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같잖은 소리는 집어치우지.”
주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가.’
소란이 이렇게 번졌으니 무림맹 쪽에도 벌써 이야기가 들어갔을 터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들이 오기 전에는 승부를 봐야 했다.
파바바밧-!
싸움은 곧 절정에 다다랐다. 수십 줄기의 검기가 서로를 향해 쇄도하고 사방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치명타가 되지 못했다. 각자의 호신강기는 여전히 두터울뿐더러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로는 나를 쓰러뜨리기 힘들 텐데.”
단목우현은 입가를 비틀었다.
그는 주호의 손속에 망설임이 서린 것을 읽어냈다.
피차 서로 전력을 낸 것이 아니었다. 자신 쪽은 상대를 살피는 것이었지만, 주호는 주위가 휘말릴까 주춤하는 것이었다.
“이래도 망설일 수 있나 궁금하군.”
웅웅-.
단목우현의 검 위로 심상치 않은 기운이 서렸다.
그 위세가 마치 이전에 마주했던 궁기의 것과 같아 주호는 숨을 가늘게 내뱉으며 제 검을 움켜쥐었다.
“혈류(血流).”
파아아아앗-!
핏빛 강기가 세 줄기로 나뉘어 크게 용솟음친다. 정면과 좌우에서 쏘아진 그것들은 이내 주호를 향해 쇄도했고, 그 궤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찢어발기며 몸부림쳤다.
“…망설이고 있냐고? 누가 말이지?”
주호는 천천히 몸을 낮췄다.
검을 옆으로 길게 늘어뜨린 채 옆으로 빼놓았고, 이내 무릎을 굽히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쉬이이익-!
이전과 달리 매서운 기세로 자신에게 닥쳐오는 그의 모습에 단목우현의 두 눈이 커졌다.
‘서로 충돌한다면 주위가 휘말릴 텐……. 아니, 지금까지 연기였나?’
주위를 신경 쓰는 것은 스스로 실력에 제한을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 점을 공략하면 쉬이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주호의 눈동자 위에 깃든 거친 투기는 그러한 것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멸격(滅激).”
마찬가지로 단목우현의 눈동자에서 당황을 읽은 주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검을 휘둘렀다.
청룡검법(靑龍劍法)
오초식 멸격(滅激)
멸격은 외부의 힘을 받아들여 이용하는 초식으로, 상대의 공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위력이 증가했다.
파가각-.
주호는 이를 악물었다.
멸격은 본디 자신보다 낮은 하위 경지의 이들을 상대로 효율을 보이는 초식.
동수, 혹은 그 이상의 강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비슷한 경지의 고수보다 훨씬 더 많은 내공의 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파아아앗-!
핏빛 강기들이 전부 일그러지며 멸격에 휩쓸렸다. 그것들은 곧 주호에게로 닥쳐왔을 때보다 더 절정의 기세로 원주인에게 되돌아갔으니.
타닷-!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은 무리라 판단한 단목우현은 힘껏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 탓에 멸격의 여파가 애꿎은 건물들을 휩쓸었지만, 주호는 개의치 않는 얼굴로 다시 검을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기묘한 술수를 부리는군.”
쿵.
단목우현의 발이 크게 땅을 내디뎠다.
주위로 균열이 퍼지며 바닥이 내려앉고 거친 기운이 그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좋다, 인정하지. 네놈이 그 고리타분한 녀석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허공에 몸을 띄우고 있던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보통의 정도 고수라면 주위가 휘말릴까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주호는 거리낌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즉, 그 안쪽 어딘가 역시 비틀렸다는 이야기였으니.
“하지만 과연 같잖은 것일까?”
그는 지금의 상황이 못내 즐거운지 입가엔 비틀린 미소까지 지어져 있었다.
파아앗-!
단목우현 왼손으로 핏빛 혈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기다랗게 퍼져나갔다.
오른손에 들린 검은 마치 화살처럼 그 위에 걸렸고, 검의 끝은 주호를 향했다.
