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는, 설마 상대가 저 친구라니.”
당천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 앞에서 도에 묶인 천을 풀어내고 있는 천후를 바라보았다.
하다못해 그만은 아니길 기원했다.
악비산이든, 선우연이든, 위천강이든, 심지어 남궁연이든.
천후만 아니라면 어떻게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하필 제일 어려운 이를 대진 상대로 만나고 말았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당천유는 연신 한숨을 내쉬며 불평을 내뱉었다.
설령 여기서 탈락한다고 하더라도 육위 안에는 들 테니 적어도 가문에 체면치레는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자신 역시 무인이었다.
향상심이 있었고, 호승심이 있었다.
겸허히 패배를,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절그럭.
잠시간 불평을 내뱉으며 마음을 가다듬은 당천유는 소매 안의 암기를 움켜쥐었다.
서로 전력 차이가 명확하더라도, 설사 결과가 눈에 보이듯 훤하다고 해도 끝까지 싸워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옆쪽의 무대 역시 흉흉하기는 매한가지였으니.
“…소저, 기세가 너무 날카로운 것 같소. 이건 비무이지 생사결이 아니오만.”
“저는 평소와 다름없어요.”
그 말에 위천강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남궁연을 중심으로 서릿발처럼 차가운 한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얼핏 보면 남궁세가가 아니라 저 멀리 북해 쪽에 있는 북해빙궁의 진전을 잇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매서운 것이었으니.
‘볼수록 아쉽구나. 내 배필로는 더없이 걸맞은 성정이거늘.’
처음엔 그 외모에 혹했을 뿐이었지만, 알아가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그건 표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수라 불릴 정도의 무공을 지닌 이들은 많지만, 그들은 대부분 각자 지닌 본연의 한계가 있기 마련.
하지만 위천강이 판단하기에 남궁연은 어디까지 올라갈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당장 두각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조차 가늠하지 못할 정도의 무재와 그것에 뒤떨어지지 않는 꾸준한 노력까지.
적어도 이 학관에 있는 이 중 그녀보다 더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더욱이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인지 남궁세가에서 돌아올 당시, 이전보다 그 성취가 한층 더 진일보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일 그녀가 신교에 입교한다면.’
출신? 상관없었다.
남궁세가 쪽은 난리가 나겠지만, 신교 측은 두 팔을 벌려 환영할 따름일 터.
더욱이 자신의 배필로 맞이한다면 순식간에 탄탄하게 입지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스릉-.
위천강은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주호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그녀에게 각인시켜야 했다.
어차피 무림인은 강자에게 이끌리는바. 당장은 무리더라도 뒷일 기약하며 천천히 공작을 벌인다면, 아예 가능성이 없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절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 거죠?”
“……!”
지척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에 위천강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잠시간 긴 생각에 잠겨있을 찰나, 대련이 시작된 것. 남궁연은 그 즉시 여유를 주지 않고 그의 지척으로 쇄도해왔다.
샤아악-!
위천강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비틀었지만, 그녀의 검이 생각보다 날카로웠던 탓에 앞섬을 살짝 베이고 말았다.
“…어째 검 끝에 감정이 서린 것 같은데, 혹시 예전의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오?”
학관 이전과 그 초기에 집적거리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내질렀던 검을 회수해 다시 기수식을 취하던 남궁연은 서늘한 안광으로 그의 말에 답했다.
“그런 사소한 것을 담아두시다니. 위공자께서는 생각보다 소심하시군요.”
“…그렇다고 보기엔 그 검 끝이 너무 날카롭소만…….”
“아쉽게도 목표로 하는 것 이외에는 바라보지 않는 성격이어서요. 원하신다면 이대로 기권을 선언하셔도 상관없어요.”
“목표라. 과연 그 무뚝뚝한 성격의 교관님이 소저의 마음을 알아차릴….”
“…주 교관님의 이야기가 왜 나오죠? 기권할 생각이 아니라면 비무에 집중하세요.”
위천강은 어깨를 으쓱하며 농을 던지려 했다.
하지만 그 직후 얼굴을 와락 구긴 남궁연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어오는 탓에 말이 끊기고 말았으니.
‘이거 본전도 못 찾았군.’
작게 웃음을 토해낸 그는 몸을 비스듬히 앞으로 기울이며 본격적인 태도를 갖추었다.
파앗-!
둘의 신형이 동시에 모습을 감췄다.
