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남진은 예전의 그 무지막지한 존재감만큼은 아니었으나, 명백히 고수의 기세가 느껴졌다.
“이거 귀찮게 됐는데.”
한쪽 눈을 찌푸린 것은 남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산공독을 썼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 최소한 제 상태는 아닐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망설이면서도 나섰던 것인데 척 보아도 산공독은커녕 술에 취한 기색도 없이 전의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루주.”
남진은 슬쩍 자신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청화루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다시피 아직 내 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다. 조금 정도는 홀로 버틸 수는 있으니 조직에 비상을 알리고 이곳으로 고수를 보내도록. 제일 첫 번째는 당신의 안전이다.
“당신…….”
귓가를 울리는 그 전음에 청화루주는 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반하지는 말고.”
“이 시국까지 실없기는.”
하지만 남진은 씩 미소 지으며 농을 던졌다. 그녀 역시 피식 웃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뒤로 달아났다.
“어딜!”
선우연이 매화 검법을 펼치며 그 뒤를 매섭게 쫓았으나 남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캉-!
귓가를 울리는 고성에 기루 곳곳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누군가는 칼부림이 났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청화루에서 일하는 무사들은 불청객을 배제하기 위해 쿵쾅거리며 원흉을 찾아 나섰다.
“자, 누구 쪽의 지원이 먼저 도착할까.”
남진은 사뭇 여유로운 태도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청화루주가 빠져나간 이상 머지않아 이쪽의 고수들이 도착할 터.
설사 패퇴한다고 하여도 청화루는 하부 조직 중 한 곳에 불과했기에 별 타격은 없었다.
“…….”
그와 반대로 후기지수들의 얼굴이 굳었다. 이번 일은 그들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내린 일. 상대의 지원이 먼저 도착한다면 낭패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아니, 괜찮소. 이쪽도 일찍이 지원을 불렀으니.”
“정말이오?”
자신감이 가득 찬 천후의 말에 앞에 있던 선우연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사이 어떻게 누굴 부를 틈이 있었단 말인가. 그러자 무언가를 눈치챈 철대환이 나지막하게 탄성을 터트렸다.
“돌아오기 전의 이야기로군.”
“그렇소.”
천후는 대책 없이 이들과 함께 일을 벌인 것이 아니었다.
이곳이 사흉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먼저 사신문의 대원이 확인할 수 있도록 창밖으로 표식을 내걸어 두었다.
두 시진에 한 번씩 대원들이 확인하는 것이었으니 슬슬 신호가 들어갔을 터.
사흉수와 관련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표식인 만큼 사신문의 하남 지부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해올 것이다.
‘다만…….’
현재 하남 지부의 책임자는 주작 천우희. 그의 스승이었다.
사흉수의 끄나풀을 발견한 것은 분명 큰 공적이지만, 그 과정이 기루에서 기녀들과 술자리를 중에서였다는 것을 알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심히 걱정되기도 했다.
“이쪽의 지원이 온다면 승산은?”
“패배할 이유가 없소.”
천후는 제 스승을 믿었다.
근래 주호의 등장으로 그 위명이 조금 가려졌다곤 하나, 주작의 이름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
‘눈앞의 이 자 따위는 순식간에 해치울 터.’
천후 정도 되는 이의 호언장담이었다. 제일 앞쪽에 있던 위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검을 다잡았다.
“그렇다면 물러날 이유가 없지.”
그는 가늘어진 눈으로 남진을 바라보았다.
하남에 돌아오는 즉시 신교에 연락을 넣어 안휘에서 남궁세가를 대상으로 작전을 진행한 적이 있는지 알아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 주원인이 제 발로 나타나 주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본래의 무위라면 내가 밀렸겠지만.’
이전과 달리 느껴지는 기세는 초일류의 상위에 불과했다. 여전히 자신보다 조금 더 윗선에 불과했지만, 천마신공의 절기를 발휘하면 그 정도 격차를 매울 수 있을 터.
그렇게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채 거친 사투를 벌여나갔다.
***
술자리를 끝낸 후 주호는 남궁연을 학관의 숙소까지 데려다 줄 요량으로 밤거리를 거닐었다.
이미 시각이 깊었건만 하남의 시내는 북적스럽기 그지없다. 술에 취한 이들이 고성을 지르며 여기저기 걸어 다녔고, 홍등가에선 밤손님을 불러 모으기 위해 기녀들이 고혹적인 자태를 뿜었다.
“…남자들은 역시 저런 것에 관심이 많나요?”
그 옆을 지나던 중 남궁연은 슬쩍 주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
주호는 침묵을 지켰다.
어째서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인지도 묻지 않았다. 그저 이전에도 그랬듯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툭.
남궁연은 그런 주호의 옆으로 바짝 몸을 붙여왔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많았으나, 서로 밀착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주호가 살짝 거리를 벌리려 찰나 남궁연은 조심스레 그의 소매를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교관님에게 저는 그저 관생일 뿐인가요?”
주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역시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전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킬 찰나, 남궁연이 자리에 멈춰 선 것을 보았다.
툭, 투둑.
그녀의 발치로 응어리진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자신의 소매를 잡아 온 손길엔 힘이 들어갔고, 주호 역시 덩달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많이 취했구나.”
“네 많이 취했어요. 그래서 묻는 거예요.”
서로가 취하지 않았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궁연의 태도에 망설임이 없는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대답을 듣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주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음은 무거웠고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닥이 잡히지 않았으며 그 시선은 이내 갈피를 잃었다.
“…….”
남궁연은 오롯이 주호만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돌린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눈동자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있었다.
이윽고 주호가 다시 말을 이으려고 할 찰나.
