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밤이 깊어가는 와중, 청화루의 복도를 걷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곡현은 청화루의 삼 년 차 무사로 평소라면 주말을 앞두고 걸린 당직에 인상을 쓰고 다녔을 테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신이 난 얼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말 놈들입니까?”
“그렇다니까, 나 못 믿냐?”
곡현의 뒤로 미심쩍은 얼굴을 한 열 명의 무사들이 뒤따라왔다.
그들 역시 표면상으로는 모두 청화루의 소속이었으나, 사실은 혈천신교 하남 지부의 하부 조직 중 말단에 자리한 자들이었다.
‘멍청한 자식들. 내게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의심하는 시선이라니.’
곡현은 그들의 미적거리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들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산공독과 술에 거나하게 취해있을 테니 가서 거들기만 하면 된다. 얼마나 쉬운 일이냐.”
“…알겠습니다.”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그 대답을 흘려넘기며 곡현은 자신의 행운을 실감했다.
청화루를 발견한 그들이 조직 내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정말로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일전에 상사의 심부름을 하던 중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종이 몇 장을 볼 수 있었다.
혈천신교에서 내려온 인명록이었는데, 후기지수 쪽은 출신도 출신일뿐더러 모두 그 외모가 훤칠해서 눈여겨 봐두었다.
그리고 오늘 청화루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 와중 눈앞에서 웃으며 걸어가는 사내들의 모습이 어딘가 닮은 부분이 있었으니.
그때부터 곡현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상부에 보고해버린다면 시간도 처리하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자신의 공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사로잡는다면?
물론 정면 싸움에선 승산이 희박했다.
조금 높이 올려치더라도 자신은 흔히 널린 삼류 무인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이었으니.
‘그래, 그게 있었지.’
그때 곡현의 머릿속을 스친 것이 바로 조직 창고에 보관된 산공독이었다.
꽤 고급 품목으로 일 년 치 월봉 값은 가볍게 넘는다고 들었다.
다행히 그는 관리 명목으로 창고를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어차피 양도 적지 않았고, 한동안 누가 확인한 적도 없으니 들킬 가능성은 적을 터.
그렇기에 기녀들을 돈으로 매수하고 적당한 때를 노려 산공독을 타게 시켰다.
안전에 안전을 기하기 위해 예정된 시간보다 더 뜸을 들였고, 평소 자신을 따르는 패거리를 데리고 후기지수들이 자리하고 있는 방의 앞까지 당도했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하는 법이 아닌가.
그렇기에 곡현은 장지문을 두드리곤 헤픈 웃음과 함께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이고, 대협들. 부족한 것은…….”
자신이 사주한 기녀들이 없었다.
단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버린 여섯 명의 후기지수가 자리하고 있을 뿐.
‘뭔가 잘못됐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낀 그의 머리가 재빠르게 회전하며 뭔가 말을 내뱉을 찰나, 그들 가운데 제일 수려하게 생긴 남자가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내 분명 우리끼리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가라고 했거늘.”
“…아, 죄송합니다. 혹시 뭔가 불편한 것이 있었을까 봐.”
“그런 것은 없으니까 되었다.”
위천강은 얼른 나가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곡현은 오히려 눈을 빛내며 품에 손을 넣어 술 한 병을 꺼냈다.
“혹시나 무례를 범했을까 싶어 사죄의 의미로 명주를 가져왔는데…….”
“…명주?”
귀찮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던 위천강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그렇기에 곡현은 냉큼 그 앞으로 달려가 술병을 기울였다.
졸졸졸.
술잔에 술이 가득 담겼다. 곡현은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고, 의도적으로 술잔을 툭 건드렸다.
“어, 어엇?”
위천강이 허공에 몇 번이고 헛손질하며 술잔을 놓쳤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다들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곡현은 그제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산공독이 확실히 통했구나!’
쨍그랑-!
그는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술병을 거꾸로 들어 위천강의 머리를 내리쳤다.
“동작 그만, 이 개새끼들아-!”
위천강은 그대로 고꾸라져 바닥에 쓰러졌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른 이들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저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으니.
그 외침을 기점으로 곡현의 수하들이 장지문을 부수며 방안에 난입했다.
“이놈들이……!”
선우연이 시뻘게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무사의 발길질이 더 빨랐다.
쿠당탕탕-!
선우연은 술상을 엎으며 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다른 이들 역시 황급히 일어나 싸울 준비를 했지만, 무사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매타작을 하자 제 무기를 뽑지도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얻어맞는 신세가 되었다.
“으하하하하하!”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에 곡현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이름 높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속한 후기지수들도 별수가 없지 않은가.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누군가 구타당하는 와중에도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곡현은 마치 자신이 고수라도 된 것처럼 일갈을 내질렀다.
“닥쳐라! 범의 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밀었으면, 응당 목이 잘릴 각오는 했어야지!”
“오오, 역시 형님입니다!”
이때까지 미심쩍은 태도로 곡현을 따라온 그들이 감탄하는 모습을 보였다.
“…….”
물론, 위천강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은 모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따름이었다.
***
청화루의 내원.
혈천신교의 하부 조직이 활동하는 공간으로, 외부인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뜻하지 않은 불청객이 몇 명이나 그 안에 방문하게 되었다.
우당탕탕!
“크헉!”
딱딱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천후를 비롯한 후기지수들은 신음을 토해냈다.
“…이놈들은 뭐냐?”
일련의 소란 때문에 상황을 보러온 곡현의 상사가 장내의 모습을 보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해냈습니다.”
곡현은 그 앞에서 자랑스럽게 손을 떨쳤다.
굴비처럼 줄줄이 묶인 여섯 명의 후기지수,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신의 수하들까지.
