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선발 대회의 우승자를 결정하는 마지막 비무는 악비산 때와는 달리 그렇게 큰 반향을 보이지 않은 채 무난히 천후의 승리로 끝났다.
뒤이어 그 밑의 순위 역시 확정되었다.
발표된 명부를 본 학관 내의 다른 관생들은 이변이 일어났다며 크게 떠들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사정을 아는 이라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한 결과라 말했을 따름이었다.
一位. 천후
二位. 남궁연
三位. 악비산
四位. 선우연
五位. 위천강
六位. 당천유
七位. 철대환
익숙한 이름 밑으로 총 일백의 명단이 개제되었다.
더불어 정천학관의 일 년 차 관생을 대표한다는 뜻으로 가슴 어름께에 정천을 구성하는 색 중 하나인 푸른 수실을 수여 받았다.
다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주위에 자리한 이들을 바라보며 한껏 그 고양감을 뽐내었다.
주호 역시 약속을 지켰다.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는 후기지수들이 모두 순위권에 안착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선발 대회의 행사가 끝난 뒤, 학관과 그리 멀지 않은 작은 객잔의 건물을 통째로 빌렸다.
적지 않은 지출이었으나,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큰 지출이었으나 하루 정도는 이들의 축하를 위해 기꺼이 제 전낭을 열었다.
선발 대회가 진행되는 사흘간 후기지수들은 쉬지 않고 다른 이들의 비무를 지켜봤고, 남은 시간엔 한계까지 자신을 쥐어짜 단련하는 데에 매진했다.
“…이러다가 교관님 주머니가 거덜 나는 것이 아닌가?”
일곱 명의 후기지수는 쉬지 않고 음식과 술을 비워냈다.
몇 시진이 지나도 그 속도가 떨어지지 않자 살짝 걱정이 든 선우연이 말했으나, 옆에 앉아 있던 당천유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뭐, 교관님 정도 되시는 고수라면 많이 받지 않겠나. 걱정하지 말고 들게.”
“그렇다 할지라도…….”
“그러고 보니 교관님의 본가가 저기 산동 지방에서 상가를 하고 계시다 들었네. 주위에선 규모가 꽤 크다지? 그러니 우리가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건너편에서 비싼 술만 골라서 마시고 있던 위천강이 염려 놓으라는 듯 툭 하고 내뱉었다.
“…….”
어처구니가 없던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호는 실소를 내뱉었다.
위천강의 이야기는 필시 자신의 뒷조사를 하다가 알게 된 것일 터.
가끔 제 동기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자면 그가 천마신교의 소교주라는 사실이 부자연스러워지기도 했다.
“…다음에는 지지 않을 거예요.”
그간 잠자코 홀로 술을 마시던 남궁연은 분한 표정으로 빈 술잔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기대하겠소.”
천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악비산 때와는 달리 압도적으로 끝난 비무였다. 그렇기에 위로할 다른 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찰나, 온몸에 붕대를 둘둘 두르고 있던 악비산이 고기를 씹어 넘기며 끼어들었다.
“남궁 소저, 나도 그게 뭔지 알고 있소. 벽이 있으면 오히려 불타오르는 법이지. 그렇지 않소?”
“…자네는 그만 좀 불타오르게나. 아직도 온몸에 화상이 가득한데.”
친우의 실없는 소리에 당천유는 한숨을 내쉬며 그 등짝을 때렸다.
대부분 티끌 하나 다치지 않은 채 멀쩡한 모습으로 끝난 것과 달리 악비산은 천후와의 비무에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내상 쪽은 주호의 도움으로 다스릴 수 있어 며칠만 지난다면 정상으로 회복할 수 있을 테지만, 주작의 불꽃에 의한 화상은 단시간에 회복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악비산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콧바람을 내쉬며 대답했다.
“이 상처들은 내게 훈장과도 같은 것이다. 그만큼 격렬한 싸움이었다는 것이니.”
자신만큼이나 천후의 진심을 끌어낸 이는 없다. 그 말에 천후는 술잔을 비우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관에 와서 같은 관생 중 자네만큼 강했던 이는 없었네. 정말로, 다음이 기다려지는군.”
“흠.”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악비산은 제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러곤 어떻냐는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지만, 주위에 있던 이들은 다 같이 실소를 흘리며 악비산답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교관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희 정도면 천무학관 쪽이랑 교류 대회를 치러도 어렵지 않게 이기겠지요?”
선우연의 물음에 다른 이들의 시선 역시 한곳으로 모였다.
막,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입안으로 가져가던 주호는 손을 멈추고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군. 선발 대회는 어디까지나 정천학관 내부의 기준이다. 천무학관까지 합한다면 어찌 될지는 닥쳐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법이지.”
“하긴 그 친구들은 자칭 황금세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위천강이 비꼬듯 말을 내뱉자, 악비산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보편적인 수준이라면 견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상위권에 도달한다면 우리에 비하지 못하겠지.”
“동감하네.”
당천유 역시 그 말에 찬성했다.
나머지 이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심정인 듯해 보였기에 주호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뭐, 반년간 내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너희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승 소감으로는 교관님의 지도가 있었노라 고하겠습니다.”
“저도요.”
농이 섞인 위천강에 말에 남궁연도 옆에서 말을 보탰다.
“그나저나 교류 대회 쪽은 어떻게 진행되는 겁니까? 선발 대회 이전에도 물밑에서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돌던데. 자네, 저번 교양 강의 때 함께 듣지 않았던가.”
“그렇군. 상당히 구체적인 이야기였지.”
선우연의 말에 철대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주호는 잠시 고민했다.
그들의 말처럼 여러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것은 학관 내에서도 알고 있었다.
화제가 집중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개중엔 실제로 대회의 내부 정보가 섞여 있다는 것도 파악되었다.
