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늦은 밤.
팽대환은 코앞까지 다가온 학관의 하반기 일정을 준비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홀로 업무 중에 있었다.
똑똑-.
“음?”
그러던 차, 자신의 집무실을 두드리는 소리에 의문 어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개관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런 시각까지 남아 있는 이는 없을 터였다.
의아함을 품은 채 문을 열자, 곧 그 너머에 서 있던 담우양을 볼 수 있었다.
“수석교관님을 뵙습니다.”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이런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인가.”
팽대환은 수석교관으로서 담우양과 안면을 트고 있었지만, 이런 밤에 독대할 만큼의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담우양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뺨을 긁적이며 말문을 열었다.
“본래라면 저도 이런 늦은 시각에 찾아뵐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만…….”
“무슨 일이 있군?”
“예,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청화루쪽에서 저희 학관 측의 후기지수와 교관이 소란에 휘말렸다는군요.”
“…휘말렸다?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는가?”
“그것이…….”
담우양은 곧 자신이 알고 있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술자리가 끝나 숙소로 돌아가던 도중 청화루에 소란이 일어난 것을 보았습니다. 직전에 건물 몇 개가 무너질 정도로 거친 싸움이 있었다더군요. 거기에 주호 그 친구를 비롯해 그 밑에서 사사 받던 후기지수들까지 연루되었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았습니다.”
마음 같아선 함께 무림맹으로 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위치로는 어림도 없는 일.
그렇기에 곧바로 팽대환을 찾았고, 지금에 이르른 것이었다.
“주호 그 친구가? 아니, 그 친구 밑에서 사사 받는 후기지수라 함은…….”
“예, 화산의 선우연과 남궁세가의 남궁연을 비롯한 그들입니다.”
“…이런.”
팽대환은 이마를 감싸쥐었다.
휴관 중이라 할지라도 학관은 후기지수들의 안위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의 출신이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 중추의 소속이라면 사후 여파는 차원이 다르게 커질 터.
‘학기 초의 사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다.’
무림맹까지 직접 적으로 개입한 이상 자신, 아니 관주가 직접 나서야 할 수도 있었다.
“상황은 어떠했나.”
“후기지수 측엔 부상자는 없다고 합니다. 다만, 주호 쪽은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군요.”
“원흉 쪽은?”
“원흉은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건너 듣기로는 마교의 고수와 싸웠다는 설도 있는데 확실치 않은 것이라…….”
“…말해줘서 고맙네. 뒤는 내가 처리하겠네.”
담우양의 어깨를 강하게 두드려준 팽대환은 그대로 외투를 걸치곤 밖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사건의 발생이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직 자신에게 들어온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간 큰일이 아닌 듯싶었다.
‘주호 그 친구가 다칠 정도라면 필시 심상치 않은 상대겠지.’
더군다나 맹에서 직접 나섰다는 이야기는 그 흉수가 마교와 닿아 있다는 것에 큰 설득력을 주는 요소였으니.
“마교라, 이거 서둘러야겠군.”
팽대환은 급히 사태 파악에 나서면서도 무림맹에 사람을 보내 상황을 살폈다.
다행이라면 이번 일에 관여된 후기지수들의 사문 역시 같이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은 팽대환은 날이 밝는 즉시 맹에 방문할 것을 부탁받았다.
‘큰일이야 없을 듯한데.’
무림맹주와 주호는 사형제지간이지 않은가. 아직 무림에 공표되지 않아 몇몇밖에 모르는 극비였으나, 무림맹주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 그라면 큰일은 없으리라.
그렇기에 팽대환 그 자신이 주력으로 알아본 것은 청화루 쪽과 후기지수들이 그들과 연루된 이유였다.
그렇게 날이 밝은 뒤 팽대환은 곧바로 맹을 향했다.
“……?”
주호가 머물고 있다는 건물 앞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복장도, 모습도 각양각색인 이들. 하지만 팽대환은 그들을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내부에는 주호와 무림맹주 단철량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후기지수와 그 사문의 고수들은 경직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던바. 팽대환은 어렵지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들 모여 있었군.”
그 뒤로 다가가 제 기척을 내자니, 후기지수들이 고개를 돌렸다. 팽대환의 등장에 모두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단철량의 존재가 주는 충격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듯 보였다.
“보아하니 주교관이 걱정되어 온 것 같은데, 이렇게 모여 소란을 피우는 것도 좋지 않네. 뒷일은 내가 처리할 터니, 다들 돌아가는 것이 어떤가?”
그 말은 후기지수들에게 함과 동시에 그 뒤에 있던 각 사문의 고수들에게 건네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 있는 모양새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팽대환이 나서서 대신 처리하겠다고 하니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로 시선을 맞추어 짤막한 의견을 나눈 끝에, 그 앞에 서 있던 남궁연이 포권을 올리며 답했다.
팽대환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이내 자리를 떠났고, 그곳엔 적막함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도호, 자네도 오랜만이군.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연초의 일이었던가?”
“예. 개관 전에 관주님과 함께 뵈었습니다.”
둘은 이전부터 안면이 있던 사이인 듯 인사를 함에 스스럼이 없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주호가 안쪽으로 자리를 안내하고 열려있던 문을 닫았다. 그러자 팽대환은 담담했던 태도를 지우고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또 무슨 소란인지.”
“본의는 아닙니다만, 또 민폐를 끼치게 되었군요.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주호는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었다. 정말로 본의는 아니었다. 누가 소란이 이렇게까지 번지리라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되었네. 민폐는 무슨 민폐인가. 듣기로는 마교의 끄나풀이라지? 자네 덕분에 관생 쪽에 피해가 없었으니 망정이군.”
