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주호는 천우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자신과의 관계를 부정하려 하는 것일까.
그녀 스스로 말하였고, 또 천후가 알려주기로 이전에 교제한 남성은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남녀 관계의 외적으로 무언가 사연을 품고 있다는 것일까.
애써 한여름 밤의 관계라 칭하며 자신을 밀어내는 그녀의 두 눈은 애달프기 그지없어 보였으니. 주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술잔을 쥔 천우희의 손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여름이, 계속되는 곳도 있지.”
남만은 사시사철 뜨거운 여름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울창한 수풀이 가득했고, 삼림이 발달한 지형이 되었으니.
“제법 달콤한 말을 다 하네. 이주라도 할 생각이야?”
“필요하다면.”
주호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서로 간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먼저 눈을 돌린 것은 천우희의 쪽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려는 듯 두 눈을 감았고, 입술을 깨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병이 있어.”
“병?”
그 이후에 나온 말은 주호로선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니.
“달포마다 하루, 손끝에서부터 감각이 사라져가. 목까지 올라오면 그걸로 끝이고. 어릴 적부터 쭉 앓아온 병이고, 고칠 방법은 없어. 애초에 병명도 모르는걸. 지금도 그저 주작신공의 힘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거고.”
“허… 그런…….”
“일 년 사이에 팔꿈치에서 어깨까지 그 증상이 올라왔어.”
즉,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천우희는 자신의 손을 감싸 쥔 주호의 손가락을 조심스레 떼어 놓으며,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내가, 사랑놀음 같은 걸 할 수 있겠어?”
“…….”
주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조심스레 밀어내진 손을 뻗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눈가를…….
“푸흐흡…….”
…닦아주려 할 찰나, 그 어깨가 떨리며 토해지는 웃음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푸하하하하-!”
천우희는 폭소를 토해냈다.
그러곤 눈물을 닦아내며 입가에 진한 웃음을 띤 채 주호를 바라보았다.
“달포에 한 번 감각이 없어져? 그런 병이 어딨어. 당신 어릴 적에 영웅담을 좋아했다곤 하지만, 너무 상상력이 풍부한 거 아니야?”
“…너무 웃는 것 아닌가.”
놀림 받았다는 것에 민망해진 주호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난 천성이 자유로운 영혼이라서 말이야. 어디에 얽매이는 건 딱 질색이야. 사신문의 일도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소속되어 있는 것이지, 아니었더라면 한평생을 싸돌아다녔을걸? 지금도 굳이 외부 임무를 자처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고.”
천우희는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런가.”
한숨을 내쉰 주호는 빈 술잔을 채우고 그것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녀의 말이 어디서부터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상태창에 그런 기능이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알 수 있는 정보엔 한계가 있었으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참.”
천우희는 웃음을 거두고 주섬주섬 품을 뒤졌다. 그러곤 한 장의 서찰을 꺼내 주호에게 내밀었다.
“네 동생이 보낸 거야.”
“향이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주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서찰을 받아들었다.
정갈한 필체로 쓰인 그 내용은 분명 자신의 동생인 주예향이 쓴 서신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깐 들렀거든. 무공을 얼마나 열심히 수련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건 고맙군. 신경을 써주다니.”
“뭘. 겸사겸사 당신 고향 쪽의 동향도 확인해봤어. 혈사문이라고 했나? 당신이 아주 조각조각 박살을 내놨던 곳. 그쪽은 아예 사파 계열의 문파가 괴멸했더라.”
“작정하고 손을 썼지. 아마 향후 몇 년간은 설치지 못하겠지.”
혈사문의 세력이 강성했던 만큼 인근의 시정잡배들은 모두 그날 주호의 손에 불구가 되었다.
외부에서 다른 세력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새로운 사도 문파를 세우긴 어려울 것이었다.
“문주의 명으로 그쪽에 사신문의 지부도 하나 세웠어. 무슨 일이 있으면 그쪽에서 나서줄 테니까, 설사 사흉수가 손을 써오더라도 대비할 수 있겠지.”
“그런가. 나중에 감사를 표해야겠군.”
그렇지 않아도 고향 쪽이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사흉수 쪽으로 자신이 청룡이라는 정보가 들어갔을 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니 만약에라도 본가인 주가장에 수작을 부려온다면 멀리 하남에 있는 자신으로는 속수무책일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사신문에 부탁한 것이었지만, 설마 지부까지 설치해줄 줄은 몰랐기에 고마움이 컸다.
“뭘. 네 덕분에 남궁세가주나 무림맹주와 연을 트게 되었으니 이쪽도 득을 보았지.”
“그래도, 나로선 고마운 이야기다.”
둘은 서로 다시 술잔을 나눴다.
나름대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던 차라, 술기운이 가신 듯했기에 다시금 달릴 요량이었다.
어슴푸레하게 붉은빛을 밝히던 석양은 어느덧 자취를 감췄다.
이제는 컴컴한 어둠만이 하늘을 뒤덮었으니, 잠시간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천우희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학관 일이 바쁜가 보네. 주말에도 출근이라니.”
“하반기에는 천무학관 쪽과 교류회를 비롯해 여러 행사가 많아서 그렇다. 그것만 처리하면 어느 정도 숨통은 트이겠지.”
“흐음, 교관 일이 재밌나봐? 나는 남을 가르치는 일엔 영 소질이 없어서.”
“그런 것 치고 천후 그 아이의 성취는 제법이지 않은가. 후기지수 사이에서도 손꼽을 수 있을 정도니.”
