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자네는 누가 선두를 거머쥘 것 같은가.”
본격적인 선발 대회가 시작됐을 때, 비무장은 그것을 구경하러 온 이들로 인산인해가 되었다.
대회를 관리하고 중재하는 교관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연차의 관생들까지 흥미진진한 눈으로 비무장 위를 바라보았으니.
“글쎄요. 누가 어느 정도의 수준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갈리겠지요.”
“호오, 자네는 자네 밑에 있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이 우승할 거라 보는군.”
그 의미심장한 말투에 담우양은 은근한 표정으로 주호의 옆구리를 찔렀으니.
“누가 제일 강한가. 남궁연? 아니면 소신룡?”
“자세한 건 저도 직접 닥쳐봐야 알 것 같습니다.”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아꼈다. 그러자 담우양은 아쉽다는 듯 제 품속에서 은전 몇 개를 꺼내 매만지며 슬쩍 말을 흘렸다.
“에잉, 푼돈이나 조금 걸어보려 했더만.”
선발 대회가 일어남에 따라 물밑에서 누가 우승할 것인지에 대한 도박장이 성행하고 있었다.
물론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열리는 관례 같은 것으로 학관에서도 어느 정도 눈을 감아주고 있었다.
“나도 자네 밑의 후기지수가 우승하리라 예상한다네. 다만, 너무 어려워서 말이야.”
“저는 이미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해주지 않기인가?”
담우양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주호는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런 것은 홀로 맞추어야 재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뭐, 맞춘 사람이 술 사기네!”
담우양은 툴툴거리며 자리를 떠나갔다.
잠시간 실소를 토해내던 주호의 시선이 이내 비무장 위로 향했다.
“전부 잘하고 있구나.”
그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일곱 명의 후기지수 모두 선발 대회를 치르고 있는 와중으로, 제각기 월등한 실력으로 하나 같이 상대를 찍어 누르는 중이었다.
“후우…….”
그 가운데 있던 선우연은 깊게 호흡을 내쉬며 검을 쥔 손을 매만졌다.
연이은 비무였지만, 아직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같은 기수의 관생이라 할지라도 그 출신과 재능, 그리고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실력이 천차만별이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상대측으로 나왔던 관생은 그의 검을 단 열 합도 버텨내지 못했다.
주호 밑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와 비교하자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시시껄렁한 싸움.
하지만 선우연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다른 비무장 위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느 정도 추려졌는가.”
몇 번의 비무 와중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주호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일곱 명의 후기지수였다.
단 한 번의 실수도, 단 한 번의 위기도 없이 모두 당연한 것처럼 손쉽게 승리를 따냈다.
하지만 이제 인원이 좁혀지면 필연적으로 그사이에 겹치는 이들이 발생할 터.
꽈아악.
선우연은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냉정하게 본다면 그 한명 한명이 자신의 실력으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벅찬 상대였다.
“허나.”
허나 손쉽게 패배를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쓰러지더라도, 넘어지더라도, 추하게 바닥을 구르더라도.
끈질기게 그 바짓단을 붙들고 놓지 않으리라, 그런 결연한 각오를 다졌다.
***
주호의 휘하 후기지수 중 제일 처음 마주하게 된 것은 남은 인원이 채 스물이 되지 않았을 때 서로의 상대를 꺾고 올라온 선우연과 철대환이었다.
“…….”
선우연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는 처음 제자를 선발할 당시에 주호가 그 수많은 후기지수 중 철대환을 뽑았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굵은 눈썹, 각진 얼굴. 드센 성격을 지니고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누구보다 말이 없고 얌전한 성향이었으니.
그렇다고 무언가 특별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근래 들어 성격이 조금 밝아졌고, 위천강과의 비무에서 제법 날랜 몸놀림을 보여준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요소가 없지 않은가.
“잘 부탁하지.”
하지만 이 반년간 쌓인 정이 있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철대환 역시 마찬가지로 가볍게 그 인사를 받았지만, 이내 진지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선형.”
“무엇인가?”
“선형에겐 조금 갑작스러운 이야기겠지만, 나에게 목표가 생겼소. 그러니 이제부터는 좀 진심으로 할 생각이라오.”
“…그런가. 그 말 그대로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축하하네. 뚜렷한 목표는 그 무엇보다 더 원동력이 되는 법이니.”
선우연에겐 마다할 이유가 없는 이야기였기에 축하를 보냈다.
“그리고.”
이때까지, 자신 역시 항상 진심이었다.
그 뒷말을 삼키며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시원한 소리와 함께 뽑혀 나온 검이 허공에 어지러이 궤적을 그리며 이십사수 매화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철대환 역시 그것에 대응해 자세를 잡았고, 곧 울려 퍼질 비무의 시작을 기다렸다.
‘그의 주력은 권각술. 권법은 위력적이나 거리만 좁혀지지 않으면 문제 될 것은 없다. 조심해야 할 것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섞어오는 각법.’
이미 그들끼린 몇 번이나 손을 섞어보았기에 서로 간의 무공은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이미 대련 이전 각자에 대한 대응 방법을 구상해 두었던 차. 다행히 그 상대는 같은 후기지수 중 그나마 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철대환이었다.
그렇기에 대련 시작과 동시에 자신감 서린 한 발자국을 내디뎠으나.
“……!”
귓가를 스치는 거센 파공성에 선우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철대환의 신형이 순식간에 그의 지척으로 접근해온 것이었다.
쉭-!
마치 야수가 발톱을 휘두르는 것처럼 철대환은 손가락을 날카롭게 세운 손을 들어 허공을 찢어발겼다.
“…헉!”
