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학관의 하반기가 시작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이번 학기에는 여러 행사가 기다리고 있기에 교관들은 자신이 맡은 강의의 준비를 하며 행사의 준비도 병행해야 했다.
당연히 가장 많은 업무를 맡은 것은 제일 낮은 직급인 사급 교관들이었으니…….
“…서류가 끝나질 않는군.”
“나는 처리하는 것보다 들어오는 게 더 많다네.”
하반기 일정이 시작된 뒤 집무실엔 쌓인 업무로 끙끙거리는 신음이 가득했다.
물론 같은 사급 교관인 주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들 보다 고강한 무공을 지녔다 할지라도 처리해야 할 업무는 같았다.
“…자네가 없었으면 어찌 되었을는지.”
다만, 주호의 업무 속도는 남달랐다.
적어도 남들의 두세 배는 더 빨랐고, 실수 또한 거의 없었다.
“각자 적성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가문이 상계 쪽인지라 어릴 적부터 이런 서류들에 익숙했습니다.”
“참. 그랬지.”
고개를 끄덕이는 담우양의 모습에 주호는 남몰래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은 그 서류를 보는 것이 싫어 출가하지 않았는가.
결과적으로 무림인이 되었지만, 다시금 이것들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묘한 감정이 들었다.
“자, 다들 여기까지 하고 허기나 채우러 가세. 슬슬 점심이로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누군가의 말에 하나둘씩 동조했다.
담우양과 주호 역시 하던 업무를 잠시 내려놓았고, 이내 다른 교관들과 같이 식당으로 향했다.
“……?”
그러던 중 주호는 발걸음을 멈추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옆에 있던 담우양이 왜 그러냐는 시선을 보내자 그는 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놓고 온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알겠네. 자리를 잡고 있지.”
곧 그들이 모두 떠나갔을 때, 주호는 천천히 뒤쪽으로 돌아갔다.
집무실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을 지나 그 밑으로 향하니 익숙한 얼굴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 교관님.”
“한번 해보고 싶었다네. 기척으로만 누군가를 불러내는 것을.”
남사일은 씩 웃으며 주호를 바라보았다.
“출장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말도 말게. 설마 이 나이를 먹고 현장을 뛸 줄은 몰랐네.”
“남 교관님의 나이면 아직 한창때가 아닙니까.”
“예끼, 이 사람아. 젊은 사람이 늙은이를 놀리는 것 아니네.”
청화루의 일 직후 무림맹은 사라진 마교 세력의 추적대를 결성했다.
보통은 자체적으로 그 인원을 구성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번은 무림맹이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실책이 있었다.
그렇기에 엮이게 된 정천학관에 요청이 들어왔고, 감사 역할로 남사일이 추적대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뭐, 그들로서는 적당한 인선이었겠지. 나도 소싯적엔 마교와 자주 충돌했으니.”
“익히 들었습니다. 매화선풍검의 위명은 그곳에서부터 시작했었지요.”
주호 역시 어릴 적 자주 들었을 정도로 그의 이야기는 유명했으니. 남사일은 짐짓 쑥스럽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으나, 이내 표정을 달리했다.
“다만 조금 이상하더군. 맹의 눈을 속이고 하남 한복판에 숨어들 정도니 제법 실력이 있는 놈들이었겠지만, 이번 흔적은 조금 이상했어. 처음부터 마교라 결론이 나 있지 않다면 다른 세력이라 의심했을 걸세.”
“…그렇습니까.”
그 말에 주호는 가늘게 떴다.
과연 경험이 많은 고수의 안목은 속일 수 없었다.
사흉수와 마교는 아예 궤를 달리하는 존재들. 그러니 그 차이점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남사일의 눈은 생각보다 더 날카로웠다.
“참, 맹주께서 안부 전해달라 하셨네.”
“…얼굴을 본 것이 얼마 전의 이야기입니다.”
“뭐, 이해하게나. 나이가 들면 하루하루가 남들보다 더 빨라지는 법이거든. 하기야 말년에 얻은 사제라니 더 애착이 가시는 것이겠지.”
“…얘기하셨군요.”
주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사실이 아닌 사실이 사실인 것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든든한 뒷배를 얻게 된 것은 맞지만, 자신만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살짝 저어될 따름이었다.
‘뭐, 단 노인 아니, 맹주님 쪽에서도 날 향한 사죄라 했으니.’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생각한 주호였다.
***
남사일이 무림맹의 출장에서 돌아온 뒤로 달포가 더 흘렀다.
슬슬 초여름을 지나 더위의 정도가 완연해지는 날이었다.
길었던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평소보다 조금 더 늦은 저녁의 시간대. 거리는 주말을 앞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직 시간은 좀 이른가.”
주호는 평소 입던 교관의 정복이 아닌, 가벼운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잠시간 저물어가던 태양을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거리를 거닐었다.
약속한 시각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는바. 그간 업무에 바빴기에 오랜만의 휴식을 즐길 참이었다.
자주 가던 가게에서 새로 들어온 물건을 구경하고, 원래 다니던 길보다 조금 더 멀리 돌아보았다.
발걸음이 멈춰 선 곳은 한 포목점의 앞이었다.
그 앞에 걸려 있던 질 좋은 주홍빛 비단이 눈에 들어왔다.
동생인 향이에게 어울릴 것 같기에 눈여겨보던 찰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슬쩍 등 뒤에 다가온 이에게 말을 건넸다.
“일은 잘 끝냈나.”
“…재미없는 남자네. 깜짝 놀라게 하려 했는데.”
“그런 것 치고는 발걸음 소리가 너무 크더군. 조금 더 정진해야겠어.”
“지금 나보고 뚱뚱하다고 돌려 말하는 거야?”
