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난 격렬한 것이 오히려 좋다. 그편이 더 박진감 넘치지 않나.”
쿵.
악비산은 제 창끝을 연무장 바닥에 찍으며 가슴을 폈다.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지 않냐는 듯 시선을 보냈지만, 동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나저나 교관님도 내력이 심상치 않아 보이더군.”
선우연이 내뱉은 말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 나이에 비해 고강한 무공 때문에 시선이 모이는 와중이었다.
거기에 청화루에서 보였던 뒷배의 세력.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무림맹주 단철량과의 관계였다.
이것은 이미 그들 사이에서 몇 번이나 돌았던 화제였지만, 그때마다 다들 눈을 빛내며 한마디씩 얹어왔다.
“가장 유력한 건 무림맹 산하 어느 비밀 조직이라는 것이군. 그러면 맹주님과의 관계나, 그 무공 수위도 설명할 수 있네.”
“애초에 알려진 신상 정보가 거짓이었다?”
당천유의 말에 악비산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뭐, 그렇다면 그리 강한 것도 이해가 가네. 무림맹엔 여러 극비 조직이 있으니 교관님 같은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팔짱을 낀 선우진이 무언가 납득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주호의 출신은 무림맹 산하 극비 조직 출신의 고수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
물론 남궁연과 천후는 내막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들의 말에 어울리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오히려 흥미를 드러낸 것은 위천강의 쪽이었다.
‘…신교도 그와 같은 고수를 육성하고 있다. 무림맹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아니, 이쪽이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으려나.’
단일 세력인 천마신교와는 달리 무림맹은 구파일방과 세가 연합, 그리고 그 휘하 수많은 문파가 모인 복합체였다.
그러니 여러모로 이해관계에 얽힌 일들이 많으니,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주호 정도 되는 고수의 존재였다.
만약 한 명이 아니라 여럿, 그것도 각 세력 간의 판도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다수가 존재한다면……?
위천강은 천마신교의 소교주로서 높은 등급의 정보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러한 류의 소문을 접한 적은 없었기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위기감을 느꼈다.
‘…수하들을 시켜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조사하게 해봐야겠군.’
주호가 정말로 극비 조직의 출신이라면 그 이름, 출신이 전부 거짓일 가능성이 클 터.
위천강은 그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벅.
“…….”
그때, 연무장 밖으로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을 때, 그 위로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발을 내디뎠다.
“모두 모여 있었군.”
주호의 등장에 후기지수들은 몸을 풀던 것을 멈추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교관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선우연의 물음에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 약의 효과가 좋더군. 고맙다.”
“…당연한 일입니다. 저희 때문에 입으신 상처인데.”
주호가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오자 당천유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선우연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면서도 재차 말을 이었다.
“항간에선 청화루 쪽이 마교와 관련 있다고 결론이 난 것 같은데, 맹 쪽도 그런 겁니까?”
“그래. 녀석들은 마교의 끄나풀이었다. 안휘에서 습격 받았을 때 섞여 있던 그 남자도 있지 않았느냐.”
“…간도 큰 녀석들이군.”
남진을 지칭하는 그 말에 당천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 일로 잘 알았겠지. 너희는 그들에게 좋은 표적이다. 학관 안쪽에만 있으면 모르겠다만, 외부에선 이처럼 적들이 언제라도 습격해올 수 있으니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도록.”
주호의 말처럼 이미 몇 번의 전례가 있었다.
그렇기에 다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노라 답했다.
“…그러면.”
오늘은 원래 첫 강의인지라 실전의 이해는 남사일의 주도로 이루어짐이 맞았다.
하지만 그는 무림맹 쪽의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각 교관의 주도로 수업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주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후기지수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처음 만났을 때보다 몇 단계는 진보한 상태로 이젠 제법 성숙한 기세를 보였다.
평상시라면 한 명 한 명 대련으로 지도해주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의 상태가 별로 좋지 못했다.
“음.”
주호는 어깨를 매만졌다.
단목우현과의 싸움에서 제일 크게 다친 곳은 오른쪽 어깨였다.
단순한 부상이라면 회복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겠으나, 그의 검에 서려 있던 사기(邪氣)가 파고들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의원 역시 상처가 완치될 때까지는 무공을 사용하는 것을 삼가라 할 정도였으니, 과연 사흉수의 고수라 할 법한 여파였다.
“다들 알다시피 내 쪽은 아직 상처를 전부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니 당분간 직접적인 대련은 피하지. 대신 너희들의 대련을 지켜보며 지도하는 방식으로 하겠다.”
“…그 정도로 심각했던 겁니까?”
당천유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학기 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그대로 대련 형식의 수업을 강행하지 않았던가.
다들 도망치느라 어떤 싸움이 있었는지 보지는 못했으나, 술렁이며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봐왔다.
하지만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으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기는 것이니. 그렇다고 해서 허투루 할 생각은 없으니 각자 최선을 다해 서로를 상대하도록. 어설프게 했다간 내가 직접 나서겠다.”
“…….”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모두가 몸을 움찔 떨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
주호는 제 말을 그래도 실천했다.
일곱 명의 후기지수를 짝지어 순번을 정했고, 돌아가며 비무를 하게 했다.
첫 번째는 남궁연과 선우연.
둘 다 우연히도 같은 검을 쓰는 검객(劍客)으로 후기지수 사이에서도 가장 비슷한 성질을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자, 그러면 얼마만큼 보여줄지.’
주호는 흥미진진했다.
원래 남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 하지 않았던가.
입관 당시의 선우연은 분명 그녀보다 한 걸음 앞서 있었다.