팽대환은 흐르지도 않는 땀을 닦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밤사이 뛰어다닌 덕분에 각 사문에 연락해 이야기의 조율을 끝냈다. 다행히 별 잡음 없이 처리할 수 있었고, 남은 것은 무림맹 뿐이었다.
“이쪽도 조용히 처리했네. 큰 소란은 나돌지 않을 테지. 오히려 마교의 기습에서 제자들을 구한 교관이라 소문이 나지 않겠는가.”
그런 팽대환의 시선을 눈치챈 단철량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다행이군요. 배려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뭘, 서로 돕고 사는 사이가 아닌가.”
단철량이 작게 미소를 짓자 팽대환은 다행이라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근래 경쟁 상대인 천무학관의 성장세가 무서울 정도로 치솟고 있었다.
정천학관이 중원제일학관으로 그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고 있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이번 일을 잘만 이용한다면 내년에 유망한 후기지수들을 끌어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기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곳에 머물게 하는 것도 다 외부의 시선 때문이었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도 없게 되었군.”
“방금의 소란 역시 의도하신 것이 아니셨습니까.”
단철량의 말에 팽대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그만한 숫자의 목격자가 있었다. 이제 주호가 맹주의 지인, 혹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갈 터.
애초부터 범상치 않은 무공과 내력으로 주목받던 상태에서 맹주의 이름과 엮였으니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의도한 일은 아니라네. 다 이 친구가 자제들의 존경을 듬뿍 받아서 그런 것이지.”
“…….”
주호는 살짝 부끄럽다는 얼굴로 뺨을 긁었다. 단철량은 그 모습을 보곤 작게 웃음을 터트렸고, 마주 앉아 있는 팽대환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이왕 온 것 데리고 돌아가세. 개관을 앞두고 있지 않은가. 서로 공사다망할 터인데 이렇게 붙잡고 있는 것도 고역일 테지.”
“어찌 그러겠습니까. 맹주님이 붙잡는 거라면 며칠은 더 머물지요.”
팽대환의 말에 단철량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그런가? 그러면 이참에 학관을 떠나 맹에 안착하는 것이 어떤가. 도호 자네라면 내 당장 원하는 요직을 내어줄 마음이 있네.”
“…말씀은 감사하지만, 지금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두 번 있던 이야기가 아니었는지, 팽대환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에잉, 그러면 일없네. 어서 가기나 하세. 자네는 내 따로 기별을 넣을 테니 그렇게 알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단철량의 축객령에 쓴웃음을 지은 주호는 포권을 올리곤 팽대환과 함께 자리를 빠져나왔다.
“정말, 맹주닙을 뵙노라면 기가 쭉쭉 빨리는군. 흡성 대법이라도 익히고 계신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야.”
한껏 거리가 벌려진 후, 팽대환은 십 년은 더 늙은 듯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까? 그런 것 치고는 편히 대화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대놓고 인상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다행히 맹주께서 내 쪽을 좋게 봐주시는 듯하니 망정이지.”
주호가 의외란 표정으로 되묻자, 팽대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추더니 두 눈을 모으며 고개를 돌렸다.
“…설마 나중에 맹주께 말을 흘리는 건 아니겠지?”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말라고 하시면 하지 않겠습니다.”
“이젠 말도 함부로 못 하겠군, 하하.”
주호의 농에 팽대환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자네도 참 다사다난하네. 남궁세가에서도 일이 있었다고 들었거늘 하남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런 소란에 휘말리다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째서 액운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였다.
비동을 나온 직후부터는 여러 소란에 휘말리기만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언가 기이한 운명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난세는 영웅을 탄생시키는 법이라 했지. 뭐, 어찌 되었든 다 좋게 풀리지 않았는가. 지나간 일을 너무 담아두지 말게.”
“영웅이라니 과분한 이야깁니다.”
아무리 그래도 주호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주호는 맹에서 돌아온 직후 천우희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청화루에서 도주한 사흉수의 끄나풀을 쫓으러 떠난 뒤였기에 만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돌아오면 연락을 달라는 전언을 남겨둔 채 다시 학관으로 돌아오자, 남궁연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이 그를 찾아왔다.
“교관님, 일은 어떻게……?”
“잘 처리되었다. 오히려 칭찬받았으니 걱정말도록.”
“다행이네요.”
담담한 주호의 말에 그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선우연은 직전까지 주호에게 폐를 끼친 것에 노심초사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렇기에 잘 처리되었다는 이야기에 누구보다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곧 자신들을 습격한 흉수와 그때 상황에 관해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주호와는 달리 이제 약관에 오른 후기지수들에게는 그것 또한 이전에 겪지 못했던 색다른 경험이었으니.
“…….”
다만, 그 가운데 한명.
위천강만은 입을 닫은 채 의구심어린 시선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신교 소속의 마인들이 아니었다.’
청화루가 천마신교의 끄나풀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이야기가 퍼져 있었고, 실제로 무림맹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일을 처리했다.
하지만 위천강이 알아본 바로는 청화루와 신교는 일체의 관계가 없었으니.
그렇기에 그는 노선을 바꿔 주호에 대해 심도있게 조사했다.
개인의 무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청화루에서 보인 제 삼의 세력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무림맹주와 관계가 있다고 하기까지 않은가.
‘위험했다. 설마 무림맹주가 그 자리에 있을 줄은.’
위천강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신교에서 내려오는 특수한 비전으로 마기를 감추고 있었다.
어지간한 고수의 이목은 속여 넘길 수 있었지만, 경지를 초월한 무림 맹주 같은 고수에게까지 통하리라고는 자만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존재감을 죽였고, 겨우 그 시선을 흘려 넘길 수 있었다.
‘…대체.’
그런 만큼 주호를 향한 위천강의 의혹은 깊어질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