척.
등 뒤로 다가서는 기척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대는 명백히 자신의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즉, 이쪽에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일 터.
“누구시오.”
주호는 남궁연의 앞을 가리며 물었다. 그러자 다가온 사내는 가볍게 포권을 올리며 인사했다.
“이거, 주대협 아니십니까. 이런 곳에서 뵙고.”
-청룡께 인사드립니다. 하남 지부 소속의 장각이라 합니다.
이야기와 동시에 들려온 전음에 주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던 남궁연을 향해 눈짓했다.
“이쪽의 협력자니 숨길 필요는 없소.”
“그러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다름이 아니라 천공자 쪽에서부터 자색 표식이 걸렸습니다. 장소는 청화루로 천공자는 동문인 후기지수들과 함께 아직 그 안에 있는 듯합니다.”
“자색 표식이라.”
그 이야기에 주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색 표식이 걸렸다는 것은 사흉수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뜻했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천후 스스로 기루에 가지 않았을 터니 위천강이나 다른 후기지수들과 함께 있다는 것일 터.
“…무슨 이야기인가요?”
남궁연은 둘 사이 오간 이야기가 심상치 않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대충 대화가 정리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끝에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 널 습격했던 무리와 천후 일행이 충돌한 것 같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우연일 가능성이 크겠지.”
“혹시 주작께서 어디 계시는지 아십니까. 하남 지부장을 맡고 계신 터라 이쪽의 보고를 해야 하기에…….”
“되었소. 이쪽에서 직접 나서지. 그보다 후속 조치는?”
남궁세가 쪽과 사신수로서 이야기를 텄다지만, 천우희의 정체까지 노출시키는 것은 그리 좋은 판단이 아닌 듯 보였다.
장각 역시 그것을 눈치챘는지 천우희에 대한 언급을 삼갔고, 주호의 질문에 대답했다.
“현재 문의 고수들이 은밀하게 청화루를 포위하고 있습니다만, 이대로 소란이 번지면 무림맹에서 개입할 우려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까이 있는 만큼 그들의 이목 역시 예민한지라.”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감시하도록 해주시오. 나머지는 이쪽에서 처리할 테니.”
“알겠습니다.”
장각은 주호의 명령을 처리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주호 역시 발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당연하게 자신을 따라오려 하던 남궁연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따라오지 말라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말려도 듣지 않겠지.”
어차피 장소도 노출된바. 여기서 떼어놓고 간다고 하여도 금세 따라잡을 것이 분명했다.
‘그럴 바엔 동행하는 것이 낫겠지.’
괜히 독단적으로 움직이다가 사흉수 쪽에 휘말리게 되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이 없었다.
“서두르겠다. 놓치지 말도록.”
파밧-!
주호는 훌쩍 몸을 날려 건물의 지붕 위로 올랐다.
뒤이어 남궁연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곤 그대로 가볍게 자리를 박차 청화루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탁.
그렇게 이각 정도 달려갔을까, 둘의 신형은 거의 동시에 청화루가 있는 길의 앞으로 내려섰다.
“흠.”
주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청화루 안쪽의 기척을 가늠했다. 겉은 평상시와 다름없지만, 내원 쪽은 부산스러운 것이 무언가 사건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면사를 착용하도록.”
주호는 먼저 남궁연에게 면사를 착용케 했다. 그러곤 청화루의 입구로 발걸음을 옮기자, 장정 두 명이 그 앞을 막아섰다.
“오늘 영업은 끝났습니다.”
“내일 다시 오시지요.”
“안쪽에 일행이 있다. 합석하기 위해 온 것인데.”
“…….”
두 장정은 난처하단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안쪽의 소란으로 오늘 손님은 그만 받으라는 지시였다.
그렇기에 출입을 막은 것이지만, 주호의 모습은 척 봐도 범상치 않은 내력을 지닌 듯하지 않은가.
“고민이 많아 보이는군. 내 편하게 해주지.”
핏-.
주호의 손이 가볍게 휘둘러졌다.
두 줄기의 지풍이 빛살처럼 그들의 요혈을 강타했고, 두 장정은 소리 없이 쓰러져 내렸다.
“들어가지.”
“…네.”
입구를 지나니 더는 막아서는 이들이 없었다. 그렇기에 주호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내원으로 가는 길목으로 향했다.
“…익숙하신 발걸음이네요?”
“몇 년 전까지는 자주 왔었다.”
그 말에 남궁연의 두 눈이 가늘어지며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기루를 자주 왔다는 말에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빈말로라도 아니었다고 해줬으면 했지만, 그러한 배려는 없었다.
“앞으로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럴 생각이다.”
비동을 나온 직후 주호는 그러한 것에서 관심을 끊었다.
여성과의 관계도 천우희의 건만 아니라면 아예 생각하지도 않은 채 무공에만 집중했을 터.
“…….”
내원으로 향하는 길 앞에서 주호는 돌연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옆에 있던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느껴지느냐.”
“느껴집니다.”
내원으로 향하는 길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작은 연못과 우거진 수풀, 그리고 푸른 이파리가 잔뜩 달린 작은 나무까지 자리해 마치 별천지에 온 듯한 모습을 보였으니.
스릉-.
남궁연은 천천히 검을 뽑아들며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양옆에서 수 명의 인원이 솟구치며 그들을 향해 거친 살기를 뿜어왔다.
“나는 나서지 않을 생각이다. 네가 앞장서도록.”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오늘 하루, 남궁연은 쌓인 것이 많았다.
그렇기에 표독스러운 얼굴로 검을 쥐었다.
그녀의 검은, 평소보다 한층 더 단호하고 날카로워질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