소신룡(小神龍)이라 불리며 화산을 이끌어나갈 차기 인재라 불렸으니. 사문의 절기를 물려받고, 위명 높은 고수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온갖 귀한 영약을 아낌없이 먹었다.
남궁연 역시 명문의 직계로 남부럽지 않은 대우를 받으며 성장한 것은 맞지만, 가문의 장자가 아닌 탓에 세가의 진신절기인 제왕신공을 익히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익힌 무공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화산의 절기를 그대로 이어받은 선우연과 비교하자면 손색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벽을 깼으며, 두 날개를 활짝 펼치지 않았는가.
스릉-.
남궁연이 천천히 검을 뽑아들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남궁세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전과는 사뭇 다른 그 기세에 모두 속으로 놀람을 표해냈다.
‘…이 정도라고?’
특히 선우연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실력은 잘 알고 있던 차.
입관 시험 때부터 빼놓지 않고 견식 했으며, 같이 수업을 받는 학기 중에도 교관님과 비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지금 보인 매끄러운 발검만으로도 등줄기가 자르르해졌다.
솔직히 이때까진 경시하는 마음도 있었다. 수석 입관의 명예는 그녀가 가져갔지만, 순수하게 실력으로 맞붙는다면, 그녀보다 우위에 있노라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크나큰 오만이었을 따름이었다.
“내공은 서푼만. 내가 정한 기준을 넘는다면 개입할 것이다. 그러니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도록.”
주호의 담담한 말에 남궁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수식을 취했다. 선우연 역시 그에 맞서 검을 뽑아들었고, 천천히 그 앞에 섰다.
“…….”
둘은 아무런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선우연은 평소였더라면 남궁연에게 제 실력을 뽐낼 생각으로 들떴겠지만, 지금은 착 가라앉은 마음으로 다시금 검을 쥐었다.
남궁연의 기세는 한점 흐트러짐이 없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그 허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없다면, 만들어내면 되는 것!’
툭.
먼저 움직인 것은 선우연 쪽이었다. 한걸음 발을 내디딘 그는 앞으로 나아가며 검을 휘둘렀다.
잘게 떨리는 검신이 가벼운 잔영을 만들어냈다.
매화검법의 단초가 되는 변화였다.
곧 그것을 기점으로 그의 검이 흐드러지며 마치 한 떨기의 매화꽃이 피어나듯 유려하게 허공을 노닐었다.
“…제법.”
팔짱을 낀 채 비무를 지켜보던 악비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은 그 옆에 있던 당천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화루의 일 이후로 술을 자제하고 밤늦게까지 수련에 몰두하더니, 그사이에 매화 검법의 성취가 한 단계 진보했군.”
“그렇지. 매일 틀어박혀서 서적이나 뒤적거리는 너와는 달리.”
“…이 무식한 친구야.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해야겠나. 나는 할 일이 있다고 몇 번을 했거늘.”
악비산은 제 친우인 당천유에게 종종 같이 수련을 하러 가자고 권유하곤 했다.
하지만 당천유는 근래 무공을 수련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몰두해 있었다.
물론 그것 역시 넓게 보자면 무공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지만, 악비산으로서는 나태해진 친우의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따름이었다.
곧 투덕거리기 시작한 둘을 뒤로한 채 나머지 후기지수들은 얌전히 비무를 관람했다.
“…어때 보이오? 난 검술 쪽에는 조예가 얕아서 말이오.”
드물게도, 철대환이 말을 꺼냈다.
워낙 과묵한 그였기에 살짝 놀란 위천강이었지만, 비무를 지켜보던 눈은 여전히 심드렁하기 짝이 없다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뭐, 둘 다 대단하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성장했으니.”
상투적인 대답이었으나, 철대환은 그것에 수긍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천후만이 벽에 등을 기댄 채 그 광경을 모두 눈에 담고 있었다.
아니, 입은 닫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은 주호를 제외한 그 누구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확실히 제법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괄목할만한 진보를 이룬 남궁 소저를 따라잡기엔 부족해.’
냉정하지만 정확한 평가였다.
실제로 선우연의 검은 무언가를 할 때마다 제 흐름을 이어가지 못한 채 족족히 끊기고 있었다.
화산의 검은 환검(幻劍).
천변만화를 기조로 삼았다.
하나의 휘두름이 일렁임을 그려내고, 그것을 기점으로 매화의 잔향이 시작된다. 하지만 남궁연은 그것이 이어지는 마디를 전부 끊어냈으니 초식이 제대로 이어질 리가 만무했다.
“…큭.”
답답한 마음에 신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공세를 이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궁연의 기세는 철옹성의 그것과 같았다.
물 샐 틈이 없었고, 완벽히 틀어막혔으며, 도저히 파고들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어째서 공세로 나오지 않는 것이지?’
의아한 것은 그 점이었다.
분명 이쪽의 공격을 완벽이라 할 수 있는 만큼 전부 막아내고 있음에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인 심정이었으니. 그 속내를 알아차린 것은 오직 주호뿐이었다.
‘선우연의 검을 익히고 있군.’
그의 초식을 끊어내고 공격을 흘리면서도 자신 쪽에서 치고 들어가지 않는 것도 모두 그것이 목적이었다.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재능이지 않은가.
다른 이들과는 아예 보는 눈의 높이가 달라졌다. 선우연으로는 그저 의미 없는 투덕거림이라 생각했겠지만, 남궁연은 그의 경험과 깊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윽고 이각이란 시각이 지났다.
“거기까지.”
주호가 내뱉은 나지막한 말에 둘은 움직임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