그 흉흉한 기세에 선우연은 기겁하며 몸을 비틀었다.
한계까지 허리를 뉘인 끝에 가까스로 그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에 성공했지만, 검에 베인 것처럼 머리카락의 끝 부분이 잘려나가 허공에 나풀거렸으니.
“흡-!”
선우연 역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허리를 비튼 반동으로 몸을 떨치며 자신의 지척에 이른 철대환에게 벼락같이 검을 내질렀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고절한 화산의 검과 어울리지 않은 초식도 뭣도 없는 투박한 일격이라 할 터.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반년간 주호 밑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체득한 영역에서 갈라져 나온 깨달음의 갈래였다.
타다닥-.
철대환 역시 간단하게 당해주지 않았다.
이쪽으로 닥쳐왔을 때와 같이 그 발이 기묘한 움직임을 밟으며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어딜!”
선우연은 순순히 그를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검을 내지른 기세 그대로 물러나는 철대환에게 쇄도해 승기를 굳건히 다지려 했다.
“…이쪽은 어때 보이지?”
압도적인 무위로 상대에게서 승리를 따낸 악비산이 이미 옛적에 제 할 일을 끝낸 뒤 선우연과 철대환의 비무를 관전하고 있던 위천강에게 물었다.
“글쎄, 아직은 용호상박이라 할 수 있군.”
위천강은 심드렁한 기분을 숨기며 적당한 말로 대응했다.
둘 다 제법인 수준이긴 하지만, 신교의 소교주인 자신의 흥미를 돋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저 정도는 돼야지.’
그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향했다.
“…….”
등 뒤로 커다란 도를 메고 있는 천후 역시 이미 한참 전에 승리를 거머쥔 채 둘의 비무를 관전하고 있었다.
이제 같은 시각에 시작한 비무 중 끝나지 않은 것은 이곳뿐이었으니.
화산, 그리고 소신룡이란 이름은 후기지수 사이에서 유명한바. 필연적으로 그 주위에 있던 이들의 이목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과연, 소신룡이로군. 능히 대회의 우승을 차지할만해.”
“상대도 만만치 않은 것 같군. 누군지는 잘 모르겠는데, 저 소신룡과 나름대로 대등하게 싸우다니, 훌륭한 수준이 아닌가.”
제각기 선우연과 철대환을 평가하며 갑론을박을 펼친다. 그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위천강은 비루먹은 이들이 감히 제 윗경지의 무인을 판단하는 것이 기가 막히고 한심스러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간 멀찍이서 제자들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주호는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다른 이들은 말하지 않아도 한자리에 모여 있었으니, 그는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얼추 끝났나.”
“어느 쪽이 이기든 일단 최소 칠순 위까지는 저희가 선점했습니다. 이 중에 누가 올라가느냐가 관건이겠군요.”
잘하지 않았냐는 당천유의 눈빛에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예상은 했다만, 다들 열심히 해주었구나. 수련이 부족해 보이는 이가 있었더라면 내 특별히 개인 훈련을 시켜주려 했었거늘.”
“하하…….”
그 섬뜩한 말에 다들 메마른 웃음만 토해내었다.
주호와 후지기수들이 대화를 나누는 때 선우연과 철대환의 비무도 곧 막바지에 다다랐다.
철대환이 승기를 잡아 맹공을 퍼붓는가 싶었지만, 선우연은 가까스로 그의 흐름을 읽어냈고 이전에 그가 위천강과의 대련에서 했던 것처럼 공격의 단초와 맥락을 전부 끊어내어 역공을 가했다.
주위에 너무 쟁쟁한 이들이 많아 가려져 있었지만, 선우연 역시 화산에서 소신룡이라 불릴 정도의 기재.
결국엔 근소한 우위를 점하며 승리를 취했다.
“…승자, 선우연!”
“와아아아아아아-!”
그 화려한 공방이 끝나자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모두가 환호하며 감탄을 보냈다.
“좋은 싸움이었다.”
“이쪽도 많이 배웠을 따름이오.”
서로를 존중하는 인사를 끝으로 비무대를 내려간 그들은 제 동료들이 있는 자리로 합류했다.
“수고했네.”
“자네들도 다들 수고했군.”
제 각자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 와중 당천유는 은근한 표정으로 주호를 향했다.
“교관님. 저희는 뭔가 포상이 없습니까?”
“포상?”
“예. 다른 교관님들은 자기 제자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다른 특별한 축하를 해준다고 합니다.”
“학관 자체에서 순위에 따라 포상이 내려질 텐데, 그걸로 부족한가?”
“부족해요.”
주호의 말에 대답한 것은 그간 조용히 있던 남궁연이었다.
그녀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눈동자로 시선을 보냈으니. 주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일등을 한 이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무언가를 해주마.”
“…일등만, 말인가요.”
“너무 짠 것 아닙니까. 이 전부가 쟁쟁한 이들을 물리치고 올라온 상위권인데.”
위천강이 살짝 불만이라는 듯 툴툴거린다. 하지만 주호가 서늘한 눈빛을 보내자, 이내 움찔하며 말을 바꿨다.
“하긴 일등에게만 줘야 좀 더 향상심이 생기겠죠.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맞아요.”
남궁연 역시 그 말에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곧바로 다음 비무를 준비하러 가보겠다며 자리를 떴으니.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다음 상대가 불쌍하군.”
“그러니까 말이네.”
그 뒷모습에서 풍기는 농밀한 전의에 위천강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꺼림칙하다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쿵.
“뭐, 누가 되었든 내 상대가 되면 봐주지 않을 테니 각오들 하라고.”
바닥에 창끝을 내리찍은 악비산만이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제 친우들에게 선포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