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77화 (77/300)

#77화

“어떤가, 조사의 진척은.”

무림맹 주작단주 진무혁.

그는 피곤함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조사관을 향해 물었다.

“청화루 쪽에서 비정상적인 자금의 흐름이 확인되었습니다. 물밑에서 맹의 눈을 피해 이 정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건 마교나 사도맹뿐이겠지요. 저들의 주장에 무게가 실리지 않는가 싶습니다.”

“조서는?”

“여기 있습니다.”

조사관은 주호를 비롯해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 있던 이들에게서 받은 조사 내용을 내밀었다.

“다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가. 소신룡 선우연, 악가의 악비산, 당가의 당천유 등등. 우연히 청화루에 자리했고, 저들의 낌새를 알아차렸다니.”

진무혁은 거친 손길로 제 머리를 긁적였다.

비동혈사 이후로부터 무림맹은 마교와 물밑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당연히 하남에 자리 잡은 마교 세력 중 굵직굵직한 곳들은 대부분 파악하고 있는바.

하지만 청화루는 그들의 정보망에 들어있지 않은 곳이었다.

“동선은 이미 확보했고, 목격자도 여럿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 주호라는 교관 쪽인데…….”

“…하아.”

조사관의 말에 진무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교관 쪽이 아니다. 후기지수들이 휘말린 것이 더 큰 문제지.”

뛰어난 신진고수의 출현, 그럴 수 있다.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몸소 앞으로 나서서 적들과 싸운 것 역시 칭찬할 만한 기개다.

하지만 무림맹에서 청화루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했고, 그 결과 후기지수들을 위험에 빠뜨린 것이 문제였다.

“소위 명문이라는 곳들은 마교라면 발작을 하니 말이야.”

이번 사건과 엮인 후기지수들의 사문에선 당장 진상 조사를 착수할 것을 요구했다.

더불어 책임자의 징계와 수위 높은 발언들이 쏟아져 내렸기에 발등이 떨어진 상황이었으니. 실제로 진무혁은 조금 전까지 맹 내에 기거하고 있는 그 사문들의 명망 있는 고수들을 상대로 사정을 설명하며 쩔쩔매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해온 직후였다.

이해는 갔지만, 피곤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이번 일은 예상에도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대처가 많이 늦은바. 그런 만큼 주호의 활약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누군가 한 명 죽기라도 했었으면 맹은 그날로 뒤집혔겠군. 그래서, 그 주호 교관은?”

“조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게 했습니다. 밤사이 학관 쪽에도 연락을 넣었고요. 날이 밝는 대로 도호가 방문한다고 합니다.”

“…도호? 팽대환? 이거 또 거물이 납시는군.”

세가 연합의 거두인 하북팽가 출신의 고수, 도호(刀虎) 팽대환.

그는 진무혁으로서도 쉬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또 뭐.”

“남궁세가 쪽에서도 주호 교관의 잘못이 없다는 걸 보증하겠다고 합니다. 여차하면 청화루 쪽에서 입은 민간의 피해를 자신들이 부담할 수도 있다며 넌지시 일러오더군요.”

“…도호뿐만 아니라 남궁세가와도 접점이 있다고? 아니, 그러면 도호 쪽도 팽가 자체와의 접점이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예, 그래서 제가 처음에 주호 교관 쪽의 문제가 심상치 않다는 것입니다. 당장만 해도 오대 세가 중 두 곳이 들고 일어났으니 말이죠.”

“지금쯤 조식을 끝냈겠군. 내가 가서 이야기해보지.”

진무혁은 곧바로 주호의 거처로 향했다.

본래라면 소란을 일으킨 범죄자는 임시 철옥에 감금되어 경계를 받아야 했지만, 주호의 경우는 여러 증언과 상황이 참작되어 그곳까진 이르지 않았다.

대신 주작단의 거처 중 한 곳에 임시로 머물게 되었다.

“충.”

입구를 지키고 있던 주작단의 무인이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가볍게 손을 흔든 것으로 화답한 진무혁은 전음으로 수하들에게 물었다.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조사가 끝난 후엔 조용히 휴식을 취했고, 아침 역시 식사 이후 계속 같았습니다.