“뚱뚱하다니.”
주호는 고개를 돌리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으로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남의 외모에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겐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왼쪽 뺨을 가로지르는 옅은 흉터 정도일까.
하지만 그것마저도 천우희의 털털한 분위기와 맞물려 묘한 매력을 주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적어도 반 시진 정도는 더 걸리리라 생각했는데.”
“이때까지 고생했으니 조금 정도 일찍 와도 괜찮잖아. 정말로 힘들었다고.”
천우희는 어서 가자는 뜻으로 주호의 어깨를 밀며 재촉했다.
그는 잠시간 안타까운 눈으로 주홍빛 비단을 바라보았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었다.
아직 향이의 생일까지는 얼마간의 여유가 있는바. 그렇기에 지금은 고생한 천우희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둘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이젠 하나의 상징이 된 주점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내부는 텅 비어 있었지만, 주방 쪽에는 음식과 술병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천우희가 자리에 털썩 앉아, 주호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주방에 들어가 음식과 술병을 가져왔다.
“오늘은 끝까지 달릴 거니까 각오해.”
“내 쪽도 오랜만의 휴일이다. 마음껏 어울려주지.”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천우희는 씩 웃으며 그에게 술잔을 건넸다.
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술이 채워지고 둘은 곧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잔을 비웠다.
“…하. 이제 좀 살아 있는 것 같네.”
그녀는 더없이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안주를 입에 넣었다.
마찬가지로 비워낸 술잔을 내려놓던 주호는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해보니 내일 점심부터는 출근해야 하는군.”
“정말로? 고생이 많네. 나는 당분간 휴식인데.”
“갔던 일은 잘되었나. 천후에게 듣기론 소기의 성과가 있다던데.”
“말 그대로 소기의 성과야. 하다못해 당신이 상처를 입힌 그 고수라도 잡고 싶었는데, 어찌 날래던지.”
천우희는 분하다는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녀는 청화루의 일 이후로 쭉 사흉수의 흔적을 쫓았다.
무림맹 역시 그 조사를 벌인 것이 맞지만, 애초에 사흉수라는 조직을 특정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그들에게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추적하면서 하남 안에 숨겨진 지부 몇 곳을 박살냈어. 꽤 오랫동안 이쪽의 이목을 숨긴 채 활동했나 보더라고. 복귀가 늦어진 것은 뒷정리의 일도 있어서야. 뭐, 지부라고 해봤자 끄나풀에 불과하지만.”
정작 알짜배기는 전부 놓쳐버렸노라며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이 많았군.”
“그래, 정말 고생이 많았다니까. 며칠간 씻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일이 얼마나 고역인 줄 알아?”
“모르지는 않는다.”
주호 역시 강호를 돌아다닐 적 빈번하게 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천우희는 눈을 흘기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정말로, 말 한마디를 지지 않는다니까.”
“승부욕이 강한 성격인지라.”
술잔을 비운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잠시간 서로 의미 없는 잡담이 오갔다.
보지 못했던 날이 오래였으니 그간 쌓인 일을 이야기하기에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나저나, 맹주 쪽에 우리 이야기를 터놓았다고?”
“그래. 문주가 부탁한 일이니.”
“이러면 남궁세가주와 무림맹주 둘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거네.”
“둘 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다.”
사흉수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지금 무림에 가장 큰 세력을 이끄는 두 명의 수장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다행이네. 그렇지 않아도 사도맹이랑 마교 쪽에서 조금 이상한 이야기가 들렸거든.”
“이상한 이야기?”
“그래. 내부 파벌 싸움이 심하나 봐. 그중 잡음이 생기는 부류에는…….”
“사흉수의 입김이 뻗쳐 있다, 는 것이군.”
“어디까지나 심증이지만.”
“…그런가.”
주호는 새삼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무림맹 말단 무사였던 자신이 이런 뒷면의 일과 직접 적으로 관계되리라는 것은 그저 상상으로만 있었던 일이기에.
“음?”
주호는 문득 천우희가 주점의 문가를 계속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밖을 구경하나 싶었지만, 그 시선이 자연스럽지 않다. 그렇기에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누군가 오기로 했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천우희는 평소 행실과 달리 머뭇거리며 말을 아꼈다.
그 어울리지 않는 태도에 주호가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변명하듯 손을 내둘렀다.
“난 또 그 아이가 따라올 줄 알았지. 저번에도 그렇게 당신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으니.”
“…남궁연?”
처음엔 천후를 말하는 줄 알았지만, 남궁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내가 그리 생각이 없는 남자로 보이는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주호가 길게 한숨을 내뱉자, 천우희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그렇지 않아도 학관을 나오기 전 한차례 그녀에게 붙잡혔던 차였다.
직접적으론 말해오지 않아도 분위기상으로 동행하고 싶은 티를 크게 내었다. 하지만 천우희와의 만남은 술자리 이외에도 사흉수 관련 정보를 나눈다는 목적이 있었다.
남궁연이 이쪽의 협력자라곤 하지만, 이런 자리까지 동석시킬 정도는 아니었기에 좋은 말로 거절했을 따름이었다.
“…안 된다고 하니 노골적으로 실망하더군.”
“인기 많네.”
“근래 너무 저돌적으로 다가오는지라 곤란할 따름이다.”
“왜, 귀엽잖아. 그 외모에 무공도 제법이고, 집안도 좋고. 남궁세가에 갔을 때 가주랑도 이야기가 잘 되었다며.”
“당신은 상관없나?”
“…갑자기 내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야?”
그 물음에 천우희는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전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주호의 뺨을 쿡 찔렀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우리는 한여름 밤의 관계라고. 난 질척이는 남자는 딱 질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