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서걱.
마지막 괴한을 베어내는 것을 끝으로 남궁연은 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내원으로 가는 길목에 잠복하고 있던 것이 모두 열두 명. 고수는 아니었으나, 각자 날카로운 살기를 품고 있는 것이 낭인으로 보이는 자들이었다.
설사 그녀 정도의 경지라 할지라도 방심하거나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대였다.
하지만 남궁연의 검에 망설임 따윈 담겨 있지 않았다.
일말의 자비 없이 휘둘러진 검은 기어코 그들 모두를 베어냈고, 그 끝에 다다랐음에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날이 발전하는구나.”
그 모습을 전부 뒤에서 지켜보던 주호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흠잡을 곳이 없었다.
단호한 손속, 흔들리지 않는 중심,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까지.
위천강이나 천후를 제외한 다른 후기지수들을 이 자리에 데려놓았다고 하더라도 이토록 깔끔하고 빠르게 적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을까.
“제 기감에 걸리는 것인 이자들뿐이네요.”
“들어가도록 하지.”
촌각이라곤 하나 이곳에 발이 묶인바. 하지만 주호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직 격렬히 싸우고 있군.’
내부에서 느껴지는 기운들이 아직 거세게 충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밀리는 상황은 아닌 듯해 보였기에 일부러 발걸음에 여유를 둔 것이었다.
“저곳인가.”
이미 몇 명의 인원이 그 앞에 서서 안쪽을 둘러싸고 있었다.
상태창을 확인하니 청화루의 소속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사흉수의 끄나풀이라는 이야기였다.
쉭-!
주호의 신형이 앞으로 쇄도했다. 그들이 아차 하며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지척에 이른 뒤였다.
털썩.
그들은 일말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내렸다. 정보를 얻어내야 하기에 목숨을 취하지 않았지만, 당분간은 깨어나지 못할 터였다.
“…저자는!”
그 직후 내원 안쪽을 바라보던 남궁연의 두 눈이 커졌다.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긴 주호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녀석들이 뒷걸음치다가 제대로 꼬리를 밟은 것 같군.”
안휘에서 그들을 습격했던 남진이 거센 기세를 피워 올리며 후기지수들과 싸우고 있었다.
“…….”
남궁연은 이를 악물며 검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그때의 상처를 회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상태가 아닌 듯 보였다.
지금 장내의 상황은 한 치의 밀림 없는 백중지세. 그 가운데 자신이 난입한다면 균형의 추는 순식간에 이쪽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
척.
“조금만 더 지켜보자꾸나.”
하지만 주호는 그녀의 개입을 막았다. 어째서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주호의 얼굴에는 그 해답이 나와 있었다.
‘저들의 성장을 확인하고 싶으신 건가.’
자신이 그러하듯, 저들 역시 주호 밑에서 배우는 제자였다. 그러니 그들이 어디까지 싸울 수 있는 것인지 보고 싶은 것일 터.
“…….”
주호는 팔짱을 낀 채 깊어진 눈으로 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바라보았다.
천후는 강맹했고 위천강은 패도적이었다. 선우연은 유려했으며 악비산은 저돌적이었다. 당천유는 날렵했고 철대환은 묵직했다.
각자의 특성과 개성이 그 움직임을 따라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곧 그들의 실력이 무르익었다는 소리였으니.
고작 몇 개월간의 가르침이었지만, 괄목할만한 제자들의 성장세에 주호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저 녀석 쪽이군.’
주호는 살짝 찌푸린 눈으로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남진은 분명 만신창이가 되었다.
단전은 부서졌고 전신의 근육은 파열되었으며 팔다리의 힘줄까지 끊어졌었다.
자신이 직접 행한 일이기에 똑똑히 알고 있다. 대라 신선이 와도 회생시키기엔 힘들었을 것이다.
‘사흉수 쪽은 인지를 초월한 사술을 부린다더니.’
싸움은 곧 절정에 이르렀다.