“혈성(血星).”
피잉-.
마치 활시위가 당겨진 것처럼 혈기가 팽팽해졌다. 그것은 이내 검 끝에 집약되더니 한줄기 파공성과 함께 정말로 화살이 쏘아진 것처럼 허공을 꿰뚫었다.
파아아아앗-!
지금껏 보였던 초식들과는 궤를 달리한 파괴력에 주호 역시 제 주위로 한가득 청룡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멸천.”
청룡신공
멸천(滅天)
그가 발할 수 있는 최강의 초식이 검 끝에서 터져 나왔다.
마치 한 마리의 청룡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기세였다. 그것은 곧 핏빛 달과 마주했고, 허공에서 서로를 거칠게 물어뜯다 결국엔 공멸(共滅)을 맞이했다.
이전에 위천강의 천마검식과 마주했을 때와 같은 결말. 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이전과 달랐다.
촤아악-!
주호의 오른쪽 어깨가 갈라지며 피 분수가 일었다.
단목우현 역시 기나긴 체공을 끝낸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직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창백해진 안색으로 입안에 고인 피를 내뱉었다.
“…어떤가. 이제는 내가 조금 더 유리한 것 같은데”
하지만 그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아주 조금의 차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찰나의 그 간격에 주호는 서늘한 안광을 내뿜었다.
단목우현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장본인인 주호가 제일 체감하고 있는 이야기였으니.
‘아마 완숙의 차이겠지.’
서로 간의 경지는 같다.
다른 점이라면 근래 급진적으로 경지를 올린 자신에 반해 단목우현은 천천히 오랜 시간을 겪으며 그 자리에 섰다는 것일 터.
“이거 참. 가벼운 마음에 나온 것이거늘.”
단목우현이 한숨 섞인 말을 내뱉으며 내기를 다스리자, 주호 역시 혈도를 짚어 상처를 살폈다.
하필 검을 쥔 오른쪽 어깨를 당했기에 불편함이 작지 않았다.
그렇기에 검을 왼손으로 옮기자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단목우현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왼손으로 괜찮겠는가?”
고수 간의 싸움에선 작은 요소 하나가 승패를 갈랐다.
하수를 상대로라면 왼손이 아니라 왼발로 검을 들어도 상대할 수 있겠으나, 동수를 상대로 이렇게 된다면 그 결과는 정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괜찮겠냐고?”
하지만 주호는 웃음을 터트렸다.
비동 안에서의 싸움은 항상 제 상태였던 적이 없었다.
좌수 우수 정도야 문제라고도 할 수 없었고, 팔 한 짝만 남아 있어도 감지덕지한 경우도 허다했으니. 상태창은 그를 그렇게 편히 수련시키지 않았다.
파아아앗-!
주호의 전신에서 이전보다 더 강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폭발적인 힘에 다시 주위가 휩쓸리며 터져 나갔고, 단목우현은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섬짓하군.”
조금 전까지 자신과 격렬하게 싸워놓고 또 이런 힘이 남아 있단 말인가.
흔히 칠주야를 싸우거나, 며칠 밤낮 동안 손속을 나눠 동수를 이뤘다고 하지만, 그건 모두 초월경에 이른 고수들의 이야기였다.
아직 인간의 몸이란 한계를 가지고 있는 그들로선 자신이 품고 있는 내공으로 싸우는 것이 한계.
단목우현은 이때까지 큰 초식을 남발했기에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주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여전히 거침이 없는 것이니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
스윽-.
주호의 검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비동에 있던 수백 년 전의 영약을 독식한바. 동수의 고수와 비교하자면 못해도 오할은 더 많은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에야말로 마무리를 짓기 위해 나섰다.
“생사결을 할 마음까진 없었는데 말이지.”
죽이지 못하는 역경은 성장을 가져다준다고 하던가.
