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이름도 별호도 소속도.
그 어느 것도 세간에 알려진 것과 같은 것이 없었다.
처음부터 거짓된 이름이었던 건지, 아니면 본인을 죽이고 위장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농락당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하하. 그나저나 알고 있는가. 교류 대회 말미에는 특별히 기획한 행사가 또 따로 준비되어 있다네. 각 수석교관 정도만 알고 있는 이야기지. 나름대로 재밌는 마무리가 될 것이야.”
악진명은 기대하라며 주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혹시나 그가 사흉수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 태도나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로 진무혼에 대해 모르는 듯싶었다.
“…어째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다 싶더니, 자네가 붙잡고 있었는가.”
그때 반대편에서 또 한 무리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팽대환은 악진명 앞에 서 있는 주호를 비롯한 다른 교관들을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이 앞에 섰다.
“서로 공사다망하지 않은가. 잡담은 여기까지 하게.”
“거, 빡빡하기는. 이런 기회에 서로 친분을 다지는 거지 않는가. 교류 대회라는 이름이 괜히 붙었겠나. 관생뿐만 아니라 교관들 역시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거늘.”
“말은 번드르르하군.”
팽대환의 눈짓에 주호를 비롯한 정천 학관의 교관들은 악진명 쪽에 고개를 꾸벅 숙이곤 그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
“…….”
주호는 잠자코 분위기를 따랐다.
몸을 돌려 걸어갈 때까지도 뒤통수를 향해 강렬한 시선이 꽂혀왔다.
상대측은 자신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신 역시 그의 정체를 알고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할 터.
‘드러난 무위는 나보다 한 수 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명분인가.’
할 수만 있다면 진무혼의 정체를 밝히고 그를 제압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바.
자신의 명성과 위치로는 오히려 역풍을 맞기 십상이었다.
이런 시기에, 이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이번 교류 대회에 그들이 무슨 수작을 부려오리라는 것을 반증하는 사실이었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이쪽에 접근해왔다고 볼 수도 있을 터.
‘…그녀에게 연락을 넣어야겠군.’
하지만 수면 밑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
“자네 무슨 일이 있는가? 아까 악 교관님을 만나고 난 뒤로 계속 표정이 굳어 있던데.”
저녁이 되었을 때 교관들은 모두 학관으로 귀환했다.
이제 교류 대회까지 얼마 남지 않는바.
앞으로는 쉴 날이 거의 없기에 다들 마지막 남은 여유를 만끽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질 찰나, 담우양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설마 정말로 천무 학관으로의 이직을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조건은 나쁘지 않더군요.”
“…정말로?”
“농담입니다. 제가 그렇게 신의가 없는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 않은가. 실제로 옮겨간 몇몇이 있으니까 말이네.”
담우양의 말처럼 정천 학관의 교관으로 있다가 천무 학관 쪽으로 넘어간 이들이 소수 있었다.
풍문으로 들려오는 소리로는 이쪽의 계약 조건의 몇 배나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고 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니.
소속 간의 이동이 자유롭고, 월봉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급 교관 측에서는 제법 달콤한 이야기였다.
“하여튼 뭔가 생각하는 게 많은 듯싶으니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하고 싶지만, 끝내야 할 업무가 남아서 말이네.”
담우양은 아쉽다는 입맛을 다셨고, 다른 교관들 역시 마찬가지인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낮부터 이때까지 쉬지 못하고 일만 하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피로를 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교류 대회의 일로 업무가 잔뜩 쌓여 있었기에 언감생심일 뿐이었다.
“나는 이대로 집무실에 돌아갈 생각인데, 자네는?”
“…저는 제자들을 좀 보고 가겠습니다.”
“그러게나.”
홀로 남게 된 주호는 짤막한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바라마지 않던 힘도 얻었고, 명성과 직위도 착실하게 쌓았다.
하지만 눈앞에 명확한 적이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주호는 제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저들은 필시 교류 대회 측에 혼란을 가해 시국을 어지럽히려는 것일 터.
이전이라면 기댈 곳이 없어 홀로 끙끙 싸매고 있었겠지만, 지금 자신의 주위엔 여러 사람이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호는 지체할 것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실전의 이해 강의로 지정된 연무장.
해가 떨어지고 하늘이 짙은 푸르스름함으로 뒤덮여감에도 그곳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기척을 죽인 주호는 훌쩍 담을 넘어 그 위에 걸터앉았다.
“하압-!”
다섯 명의 후기지수가 지켜보는 와중, 악비산과 선우연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비무를 벌이고 있었다.
우위를 정한 것은 당연히 악비산 쪽이었다.
선우연 역시 이때까지의 경험으로 제법 성취를 얻긴 했지만, 한계까지 자신을 쥐어짜고 단련한 악비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애써 매화검법의 묘리로 그 창끝을 떨친다고 하여도, 이내 귀신같이 달라붙어 거리를 좁힐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
선우연은 잔뜩 인상을 쓰며 억지로라도 그 품을 향해 파고들려 했지만, 악비산은 마치 단단한 거석과 같이 단 한 순간의 틈을 주지 않았다.
“거기까지.”
당천유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둘은 병장기를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서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앞으로 나온 다른 이들과 자리를 바꿨다.
“흠.”
그 뒤를 이어 남궁연과 천후가 연무장 가운데에 설 찰나, 주호는 제 기척을 드러냈다.
