 그러한 상태창의 글귀만 아니었더라면 더없이 만족스러운 하루가 되었을 터였다.
스스슥-.
어둠 사이로 수많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생각지도 못했거늘.”
천우희와 밤길을 거닐며 이곳에 올 때까지는 분명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
뒤따르는 이도 없었고, 지켜보는 기척 또한 느끼지 못했다.
“……?”
곧 어둠 위에 떠오른 그들의 상태창을 본 주호의 눈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처음엔 혈천신교나 마교 쪽의 습격자인 줄 알았다.
이런 야밤에 자신을 습격할 곳은 그 두 곳밖에 없지 않은가.
혈천신교에는 자신이 청룡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을뿐더러, 마교 측에도 월영사신이라는 이름의 은원이 있었다.
벌써 반년도 더 넘은 일이지만, 그들의 정보력을 생각한다면 이쪽을 추적해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자리한 이들은 소속도, 무공도, 그 외의 어떤 것들도 모두 공통점이 없는 이들이었으니.
쐐애애액-!
오직 흉흉한 살기를 뿜으며 그에게 다가올 뿐이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호는 소매를 걷었다.
검을 뽑을 필요조차 없었다. 이 중엔 그의 지척에 다다를 수 있는 수준은 없었으니.
챙-!
선두에 온 다섯 명의 습격자들이 일시에 검을 내질러왔다.
주호는 가볍게 땅을 박차는 것으로 그것을 피해 내곤 이내 가볍게 손을 내질러 습격자들의 목을 붙잡았다.
우득-.
손짓 한 번마다 한 명의 목이 부러지며 숨이 끊어짐을 알렸다.
손짓 한 번으로 만사를 처리하기엔 무공이 낮았겠으나, 눈앞에 닥쳐온 이들의 생사를 관장하기엔 충분했으니.
“으으…….”
그렇게 스무 명쯤 되는 이들의 목을 순식간에 끊어내니 괴한들은 더 이상 함부로 다가오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주춤했다.
“……?”
주호는 손을 털어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태창으로 보이는 신상에는 분명 동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검엔 모두 하나같이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기파? 아니 무공 따위가 아니다. 이건 그저 사람을 죽이기만을 위한 살검(殺劍)일지니.’
툭.
팔을 가볍게 휘두름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낸 주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놈들, 흑점의 낭인이로군. 어째서 날 공격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