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81화 (81/300)

#81화

선우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완패(完敗)였다.

이날만큼 화산의 소신룡이란 이름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심지어 주호에게 망신을 당했을 때도 수치보단 분노가 앞서지 않았던가.

“…가르침에 감사하오.”

“저도 많이 배웠을 따름입니다.”

선우연의 포권에 남궁연 역시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받는다. 그 가운데 옅은 미소를 띠고 있던 주호가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부족한 점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을 더 곱씹고 보완하도록. 그리하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테니.”

남궁연과 선우연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에 나선 것은 악비산과 천후였다.

“한 번쯤 자네와 대련해보고 싶었지.”

“높이 봐주어서 감사할 따름이군.”

악비산은 살짝 들떴다.

그렇지 않아도 이 자리에 있는 후기지수 중 가장 강하다 생각되는 천후와 맞서 싸워보고 싶었다.

그러던 찰나 이런 좋은 기회가 다가왔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조건은 같다. 내공은 서푼으로 제한. 과정이 격해지면 내가 개입한다.”

“알겠습니다.”

악비산은 힘차게 대답하며 제 창을 붕붕 돌려보였다.

말은 알겠다고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 호승심에 못 말리겠다며 쓴웃음을 지은 주호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

이전과 다른 긴장감이 둘 사이에 감돌았다.

“흡.”

창을 쥔 악비산의 손등 위로 시퍼런 힘줄이 돋아났다. 그것을 본 천후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호승심이 강한 친구로군.’

스르륵-.

천후 역시 홍령도를 감싸고 있던 천을 풀어헤쳤다.

곧 붉은 도신이 세상에 드러났고, 그 위로 발해지는 열양지기에 주위의 온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타닷-.

둘은 동시에 땅을 박찼다.

선공은 당연히 악비산의 쪽이었다.

창이란 병기가 주는 거리의 우위를 지닌 그는 제 손에 쥔 장창을 길게 내지르며 마치 천후의 실력을 탐색하듯 그 중심을 노렸다.

‘어디 한 번 보여보아라.’

주호 밑에서 가르침을 사사 받는 후기지수들 역시 무인이었다.

그러니 서로 간의 무위로 묘한 알력이 있었고, 드러나지 않게 눈치를 보았다.

악비산은 그 중 천후를 제일로 꼽았다.

그 뒤를 자신과 선우연, 그리고 남궁연과 당천유를 그다음으로, 위천강과 철대환은 말미에 자리했다.

하지만 조금 전의 비무로 그 순서에 상당한 변동이 생겼다.

천후가 선두인 것은 변함이 없다.

다만, 그 밑으로 자신과 남궁연의 동수로 바뀌게 되었다.

‘뭐, 나머지의 전력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객관성이 많이 떨어지지만.’

특히 위천강과 철대환은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아무리 숨겨도 낭중지추란 말이 있지 않은가. 간혹 주호와의 대련 중 궁지에 몰리면 튀어나오는 절묘한 수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의 수준이었으니.

쉬익-.

천후는 가볍게 한 발자국 내디딘 것으로 그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역시란 얼굴로 창을 거둔 악비산은 그것을 허공에 붕붕 돌리는 것으로 몸을 예열했다.

‘전심(全心)을 다한다.’

잡념을 모두 떨쳐냈다.

눈앞의 상대는 분명 자신보다 강했다. 그러니 싸운다는 일념 이외에는 모든 것이 필요 없었다.

오로지 천후에게 그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자 학기 초에 주호가 자신들에게 했던 이야기가 귓가로 스쳐 지나갔다.

「끊임없이 사고해라.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삼아 무엇을 할지 생각해라.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면 생각과 움직임 사이에 간극이 줄어들 테니. 세간에선 그것을 절정이라 칭한다.」

일류를 뛰어넘어 한 사람의 무인으로 완성이 되는 경지, 그것을 절정이라 했다.

악비산의 목표는 학관을 나가기 전까지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성장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바위에 스스로 몸을 던져 상처 입히고, 자신을 가두고 있는 껍질을 부숴야 했다.

그에게 있어서 천후는 주호 다음으로 단단한 바위였으니.

“흡-!”

악비산의 창끝에서 솟구친 악가의 창법은 가히 질풍과도 같았다.

바람마저 가르는 날카로움이 돋보였으며, 그 빛이 번뜩일 때마다 천후의 열양지기가 조금이나마 주춤했다.

하지만 악비산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속도와 날카로움에 무게를 담았다.

각자 상반되는 개념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묘리의 조화를 완벽히 이뤄낸다면, 그것으로 자신이 완성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선 악가의 성을 버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

만약 주호가 문파를 창안한다면 기꺼이 가문을 떠나 그곳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이야기였다.

악가의 소속원으로 출가한다는 것은 배신에 가까운 행위. 그러니 그것이 무마될 정도의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 그렇다면……!’

쿵-.

연무장 바닥으로 악비산의 족적이 깊게 찍힌다. 혼신의 힘을 담은 진각이었다.

그와 동시에 점으로 찔러지던 장창의 끝이 선으로 바뀌어 천후의 홍령도를 두들겼다.

“음.”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에 천후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악비산은 강함이 무엇인지 아는 무인이었다.

아마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고 성장을 거듭한다면 강호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고수가 될 터.

‘하지만 아직 나에게 닿기엔 이르다.’

파아앗-!

주작도법의 정수가 펼쳐졌다.

천후로서도 물러날 수 없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세가연합이나 구파일방 같은 소위 명문이라 불리는 문파보다 사신문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다.