남진뿐만 아니라 사흉수 쪽의 고수들까지 닥쳐와 가세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일행 중 가장 무공이 뛰어난 천후와 위천강이 합심해 남진의 발을 묶었지만, 수적 열세에서 오는 격차에 하염없이 구석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슬슬 끝을 보지.”
남진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곤 제 앞에 자리한 후기지수들을 보며 말했다.
“잘 막아보아라. 누구 한 명은 반드시 죽을 테니.”
쐐애애액-!
거친 파공성이 귀청을 찢었다. 그 직후 휘둘러지는 검에는 그 말이 지켜지고도 차고 넘칠 힘이 담겨 있었다.
“…내가 막겠소.”
위천강은 검을 다잡았다.
그간의 정 때문이 아니었다. 오직 신교의 이름을 사칭하는 이들을 단죄하고자 그 앞에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격돌하기 직전.
파아아앗-!
시퍼런 섬광이 솟구쳤다.
“……!”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양측 다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내려앉은 사내가 한 명 있었으니.
“교관님!”
“교관님?!”
주호의 등장에 후기지수들이 반색하며 그를 반겼다.
“…네놈.”
그와 반대로 남진의 얼굴은 형편없이 구겨지며 이를 갈았다.
“남궁 소저도 함께 왔구려.”
“어쩌나, 이쪽이 더 빨리 온 것 같군.”
선우연이 입구 쪽에 서 있던 남궁연을 발견한 순간, 위천강은 씩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남진 역시 비틀린 미소를 지어왔으니.
“글쎄, 그건 어떨까.”
파바바박-!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수십의 인원이 일시에 남진의 뒤로 들이닥쳤다.
“…어.”
위천강은 주춤하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 한 명 한 명이 예사롭지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신교의 정예 고수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기에 당황하는 마음이 컸다.
‘진짜 신교의 마인들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으니.
저벅.
장내에 내려앉은 침묵 가운데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괴한들의 사이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대주.”
“…대주. 직접 오셨습니까.”
남진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쪽엔 혼란을 틈타 도주했던 청화루주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예의 그 청룡과 목록에 있는 후기지수들입니다.”
“흠.”
남자는 가늘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중 주호와 시선이 맞았다.
[상태창]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이름: 단목우현
별호: -
직업: 은영혈귀대 대주
나이: 서른넷
소속: 혈천신교
무공: 낙성십이검
경지: 초절정(四/十)
호감도: 下中
‘…이건.’
상태창에 떠오른 정보를 읽은 주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단목의 성씨에 낙성십이검을 익혔다면 최소 단목 세가의 직계라는 것일 터. 하지만 그는 지금껏 단목우현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 교관님 저희도 더 없습니까?”
“다른 교관님들이라든지…….”
주호의 뒤쪽에 있던 선우연과 당천유가 식은땀을 흘리며 물어왔다.
당연한 질문이었다.
단목우현의 기세만 하더라도 주호와 비교해 한 치의 밀림이 없었다. 그것으로 끝난다면 괜찮았겠으나, 그 뒤에 자리한 수십의 고수는 쉬이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서둘러 처리한다. 무림맹에서 슬슬 냄새를 맡기 시작했을 테니.”
“존명.”
잠시간 주호를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던 단목우현이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은영혈귀대 고수들의 기세가 당장이라도 이쪽에 쇄도할 듯 날카롭게 변했다.
“누가 누굴 처리한다고?”
주호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쉬이익-!
그러자 이쪽 역시 마찬가지로 수십의 고수들이 일시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 한 명 한 명의 기세가 은영혈귀대 고수와 비교해서 부족함이 없었다.
“…아!”
천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선우연이나 악비산, 당천유나 철대환은 모두 두 눈을 크게 뜬 채 감탄을 토해냈다.
“…….”
오직 단 한 명.
위천강만이 가늘어진 눈으로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이전에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그는 특정한 조직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거늘.’