“그러니까 뭘.”
“이놈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
소란을 피우고, 조직 내부로 외부자까지 데려온 것치고 너무나도 당당한 모습인 곡현의 태도에 상사는 이 새끼가 무언가 잘못 먹은 것이 아닌지 심히 고민했다.
그러던 중 곡현의 손짓을 따라 선우연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고, 이내 그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화산의 소신룡?”
“예, 그놈들입니다. 마침 기루로 왔기에 제가 산공독을 써서 잡았습니다.”
“산공독? 너 이 새끼, 창고의 것을. 그렇다고 이곳으로 데려와?”
“상황이 시급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
상사는 고민에 잠겼다.
일류 고수인 저들이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사로잡힌 것을 보니 정말로 산공독이 제대로 먹힌 것일 터.
생각지도 못한 큰 공이지 않은가. 이 보고가 상부에 올라가면 큰 보상을 받거나 승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루주님께 직접 보고하러 가마. 그때까지 단단히 붙들어놓도록 하고. 아마 곧바로 확인하러 올 것이다.”
“염려 붙들어 매십쇼. 적어도 하루 동안은 일말의 내공도 사용하지 못할 겁니다.”
“창고의 무단 사용 건은 나중에 나와 직접 이야길 하지.”
“이의가 있겠습니까.”
자신감에 찬 곡현의 태도에 상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흐흐흐, 루주께서 무어라 하실까.”
청화루주라 하면은 이곳 청화루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성이지 않은가. 곧 그녀를 보게 된다는 사실에 곡현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들을 사로잡은 공으로 무엇을 요구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던 찰나, 그는 어느새 주위가 조용해진 것을 깨달았다.
“네놈들, 설마 조는 건…….”
곡현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근래 그들이 너무 기어오르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렇기에 따끔하게 기강을 잡으려 한 것이었지만, 그를 반기는 것은 바닥에 쓰러져 게거품을 물고 있던 수하들이었다.
“쯧, 얼굴에 상처가 났군.”
“아직 본가에서 가져온 금창약이 많이 남아있소. 그거라면 흉터도 남지 않을 테지.”
조금 전까지 바닥에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하던 사내들이 옷에 먼지를 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네, 네놈들 어떻게…….”
“닥쳐라. 그렇게 떠들면 이렇게 구르며 잡혀 온 이유가 없어지지 않느냐?”
‘산공독이 통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멀쩡한 상태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왜 순순히 잡혀주었는가.
“무,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협들 제가 위쪽엔 잘 설명할 테니…….”
정면 대결에선 승산이 없기에 곡현이 창백해진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우드득.
하지만 위천강은 싸늘한 얼굴로 일말의 자비 없이 그 목을 꺾어버렸다.
그러곤 한쪽에 보관된 자신들의 병장기를 집어 들곤 제 주인들에게로 돌려주었다.
“…정말로 마교였군.”
선우연이 제 검을 집어 들며 인상을 썼다.
“누가 알았겠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나저나, 아까 놈들의 대화로 생각해보자면 루주까지 녀석들의 연결고리가 분명하겠군.”
“심상치 않은 고수가 나타날 수도 있소.”
“그거 잘 되었네. 마침 새로운 창술을 익혀서 시험해보고 싶었거든.”
악비산이 씩 웃으며 제 창을 쓰다듬었다.
남궁세가의 일로 그들 모두 자신의 무공에 진일보했다. 그에 든든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감을 내뿜었다.
다만, 위천강만이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후기지수들을 사로잡았다고?”
“예,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지금 내원 쪽에 잡아두었으니 바로 가시면 될 듯합니다.”
청화루주와 남진은 정천학관으로 돌아온 청룡에 대해 어찌할지 의견을 나누고 있던 와중이었다.
칠이 지나면 다음 학기가 되고 정천학관의 활동이 재개된다.
이번 분기는 외부활동이 주류가 되는 시기였다. 그러는 만큼 자신들이 개입할 요소가 점점 더 늘어났기에 그것을 기반으로 작전을 구상하고 있던 차.
그러던 중 들려온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원래 목표였던 남궁제일미는 물 건너갔지만, 정말로 그들을 사로잡았다면 이쪽 작업이 수월해질 수도 있어요. 잘만 한다면 청룡을 끌어낼 수 있을지도.”
“저들의 함정일 가능성은?”
“배제하진 못하겠지만, 기회를 얻기 위해 대가를 감수해야 하는 법이에요. 어서 내원으로 가보죠.”
남진은 찜찜함이 남은 얼굴로 그들의 뒤를 따라 내원으로 향했다. 곧 문이 열렸고 안으로 들어설 찰나, 느껴진 한줄기 살기에 헛바람을 삼켰다.
‘역시나.’
제 몸이 원래 상태라면 그 공격을 막고 단숨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겠으나, 지금은 신체를 수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청화루주의 몸을 끌어안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푹.
“……컥!”
이곳까지 그들을 안내했던 무인이 시뻘건 도에 꿰뚫려 최후를 맞이했다.
‘아쉽군, 죽지 않았더라면 나를 기만한 대가로 내가 죽이려 했거늘.’
“감히!”
청화루주는 적들이 이곳까지 침투했다는 것에 분개를 토해냈다.
“저놈은…….”
천후가 이를 악물며 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주호가 아니었더라면 자신들은 모두 그곳에서 묻힐 운명이었으니.
“어떻게 살아있지……?”
위천강조차 당황한 얼굴로 제 친우들을 둘러보았다.
남진은 분명 사지 근맥이 잘리고 단전이 파괴당했다. 대라신선이와도 살리지 못할 위중한 상처였으나 상대는 버젓이 멀쩡한 얼굴로 자신들 앞에 서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