“주교관. 나요.”

진무혁은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호는 침상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가부좌를 풀고 있는 것을 보니 운기조식을 하던 중이리라 짐작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배려해주신 덕분에 어느 정도 회복했습니다.”

진무혁은 다행이라 대답하며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외모는 흠잡을 곳이 없다.

얼굴과 분위기만 보자면 어느 문파의 귀공자라 할 수 있었지만, 그 안에는 자신조차 장담하지 못하는 강한 무공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조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주호의 물음에 진무혁은 잠깐 말을 망설였다.

본래라면 용의자로 의심받는 이에게 할 말이 아니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 마인은 놓쳤습니다. 맹의 고수들이 추적했지만, 감쪽같이 사려졌더군요.”

“그렇군요.”

그 담담한 대답에 진무혁은 주호가 애초에 마인을 놓치리라 짐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습니다. 다만, 재산 손실이 적지 않게 나왔는데 이 부분에 대해선 남궁세가 측에서 부담해준다고 하더군요.”

“남궁세가 말입니까.”

“예. 혹시 그들과 무슨 관계인지는…….”

그 말에 주호는 작게 미소 지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뜻에 가볍게 한숨을 내쉰 진무혁은 마저 말을 이었다.

“아마 이후에도 별일은 없을 겁니다. 남궁세가에서 신원을 보증했고, 날이 밝는 대로 도호 대협께서 오시기로 하셨습니다.”

“수석교관님께서 오신다고요?”

그 말에 주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것으로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만, 이번 일은 예외적인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진무혁은 그의 표정을 보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번 일은 너무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 많았다.

정황상 마교일 가능성이 제일 컸지만,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기시감이 그의 감각을 건드려왔다.

“……!”

곧 말을 이을 찰나 진무혁은 등 뒤에 다가오는 거대한 존재감에 흠칫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들 아침부터 수고 많네.”

무림맹주 단철량.

허허로운 노인의 모습을 한 그가 천천히 방 안으로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진무혁은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포권을 올렸다.

무림맹에 있어 맹주 단철량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 역시 평소 흠모하던 이였기에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었다.

“…헌데, 어쩐 일로.”

소란이 있었다곤 하나 맹주까지 나설 일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맹의 외당 장로 선에서 처리될 일이었기에 갑작스러운 그의 출현에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그 청년과 아는 사이지. 조금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는가.”

“아, 물론입니다. 밖에서 기다릴 테니 편히 나누시지요.”

진무혁은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범상치 않은 무공과 인맥, 그 모든 것이 맹주와 관련 있는 이라면 설명이 되었다.

그렇기에 두말할 것 없이 자리를 빠져나갔고, 곧 장내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오랜만이네.”

“…격조하셨습니까.”

“뭘 그리 딱딱한 인사를. 그보다 격조한 건 내가 아니라 자네인 듯하네만.”

단철량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고작 반년이었다. 보통이라면 한두 단계 성장해도 그 경지에선 마땅히 축하받아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단순히 성장이라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연 주호의 모습에 단철량은 은근한 시선으로 손짓했다.

“일이 많았겠지. 하도 이쪽에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 남궁한 그 친구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전하기까지 했는데.”

“아.”

그 말에 주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근래 사신문의 일이나 남궁세가 쪽의 사건으로 바빴던바. 학관이 다시 개관하기 전에 시간을 내어 들를 차였지만, 설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그 역시 몰랐다.

“이야기 좀 풀어놓으세. 남궁한 그 친구 쪽에서 묘한 이야기를 하던데.”

그 말에 주호는 고개를 들었다.

남궁한은 그들이 세가를 떠나던 날 맹주 쪽에 대충 이야기를 넣어 놓겠다고 말한 바가 있었다.

아무렴 서신인 만큼 노출될 우려가 있어 사흉수의 이야기까지 직접적으로 거론하진 않은 듯했지만, 그 원흉이 다른 존재라는 언급은 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일도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 물음에 짧게 한숨을 내쉰 주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사신문이란 곳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이어진 설명은 남궁세가에서 남궁한과 남궁연에게 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탁. 탁. 탁.