그렇기에 수석교관인 팽대환은 모든 교관에게 입단속을 철저히 할 것을 명했던 차였다.
‘뭐, 말해도 상관없겠지.’
주호는 그것을 가볍게 의식의 한편으로 밀어내었다.
공정성의 문제가 있지만, 어차피 퍼질 대로 퍼진 이야기가 아닌가.
정천학관보다 더 절실한 천무학관 측에선 벌써 교류 대회에 대한 방향으로 전적인 교육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혼자만 깨끗한 채로 세상에 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적당한 수위를 지키며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말 그대로 대회다. 몇 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두고 참가한 인원의 능력을 시험하지. 이전에 악비산이 말했던 것처럼 그 내용이 비무가 될 수도 있고, 기관진식 같은 것이 설치된 함정이나 진법을 통과하라는 것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 식으로 되는 겁니까. 확실히 전례가 없던 이야기군요.”
선우연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략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실제로는 더 복잡한 내용이니 기대할 만하다.”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봐오는 시선에 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확실히 새로운 변화였다.
그렇다고 찰나에 준비한 갑작스러운 것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어낸 결과였으니.
자신을 비롯해 몇몇이 한 것이라곤 그것을 점검하는 역할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조금 더 시일을 두고 여유롭게 개최하고 싶었을 테지만, 아마 작금의 분위기 때문에 서두른 것일 테지.’
학관 내부는 그 영향이 적지만, 당장 하남 시내만 하더라도 분위기가 별로 좋지 못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청화루의 일부터 시작해 곳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분란에 예민해져 있었다.
당장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계기가 있다면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단순히 무공만 강하다고 해서 통과하기는 힘들 거다. 안목, 지혜,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겠지. 누누이 말했듯, 끊임없이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호는 삼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무황의 비동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는 죽음의 문턱과 마주했다.
그때의 자신은 무인이라고도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비루한 경지에 속해 있었다.
무명 고수의 손짓 한 번에도 사지가 갈가리 찢기고, 목이 날아가는, 그런 종잇장 같은 존재였으니.
그럼에도 수많은 사상자를 뒤로한 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약간의 천운과 더불어 제게 주어진 모든 것을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은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힘들 테지.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 잘 기억해두도록.”
언젠가 그것이 너희의 목숨을 구해줄 테니.
주호는 끝말을 삼키며 옅은 쓴웃음을 흘렸다.
***
선발 대회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아직 교류 대회의 개최까지는 일시가 얼마간 남았기에 학관은 다시 정상적으로 강의에 들어갔다.
하지만 다들 얼마 뒤에 있을 교류 대회에 이목을 집중한바.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십할 중 십할이 교류 대회에 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더군다나 시일이 가까워질수록 어디서 이야기가 새어 나온 것인지 대회의 개요와 그 중간 내용에 관해 상세한 정보가 나돌았으니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돌아다닌 정보들을 취합하면 이 정도인가.”
강의가 모두 끝난 날의 저녁.
일곱 후기지수는 학관 앞의 주점에 모여 있었다.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 우려되어 이층의 객실을 잡았고, 그마저도 양옆의 방까지 모두 빌려 철저하게 했다.
“아마 이 중 칠할이 거짓이겠지. 지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
“문제는 나머지 삼할 쪽이군요.”
위천강의 말에 남궁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의 앞에선 어렵지 않게 우위를 차지하리라 당당히 말했지만, 그들 역시 경각심은 지니고 있었다.
황금세대라는 말은 여전히 우습기 짝이 없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진 않았을 터니 어느 정도 대비는 필요로 해 보였다.
“흠. 일단 선발 인원 중 조를 꾸려서 교류 대회의 예선을 진행하는 것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 같더군.”
“신빙성이 있다고?”
어찌 알았냐는 선우연의 물음에 당천유는 씩 미소를 지었다.
“그렇네. 당가의 방계 중 한 명이 천무학관 쪽에 재학 중이네. 공교롭게도 교류 대회의 선발 인원으로 뽑혔지. 대충 들어보니 저쪽은 이미 상당한 정보가 풀렸다는 것 같더군.”
“…그래도 그렇게 치졸한 수까진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거늘.”
“그 정도야 뭐… 이 강호는 승자의 것이 아니겠나. 우승을 한다면 그 나머지 잡음은 알아서 묻히리라 판단한 것이겠지. 하여튼.”
당천유는 탁자 위에 놓인 서찰들을 가리켰다.
“인원은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지만, 다섯에서 열 사이로 한 조를 꾸리는 것이네. 설마 두 학관의 인원을 혼합해서 만드는 조는 없을 터니 선발 대회의 순위가 크게 작용할 터지.”
“그렇다면…….”
“그래. 우린 이 인원 그대로 나가는 것이 좋겠지.”
당천유는 고개를 들어 면면을 살폈다.
선발 대회의 일위부터 칠위까지.
어디에 내놓아도 모셔갈 순위였으나, 냉정히 생각하자면 이 자리에 모인 이들끼리 힘을 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는 상관없네.”
“나는 괜찮다고 생각이 드는군.”
“저도 좋아요.”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사를 보였다.
괜히 어정쩡한 무리에 섞일 바엔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나았으니.
“이러면 어렵지 않지. 우리의 목표는 단순한 우승이 아니니.”
정천과 천무 사이에 있는 알력 다툼은 유명한 것이었다. 이번 대회 역시 어느 곳에서 우승자가 나올지도 초유의 관심사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천무학관에서 작금의 신입 관생들을 황금세대니, 뭐니 하면서 치켜 올려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황금 운운했던 것이 얄팍한 도금에 불과했다는 걸 알려주어야겠지.”
악비산의 호전적인 말에 다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