이전의 후기지수들이라면 천후와 위천강을 제외하고 느끼지 못했을 정도의 것이었지만, 지금은 순서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부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교관님?”
남궁연이 황급히 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이전에 있었던 비무 때문에 흘린 땀이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정돈할 찰나, 작게 웃음을 토해낸 주호는 연무장으로 내려섰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는가 보군.”
“말도 마십쇼. 쉬고 싶은데 억지로 끌려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솔직하지 못하긴. 자네가 제일 열심히 했으면서.”
“…거, 사람 무안하게.”
위천강의 핀잔에 당천유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린 주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반년간의 어울림이었지만, 쌓인 정이 적지 않았다.
하다못해 악연으로 엮인 위천강이나 선우연에게도 마찬가지였으니.
“알려줄 것이 있다.”
주호는 어정쩡한 태도로 이야기를 숨겨 이들을 위험에 빠지게 하기는 싫었다.
“교류 대회의 공지입니까?”
“대략적인 개요는 들었는데, 혹시 저희한테만 따로 말씀해주시는 겁니까?”
후기지수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주호는 이때까지 풍겨왔던 가벼운 기색을 지우고 진중한 얼굴로 그들을 향했다.
“맹주님과 남궁세가주를 비롯해 극소수밖에 알지 못하는 것이지.”
“…예?”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은 빠져도 좋다.”
의미심장한 그 말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특히 선우연은 가늘어진 눈으로 주호의 눈치를 살폈으니.
‘농을 던지는 것 같지는 않은데…….’
갑자기 맹주와 남궁세가주의 이야기가 왜 나온다는 것인가.
후기지수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이야기의 가닥을 잡은 것은 단둘뿐이었다.
“…….”
천후는 주호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만큼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일 터.
‘설마.’
주호를 비롯한 교관들이 조금 전까지 교류 대회가 펼쳐질 무대에 다녀왔었다는 것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곳에서 무언가 일이 있었다는 소리였다.
“…….”
남궁연 역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흉수에 관한 것은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다닐 이야기가 아니었다.
더욱이 선우연이나 악비산, 그리고 당천유 쪽은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에 속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우려보다 주호에 대한 신뢰가 깊기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농을, 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리 분위기를 잡으시는 겁니까?”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위천강이었다.
태도는 평소와 같이 건들건들했지만, 그 시커먼 눈동자 안 속에는 숨길 수 없는 흥미가 돋아 있었다.
주호가 이렇게까지 분위기를 잡으며 말해온 것은 처음 있는 일. 거기에 더해 무림맹주와 남궁세가주까지 거론했다는 것은 필시 심상치 않은 이야기라는 것을 뜻했다.
“남궁세가행에서 일어났던 습격, 그리고 청화루에서 있었던 소란.”
주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후기지수들을 보며 말했다.
“세간에는 마교의 소행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
위천강은 가벼운 마음으로 귀를 열었던 차였지만, 그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일순간 평정을 잃으며 반문했다.
“마교가 아니라면, 혹시 사도맹입니까?”
철대환이 살짝 머뭇거리는 모습으로 물었다.
어느 정도 타당한 추측이었다.
강호가 넓다곤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의 집단을 몇 군데고 운용할 수 있는 곳은 손에 꼽는 정도니.
하지만 주호는 담담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를 습격했던 건 혈천신교라는 곳이다.”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사흉수의 이야기를 꺼내야 했지만, 그 모태는 혈천신교 자체였다.
“혈천신교? 혈교와 비슷한 맥락입니까?”
“다르다. 통상적으로 혈교는 마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지. 혈천신교는 그보다 더 오래됐고, 잔혹하며, 끈질긴 집단이니.”
주호는 사신문에 갔을 당시 하월벽을 비롯한 여러 이들에게 혈천신교와 사흉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혈천신교나 사흉수의 역사가 긴 것처럼 사신문 역시 수없는 세월을 이어져 내려오며 그들과의 기록을 남겨왔다.
무황의 상태창으로도 알 수 없었던 비사(秘事) 그 안에 수없이 자리했었고, 그들이 강호의 굵직굵직한 사건마다 관여해왔다는 사실에 그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된 것이다.”
주호가 혈천신교에 관해 이야기를 끝내자 좌중은 침묵에 잠겼다.
남궁연과 천후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기에 내색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며 정리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과연,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군.’
위천강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에 신비 조직은 해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다고 하였다.
물론 그 전부가 실속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호가 말한 혈천신교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충분히 경각심을 가질 만했다.
‘허나 내 쪽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거늘. 설마 이쪽에 정보가 제한될 만큼 극비의 이야기란 건가?’
천마 신교의 소교주의 신분인 위천강은 원한다면 교내의 거의 모든 정보를 열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 감히 손댈 수 없는 성역이 있었으니.
바로 신교의 교주인 천마(天魔)에 직결되는 것과 신교의 대계(大計)의 근원이 되는 요소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천마, 그리고 군사를 비롯한 그 최측근인 심복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었으니.
“…그래서 갑자기 그 혈천신교의 이야기를 해주시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설마 그 녀석들이 교류 대회에 뭔가 작당을 꾸미고 있답니까?”
위천강은 어깨를 으쓱이며 농을 던졌다.
제 딴에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 겸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었지만, 주호는 살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오늘 확인한 바로는 아마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진짜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