단철량은 깊어진 두 눈으로 저 멀리를 응시하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깊이 생각하고 있는 듯한 그 모양새에 주호가 숨을 죽이고 있을 찰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더 이야기했는가.”

“남궁세가 쪽이 전부입니다.”

“흠.”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물론 믿기 어려운 소리네. 더욱이 사실이라면 달갑지도 않군. 작금 우리가 물밑에서 마교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저도 옛적에 한 손 보탰으니 말이죠.”

“한 손을 보태?”

“그것이…….”

주호는 다시금 뺨을 긁적이며 비동에서 나온 직후의 일을 털어놓았다.

“강호에 출도한 직후 동료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한동안 마교와 사도맹의 지부를 박살내며 돌아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안휘 쪽에선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더군요.”

“…월영사신?”

“예. 부끄러운 이명이지만.”

“하하…….”

단철량은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일말도 생각지 못한 이야기로군. 설마 그 사신이 자네일 줄이야. 군사는 전대 고수가 마교를 단죄하기 위해 나선 것이라느니, 기인이 나타난 것이라느니 하는 낭설만 잔뜩 읊었거늘. 뭐, 후자 쪽은 틀린 말이 아니었군.”

“괜히 혼란스럽게 해드렸군요.”

“덕분에 그쪽으로 이목이 쏠려 움직이기 편했다네. 가만, 안휘라 함은…….”

“예, 그곳에서의 일로 남궁세가와 안면을 트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단철량은 작게 미소 짓고는 주호를 바라보았다.

“마교나 사도맹이 아닌 제 삼의 세력. 남궁세가의 섬뢰단주씩이나 되는 자리에 배신자를 심어둘 저력이라면 심상치 않겠군. 필시 맹에도 다수 있을 터겠지. 자네는 그들을 색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들었다만.”

“예. 상대 쪽에서 모르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남궁세가의 간자를 밝혀냈고.”

주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단철량은 가볍게 주먹을 거머쥐었다.

“…사실 상황은 그리 좋지 않네. 마교 쪽에는 큰 자금의 흐름이 포착되었어. 수뇌진은 이제 전쟁까지 염두에 두며 대계를 구상하고 있다네.”

“전쟁, 말입니까.”

그 울림이 주는 무게에 주호의 두 눈이 가라앉았다.

“마교는 호시탐탐 중원을 노렸지. 지금 나와 비슷한 연배들은 모두 기억할 것이네, 그때의 마교가 일으킨 분란을. 더욱이 작금의 마교는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짧게 한숨을 내뱉은 단철량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물론 지금 당장의 이야기는 아니야.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일세.”

“그렇습니까.”

“그래도 대비는 해두어야 하는 법이겠지. 이쪽도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으니 대충 정리가 끝나면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숨어든 간자는 정리해야겠지. 그리고…….”

그는 말하다 말고 문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주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문밖으로 저 멀리서부터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다수의 인원이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은 상황이었고, 머지않아 그들은 모두 이곳으로 다가왔다.

벌컥-!

“교관님!”

“…너희들?”

남궁연을 필두로 후기지수들과 그들의 사문 소속의 고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 뒤쪽에 있던 진무혁만이 골치 아프단 얼굴로 이마를 감싸 쥐고 있을 뿐.

“절차대로 모두 처리했습니다. 더는 이곳에 억류되어 계실 필요가 없…….”

남궁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는 주호가 청화루의 소란으로 부당하게 억류된 것을 풀기 위해 제 동료들과 사문의 힘을 움직였다.

그렇기에 서둘러 주호를 데리러 나왔지만,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노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왜 그러시오?”

그런 남궁연의 태도에 선우연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의문을 표했다. 그러곤 곧 그녀와 같이 안쪽에 있던 노인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자네, 제자들에게 사랑받는군.”

“…조금 과한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단철량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갑네, 유망한 후기지수 여러분. 본인은 본 맹을 이끄는 단모라 하네.”

“무, 무림맹주…….”

누군가 더듬으며 말했다.

단철량은 그것에 살짝 웃어주곤 주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주 교관과는 안면이 있어 잠시 대화를 나눴던 것이라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하게나.”

그 말에 장내에 있던 이들은 모두 입을 떡 벌린 채 주호와 단철량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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