쐐애애액-!

악가의 창과 주작의 도가 몇 번이고 맞붙었다.

사방으로 불똥이 튀고, 보는 이들의 얼굴을 타고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격한 경합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사아악-.

마치 찬물을 뿌린 듯 달궈졌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무아지경의 상태로 창과 도를 휘두르던 천후와 악비산이 움직임을 멈춘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과열되지 말라 했거늘. 이각은 벌써 지났다.”

둘 사이로 끼어들은 주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자 악비산은 아쉬운 듯 침음성을 흘렸고, 천후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차례가 끝난 두 사람은 다시 연무장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그와 교대하듯 중앙으로 나가던 철대환은 그들을 보며 말했다.

“잘 보았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군. 자네가 먼저 말을 걸어오다니.”

과묵하기론 천후보다 더 한 철대환이 먼저 말을 걸어오자 악비산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답했다.

철대환은 그 말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상대는 위천강이었다.

담담한 표정의 철대환과 달리 그는 가벼운 태도였다.

‘그리 어렵지 않은 상대니.’

천후면 모를까, 권각술을 펼치는 그는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 여겼다.

“…근래 얻은 것이 있나?”

둘을 유심히 살피던 주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위천강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으나, 그보다 먼저 철대환이 말을 이었다.

“얻었다기보단 덜어냈습니다.”

항상 무표정으로 속내를 잘 내보이지 않던 그다. 눈동자 안쪽엔 늘 무언가를 향한 그늘이 있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한결 가벼운 기색이었다.

“잘된 일이군.”

그렇기에 혹시나 하고 물은 것이었으나, 그렇다는 대답이 되돌아오자 옅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다른 후기지수들과 달리 철대환은 세가 연합이나 구파일방 같은 유력 문파의 출신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천후 또한 사신문이라는 신비 문파의 출신이 아니던가.

그에 반해 철대환이 익힌 무공은 주호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으며 이렇다 할 별호나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그 자질 하나만을 보고 뽑은 이였으니.

척.

철대환이 먼저 기수식을 취했다.

왼쪽 어깨를 비스듬히 내민, 사선으로 방향을 취한 자세. 위천강은 그저 천천히 제 검을 뽑아들었다.

‘확실히.’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보기엔 모두 시답지 않은 이들일 것이다.

그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것은 천후, 그리고 잘 쳐줘야 남궁연 정도.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것에 안주하다간 큰코다칠 것이었다. 실제로 남궁연이 바로 턱밑까지 쫓아오지 않았는가.

‘철대환 역시 말이지.’

[상태창]

이름: 철대환

별호: -

나이: 스물

소속: -

무공: 수라쇄혼권, 무영철쇄장, 추혼보

경지: 일류(十/十)

잠재력: 上下

호감도: 中上

남궁세가에 다녀왔을 때까지만 해도 철대환의 경지는 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사이 일류의 끄트머리에 도달했다는 것은 그의 내면에 무언가 크나큰 변화가 있었다는 소리였으니.

물론 그래도 위천강에 비하면 부족한 실력이었지만, 지금의 비무는 십 할 전력을 다하는 생사결이 아니었다.

임하는 태도에 따라 얼마든지 결과가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주호는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쉭-.

철대환이 가볍게 손을 뻗었다.

다만, 거리 쪽은 검을 든 위천강 쪽이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이라고 하기엔 철대환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기묘한 순서로 발을 놀리며 휘둘러지는 위천강의 검을 모조리 흘려냈고, 오히려 빈틈을 찾아내어 날카로운 일격을 날렸다.

“호오.”

위천강은 짧은 감탄사를 내뱉음과 동시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 하던 대로 적당히 손대중하며 시간을 죽으려 했지만, 자신의 공격을 전부 흘려낸 철대환의 움직임에 흥미가 생겼다.

그 역시 무공에 있어 둘째가라 하면 서러울 기재.

단숨에 그 보법의 묘리를 꿰뚫어 보고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으나, 철대환 역시 시시각각 그 움직임에 맞춰 변화를 섞으므로 대응했다.

“음.”

주호는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한된 수위로 철대환의 움직임을 쫓지 못한 위천강의 검 위로 신경질적인 기색이 서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 검로가 거칠어졌으며, 원래의 패도적인 기세가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와 반면에 철대환의 움직임은 세련되기 그지없었다.

단 하나의 발자국도 허투루 내딛지 않았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에서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판정을 따지자면 철대환의 칠할 승리인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주호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만.”

그와 동시에 둘의 움직임이 멈췄다.

철대환이 먼저 포권을 하자 위천강 역시 검을 거둔 채 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엔 전과 다른 짜증이 서려 있었다.

“그러면 저만 남았는데…….”

당천유는 슬쩍 손을 들었다.

다른 이들은 한 번씩 모두 대련을 끝마쳤지만, 인원이 홀수이기에 필연적으로 그 혼자 남게 되었다.

‘혹시 그냥 넘어가려나.’

근래 몰두하고 있는 일이 있었다.

가능한 힘을 빼고 싶지 않기에 일말의 희망을 담아 고개를 들었지만, 어느새 그 옆으로 붙어선 주호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넌 내가 직접 지도해주지.”

“…하지만 아직 상처가 전부 회복되지 않으셨다고…….”

“네가 다려준 약 덕분에 꽤 차도가 있었다. 굳이 내가 나서는 것은 그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면 되겠군.”

“…아하하하.”

고요한 연무장의 위.

당천유의 메마른 웃음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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