비무를 지켜보던 이들 중 경지가 낮은 이들은 둘의 모습을 놓쳐 헛바람을 토했지만, 뒤이어 들려온 거친 파공성에 연이은 격돌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단하군. 수준이 달라”
“입관 수석인 남궁 소저는 그렇다 치고, 저 사내는…….”
“그 위천강 아닌가. 자칭 풍류 공자로 유명한.”
“빌어먹을. 어찌 모르겠나. 저 번드르르한 얼굴과 매끄러운 혀 놀림에 넘어간 피해자가 몇인데.”
남궁세가의 출신으로 입관 수석을 차지한 남궁연만이 아니라, 위천강 역시 학관 내에서 여러모로 유명한 인사였다.
수려한 외모, 재치 있는 입담, 거기에 범상치 않은 분위기까지.
애초에 외모만으로 이목을 끌 만한 데다, 그것 외에도 부가적인 요소들이 많았으니 항상 여러 화제의 중심이 있었다.
더욱이 같이 다니는 이들의 면면도 화려하지 않았나.
특히 여성과 관련된 소문 쪽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편력을 자랑했기에 뭇 남성들의 질투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설마 남궁 소저도?”
“농담 마시게. 저게 연정을 품은 대상과 마주한 분위기인가?”
“하긴 그렇군.”
서슬 퍼런 기세로 폭풍과도 같이 위천강을 몰아치는 그녀의 모습에 다들 하나같이 같은 감상을 품었다.
이윽고 비무는 절정에 이르렀고, 머지않아 승패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내 패배요. 정말, 소저껜 당하지 못하겠군.”
두 손을 든 위천강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
그 목에 검 끝을 겨누고 있던 남궁연은 잠시간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검을 거두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음엔 반드시 위공자의 진심을 끌어내겠어요.”
“…기대하겠소.”
위천강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자신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을 정도로 이쪽에 근접했다는 소리였다.
이전에는 서로 건널 수 없던 차이가 있던바. 순식간에 격차를 뛰어넘어 지척까지 추격해온 그 재능에 절로 흥미가 돋았으니.
‘허나 신교의 소교주라는 이름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지.’
자신 역시 현재에 만족하며 안주해있을 생각은 추호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
남궁연과 위천강의 비무가 끝났을 무렵, 천후와 당천유의 비무 역시 천후가 압도적인 무위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선우연과 악비산의 비무 역시 막바지에 다다랐으니, 마치 태산이 짓누르는 것 같은 기세로 닥쳐오는 악비산의 창끝에 선우연은 수세에 몰린 와중이었다.
“…큭!”
선우연은 필사적인 모습으로 분전했으나, 끝내는 아쉽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이는 천후, 남궁연, 그리고 악비산까지 모두 셋.
순위를 가려야 했지만, 홀수인 인원 때문에 한 명은 부전승으로 결승에 오르게 되었다.
“뭐, 차라리 이게 나은 결말일 수도 있겠지.”
남궁연이 부전승으로 올라간 지금, 악비산은 제 근육을 긴장시키며 천후를 바라보았다.
천후가 아직 진심을 보이지 않은 것 같이 악비산 역시 이때까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후.”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전 실전의 이해 강의에서 가볍게 손속을 나눌 때도 그 안에 서린 패도적인 기운을 몸소 느낀 적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에서와 같이 뚜렷한 승패를 결정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퉤.”
손바닥에 침을 내뱉고, 단단히 창대를 잡은 그는 대련의 시작을 알리는 교관의 선언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천후가 자신보다 경지가 높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패배할지라도, 깨부숴지더라도, 박살이 나더라도, 갈가리 찢어질지라도.
혹독한 시련일수록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지니.
악비산은 강해질 수만 있다면 가시밭길 위로 스스럼없이 몸을 내던질 수 있었다.
“흡-!”
집약된 근육에서 나온 폭발적인 힘이 창끝에서 터져 나왔다.
어찌나 그 힘이 강한지 비무를 지켜보던 이들은 귀청을 찢는 폭음에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쐐애애액-!
내질러진 창은 곧 점이 되어 대상을 꿰뚫었다.
하지만 천후의 몸은 이미 그곳을 벗어난바. 가볍게 한 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혼신을 다한 찌르기를 피해낸 천후는 담담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
악비산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천후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냐고 물어오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그는 굳게 쥔 창대를 빙그르르 돌리며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디뎠다.
“청송(靑松)은 언제까지고 푸르기에 그 올곧음을 칭송받나니-.”
악가창법의 시작이 되는 구결이 악비산의 입에서 토해져 나왔다.