“뭐, 그건 천후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어때. 후기지수 사이에서 잘 지내고 있어?”
“본인에게 듣지는 않는 건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잘 안해주거든. …내가 말하기엔 조금 그렇지만, 숫기가 좀 없잖아. 사신문 내부에서도 같은 또래랑 잘 어울리지 않았고, 맨날 수련장에 틀어박혀서 수련만 했으니까. 뭐, 주작의 계승자니 엄하게 가르친 것도 있었지만.”
“그런가.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제 동기들과도 제법 가까워진 것 같더군.”
“청화루 쪽에 있었던 그 녀석들? 괜히 나쁜 물이 들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근본적으로 나쁜 아이들은 아니니 괜찮다.”
주호는 자신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후기지수들을 떠올렸다.
처음엔 투덕거리며 치고받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서로 제법 죽이 잘 맞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천후의 위치는 살짝 붕 뜬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그 사이에서 눈에 띄는 실력을 지니고 있기에 동경하며 쫓아가는 그러한 분위기였으니.
“아, 그리고 백호 그분과 무슨 약조를 나눈 게 있어?”
“백호? 아, 그렇군.”
일전 사신문에서 나눴던 후계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주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우희는 의문 어린 시선으로 물었다.
“무슨 이야긴데?”
“백호의 계승자를 찾는다는 이야기였다. 사신문 내에서는 마땅한 인재를 찾기 힘들다고 하시기에 내가 후보를 추천했지.”
“그래서 학관의 아이를?”
“그래. 악비산이라고, 내 밑에 있는 녀석이다.”
“악비산, 악가의 출신인가. 조금 까다롭겠네. 뭐, 그건 백호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언제쯤 오신다고 하셨지?”
“못해도 두 달 뒤의 이야기야. 아직 상처가 덜 회복되셨거든. 당신은 이제 멀쩡해 보이네?”
“보다시피.”
주호는 제 팔을 들어 올리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천우희가 자리를 비웠던 동안 모든 상처를 말끔히 회복했다.
이제는 무리 없이 움직일 정도가 되었다.
“그래? 다행이네.”
천우희는 그런 주호의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을 따름이었다.
***
주말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학관은 다시 관생들로 북적였고, 배움의 열기로 뜨거웠다.
특히 그 가운데서 가장 치열했던 건 주호를 비롯한 그 후기지수들이 있는 연무장이었으니.
“흡-!”
부상을 완전히 회복한 주호는 오랜만에 후기지수 전부와 마주했다.
“그러면 중간 평가도 할 겸 제대로 해보지. 다 같이 한 번에 오도록.”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주호의 말에 악비산이 씩 웃으며 제 창을 휘둘렀다.
이 반년 동안 그들 역시 크게 진보했다.
아무리 주호라 할지라도 방심하다간 큰코다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는 씩 웃으며 손끝을 까딱였을 뿐이었다.
“손속은 둘 테니, 걱정하지 말고.”
곧 치열한 대련이 이루어졌다.
말이 대련이지 생사결이나 다름없는 분위기였으며, 이각 후에는 주호를 제외한 모두가 연무장 바닥에 뻗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거 왠지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선우연이 살짝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누군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을 본 주호는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돈하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성장하듯, 나 역시 앞으로 나아갔다. 가르치는 쪽이 도태돼서는 안 될 일이지 않으냐.”
“…그래서 저희는 어떤가요?”
이마를 타고 흐르는 구슬땀을 닦아낸 남궁연이 기대감을 담아 물었다.
다른 이들 역시 같은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고,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뭐, 그럭저럭 합격이다.”
“그럭저럭이 뭡니까. 그럭저럭이. 칭찬해주시려면 더 해주십시오. 솔직히 일 년 차 중에서는 저희가 제일 뛰어나지 않습니까.”
당천유가 이죽거리며 말하자 선우연은 물론이고 악비산 역시 고개를 끄덕여왔다.
“뭐, 자네가 이해하게. 내 이 반년간 지켜본 바로 교관님은 쑥스러움을 많이 탄다네. 좋은 것을 제대로 좋다고 표현하지 못하고, 칭찬도 인색하니 말이야.”
위천강이 뒤이어 말을 보탰다.
남궁연 역시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는 듯 고개를 돌린 채 작게 웃음을 토해냈고, 벽에 반쯤 걸쳐 기대 있던 천후 역시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런 것 같다는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제 여인에게는 따뜻하셨소. 주말 늦은 새벽에 잠시 외출해있던 차에 한 여성분과 주점에서 늦게까지 화기애애하며 술잔을 나누시더군.”
그 사이로 철대환이 말을 툭 내뱉었다.
“…무슨.”
그때까지 주호는 후기지수들의 평가에 쓴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철대환의 말에는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는데……. 아, 학기 초에 괴한들에게 습격당해 누워 있던 교관님을 간호하던 그분…….”
“철형. 그만하게.”
선우연이 슬쩍 눈치를 보며 철대환의 입을 막았다.
주호의 눈치를 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조금 전까지 옅은 미소를 띠고 있던 남궁연의 가리키고 있었다.
“왜요? 계속 말씀하셔도 되는데.”
여전히 웃고 있지만, 웃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장내의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모두가 침묵으로 서로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남궁연이 주호에게 마음이 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
“…….”
주호 역시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들 대충 눈치껏 알아차린 모습이었다.
관생들하곤 강의 외적으로 엮일 생각은 없었건만, 벌써 이렇게 되었으니 다른 교관들에게 할 말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아.”
오직 철대환만이 그제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조용히 스스로 입을 막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