장각을 필두로 한 사신문의 고수들이 거친 기세를 피워 올리며 은영혈귀대와 맞섰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분위기.
누군가 그 가운데 돌이라도 던진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갈 터였다.
“…이미 꼬리가 붙었었나.”
단목우현의 말에 남진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상대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이쪽의 전력을 드러냈으니, 그것만큼의 실책이 없었다.
“수정하지. 물러난다.”
단목우현은 망설임 없이 제 명령을 철회했다.
서로 전력 차이는 비등비등한바. 단숨에 제압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후퇴를 선택했다.
“누구 마음대로?”
파아앗-!
주호의 신형이 기습적으로 쇄도했다. 남진이 아차 하며 그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주호의 검은 그보다 더 빨리 허공을 베어 갈랐다.
캉-!
거센 광음과 함께 샛노란 불똥이 피어올랐다. 단목우현은 제 지척에 이른 주호의 검을 어렵지 않게 막아내었다.
“…….”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맞댄 검 뒤로 시뻘건 핏빛이 서린 그의 두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이 나고 있었으니.
“전원 후퇴하도록.”
말과는 달리 그의 전신에선 거센 투지가 일어났다.
남진은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동시에 은영혈귀대의 고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희 쪽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직접적인 충돌은 지양하되, 흔적만 쫓도록 하시오.
-존명.
귓가에 들려온 장각의 전음에 대답해준 주호는 여전히 자신과 검을 맞대고 있던 단목우현을 바라보았다.
“너는 후퇴하지 않는 건가?”
수하들이 전부 떠났음에도 그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의 수확이라도 건져야 체면이 살지 않겠나.”
단목우현의 시선이 주호 너머 그 뒤에 있던 후기지수들로 향했다.
“…감히.”
자신을 안중에 두지 않는 그 태도에 주호는 두 눈을 싸늘하게 떴다.
쾅-!
서로의 검기가 충돌하며 거친 폭발이 일어났다. 주위에 있던 전각은 폭풍이라도 맞은 듯 갈려 나갔고, 이내 처참한 모습으로 무너져 내렸다.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남궁연의 주도에 따라 후기지수들도 자리를 떠났다.
이제 장내에 남은 것은 그들 둘뿐이었다.
“아쉽게도 체면을 세우지 못하게 됐군.”
“글쎄, 청룡의 목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럴 실력은 될까 모르겠군.”
주호는 이죽거리며 검을 들었다.
그는 단목우현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청룡신검 위로 푸른 귀화를 가득 피워 올리며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파아아앗-!
눈부신 푸른 섬광이 그 주위를 휩쓸었다. 일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내원의 건물이 하나씩 무너져 내렸고, 종래엔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게 되었으니.
탁.
곧 폐허가 된 내원을 벗어난 그들은 청화루 건물 지붕에 내려앉았다.
이미 주위에선 그 싸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아나는 사람들로 소란스럽다.
“…….”
하지만 둘은 온전히 서로에게만 집중한 상태였다.
핏-.
구름이 달을 가림과 동시에 서로의 신형이 사라졌다.
선공을 가한 것은 주호였다.
청룡신검이 가볍게 휘둘러지자 수 줄기의 검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와 허공을 찢어발겼다.
단목우현은 이미 허공으로 뛰어오른바. 제 발밑을 스치고 지나간 섬뜩한 감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 검에 서린 핏빛 혈기가 폭발적인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흡-!”
마치 거센 해일과도 같은 격류에 청화루의 일부가 날아가며 주호를 휩쓸어왔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미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휘말리게 되었다.
“…후.”
그렇기에 주호는 가볍게 숨을 내뱉은 채 청룡신검을 들었다.
청룡검식(靑龍劍式)
현검(絃劍), 흐름의 검
힘엔 힘으로.
거센 해일의 격류는 그보다 더 큰 폭풍에 짓눌려 가라앉게 되었다.
“과연 청룡의 무공이로군.”
단목우현은 그저 두 눈을 크게 뜬 채 감탄을 내뱉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