유구한 전통을 지닌 산동악가의 진신절기.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 청송의 올곧음을 선망하고, 그것을 닮기 위해 단단함을 연마한 선조들의 염원이 담긴 형태였으니.
찌르고, 꿰뚫고, 찢어낸다. 단순한 움직임들이 서로 맞물려 이념을 이루었고, 그것들은 곧 창끝의 움직임으로 올곧은 청송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악가창법이라.”
매서운 기세로 휘몰아치는 악비산의 창끝에 천후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이때까지 경시하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명문 세가, 명문 문파.
오대 세가니, 구파 일방이니 해도 사신문의 무공보다 못하리라.
실제로 이때까지 학관에서 마주한 후기지수 중 자신에 대적할 수 있는 이가 없지 않았는가.
하지만 눈앞에 선 악비산의 모습에 천후는 홍령도를 다잡았다.
그 역시 한 사람의 무인. 악비산의 창에 얼마만큼의 노력과 땀과 염원이 담겨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허나.”
홍령도의 붉은 도신 위로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그를 중심으로 뿜어진 열양지기가 주위의 공기를 달구었고, 이내 시뻘건 화마를 피워 올렸으니.
“청송이 아무리 올곧다 한들, 나무에 불과하다. 그 본질을 버리지 못한다면, 자넨 날 뛰어넘지 못해.”
홍염(紅焰)의 화마가 해일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청송의 이파리를 순식간에 불태웠고, 그 끝에서부터 생기를 좀먹어가기 시작했으니.
“…….”
악비산은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어렴풋이는 느끼고 있었다. 천후의 저 도법은 자신과 상극이라고.
손발이 저릿저릿했다. 푸른 이파리는 누렇게 그을렸고, 올곧게 뻗은 가지는 일그러져 스러질 따름이었다.
‘이것을, 이것을 견뎌낸다면.’
한 걸음 더 올라갈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악비산은 제 몸이 불에 탈 것을 알면서도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뻗은 가지는 쓸데없는 영양분을 낭비할 따름이다.
불에 타기 전에 스스로 잔가지를 정리하고, 오로지 한 점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었다.
천후의 불길은 저 하늘 높이에서 내리쬐는 태양과 같았으니. 몸을 불태우는 불꽃이 아니라, 양분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 햇볕을 뒤덮는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좋구나.”
천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손을 쥔 손이 주작의 불꽃에 익어가고, 전신이 화상에 물들어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 정신은 불굴이요, 육체는 강인했으니, 남은 것은 앞으로 나아갈 계기일 따름이었다.
사신문에도 이러한 무인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악비산과 마주했다.
“보여주지. 자네가 오르길 갈망하는 그 위를.”
치켜든 홍령도 위로 한층 더 깊은 색의 불꽃이 깃들었다.
그것은 주작의 후계자로서 불굴의 정신을 지닌 악가의 무인에게 보내는 경의였으니.
“홍륜(紅輪)-.”
주작도법
비상(飛上)의 장, 홍륜(紅輪)
시뻘건 불의 고리가 그 위에 휘몰아친다. 주위의 모든 것을 태울 듯 일렁거리는 그 불꽃은 주작이라는 이름에 부족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건.”
그 밑에서 비무를 지켜보던 위천강은 움켜쥔 손에 식은땀이 가득 흘러나왔다.
더없이 고절한 신공의 도법이지 않은가.
자신의 천마신공과 격돌한다고 해도 한치의 앞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패도적인 무공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악비산은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을 내질렀다.
육체는 기력이 다했고, 정신은 정상적인 사고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간 것은, 그의 본능에 각인되어 있던 투쟁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창과 도가 격돌했을 때, 비무대 위로 커다란 폭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지켜보던 교관은 아차 하며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황급히 상황을 수습하려 발을 뗐으나, 곧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먼지를 걷어내었으니.
찔러져 오는 창은 왼손으로 잡아내고, 시뻘건 불꽃이 서린 도는 검집을 들어서 막아내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너무 과열되지 말라고.”
작게 한숨을 내쉰 주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의 투기에 전염된 탓에.”
평정을 잃은 것은 자신의 실책이었다.
그렇기에 천후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도를 거둘 찰나, 악비산의 창 역시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읏차.”
기력이 다해 정신을 잃은 악비산의 커다란 몸이 앞으로 고꾸라져 내렸다.
그것을 한쪽 팔로 가볍게 받아낸 주호는 천후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도 부축이 필요한가?”
“…사양하겠습니다.”
천후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 농에 대답했을 때.
“승자, 천후!”
뒤늦은 승리 선언만이 비무대 위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