거친 야수 같았던 그의 기운이 점차 날카롭게 벼려지는 것을 느낀 단목우현은 얼굴을 굳혔다.
‘…이건 물러나서 태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겠군,’
하지만 주호는 자신을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
두 눈에 넘실거리는 푸른 귀화와 투지를 보니 먹잇감을 사냥하는 사냥개처럼 끝까지 달려들어 이쪽의 목을 물어뜯을 기세였다.
“쯧.”
단목우현은 혀를 차며 검을 들었다.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양패구상이 될 경우 그 이후의 일이 문제였다.
“전부 멈추어라!”
쉬이이익-!
그때 그들 주위로 수십의 인원이 쇄도했다.
순식간에 사방을 둘러싼 그들은 주호와 단목우현을 향해 거친 기세를 쏟아냈으며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한다면 단숨에 들이닥칠 모습이었다.
“무림맹의 버러지들인가.”
단목우현은 입가를 비틀며 고개를 들었다.
멈추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검을 들었고, 이내 무인들이 집약된 곳으로 몸을 날렸다.
“어딜-!”
주호 역시 곧바로 땅을 박찼다.
그러곤 힘껏 검을 휘둘렀으나, 등 뒤로 무림맹의 무인들을 등지고 있던 단목우현의 움직임 때문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쐐애애액-!
핏빛 강기가 폭풍처럼 쇄도했다.
휘말린 무림맹의 무인들은 종잇장처럼 갈가리 찢겨 나갔고 피 분수가 일었다.
단목우현은 그 위로 가볍게 발을 박차며 몸을 돌렸고, 가늘어진 시선과 함께 짙은 조소로 작별을 고했다.
“오늘은 상황이 좋질 못하군. 다음을 기약하지.”
놓칠 생각이 없던 주호도 뒤를 따르려 했으나, 그 주위에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혈향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발을 멈추었다.
“일부는 도주자를 쫓는다!”
무림맹의 고수들이 뒤이어 몸을 날렸다.
단목우현의 뒤를 쫓으려 하는 듯 보였지만, 서로 간의 실력 차가 큰바.
이미 저 멀리 사라져버린 그의 흔적을 따라가기엔 요원한 일로 보였다.
척.
남은 무림맹 고수들이 모두 주호를 경계하며 천천히 그 주위를 포위해왔다.
철벅거리는 핏물 위에서 주호는 검을 거두었고,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정천학관의 사급 교관인 주호라 합니다.”
“…정천의 교관이라고?”
“그렇습니다.”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에 있는 적익(赤翼)의 문양을 보니 무림맹의 정예 조직 중 주작단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일류를 뛰어넘었고 그 단주로 보이는 이는 절정의 고수였지만, 단목우현이나 사신문 쪽에 비하면 손색이 있어 보이는 전력이었다.
주작단주 진무혁은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주호가 건넨 신분패를 받아들었다.
‘…패는 진품이군. 허나 학관의 사급 교관 중 이 정도의 고수가 있었다고?’
그는 내심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직 이립도 되지 않은 나이에 자신보다 아득히 위의 경지가 아닌가.
주호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나 싶어 기억을 되새겼지만, 근래 들어본 신진고수 중에는 없었으니 아리송할 따름이었다.
“정천의 교관이라 할지라도 절차에 따라야 하는 법이오. 더욱이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진무혁은 그 주위를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얼마나 거친 싸움이었는지 청화루는 물론 주변 건물에도 그 여파가 번져 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어 보이지만, 쉬이 볼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따르지요.”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무림맹과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더욱이 가장 든든한 뒷배가 그곳의 수장이지 않은가.
“…….”
무림맹의 고수들과 함께 자리를 떠나던 주호는 서늘한 눈으로 조금 전까지 단목우현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다음엔 놓치지 않으마.’
싸움이 계속되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나이대에 이런 성취를 얻은 자는 없었지만, 주호는 자만하는 마음을 버렸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았다.
그러니 고작 현재에 만족하며 머무를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