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위천강이 크게 한턱내겠다는 이야기에 후기지수들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태도로 자리를 잡았다.
온갖 산해진미가 탁자 위로 차려졌고, 평소 먹기 힘들었던 귀한 술까지 그 옆에 올라왔다.
“오늘 위형 때문에 호강하겠군.”
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어온 당천유의 말에 다른 이들 역시 동감이라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휘에서 이곳으로 돌아오기까지 마른 음식만 먹던 그들에게 있어 눈앞에 차려진 술상은 그야말로 군침을 돋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드르륵.
그때, 장지문이 열리며 고운 차림새의 여성이 몇 명이나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미색이 뛰어난 이들로, 그 수는 후기지수의 숫자와 같았으니.
“하하하, 드디어 왔구나. 내 언제 오는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위천강의 손짓에 따라 그녀는 제각기 후기지수들의 옆으로 자리했다.
“이층을 전부 빌려 놓았다오. 중간에 마음이 맞으면 하룻밤 정도 정을 통하는 것도 괜찮겠지.”
위천강은 은근한 표정으로 제 친우들을 향했다.
각기 출신도, 성향도, 성격도 모두 다르지만, 다 같은 남자가 아니던가.
“으하하하! 이리 오너라! 오늘 한 번 재미지게 놀아보자꾸나!”
악비산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영웅호색이란 당연스레 받드는 호탕한 성격으로 이러한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보다 먼저 스스럼없이 제 옆에 앉은 기녀와 정겹게 술잔을 나누며 자리를 즐겼다.
“공자님.”
“저, 그게…….”
오직 천후만이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머뭇거리기만 했다.
“어머, 순진한 분이시네.”
“잘 모시거라. 학관 내에서도 고수라 소문난 분이시니.”
위천강은 웃음을 터트리며 기녀에게 말했다.
천후는 아니라 말하고 싶었지만, 화장이 진한 여인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부터가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을 뿐이었다.
***
술자리가 이어진 지 벌써 한 시진이나 흘렀다.
후기지수들은 이미 한껏 분위기에 취한바. 천후 역시 점차 적응했고, 분위기에 편승해 이전보단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후.”
다만, 익숙지 않은 자리라 그런 것인지 평상시보다 술이 더 빨리 취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잠시 방을 빠져나와 바람을 쐬었다.
밤은 이미 깊어갔으니, 그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자 한편으로는 주호를 따라간 스승님과 남궁연의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쿡쿡 쑤시기도 했다.
“음.”
어느 정도 술이 깨었기에 다시 방으로 돌아갈 찰나, 천후는 길을 잃었다.
청화루의 규모가 워낙 컸고, 구조가 다 비슷비슷했기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그렇기에 적당히 지나다니는 사람을 찾아 길을 묻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을 때, 저 복도 끝에서 몇 명의 인원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
‘잘 되었군.’
복장을 보니 청화루에서 일하는 이들로 보였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다가갈 찰나, 귓가에 들려온 말소리에 덜컥 발걸음이 멈췄다.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분명 위쪽에서 내려온 수배서에 그려진 얼굴이랑 똑같아.”
“참나, 운도 지지리 없는 놈들이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서는.”
“우리야 좋지 않은가. 유력 세가 후기지수를 한 번에 세 명이나 잡을 수 있다니. 거기에 나머지도 내력이 범상치 않아. 분명 위에서 큰 포상이 내려올 걸세.”
‘…사로잡아? 위? 포상?’
심상치 않은 대화가 그사이를 오갔다.
천후는 진작부터 벽에 붙어선 채 기척을 숨기고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차.
재빨리 내공을 이용해 주기를 배출해냈고, 만약 저들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온다면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게끔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반 각 후.
‘…이 녀석들 설마.’
차 한잔 마실 짧은 시각이었지만, 얻은 정보가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천후는 그들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하남에 자리하고 있는 사흉수의 세력은 대부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늘.’
설사 사흉수의 세력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섬멸에 들어가지 않았다.
세간의 이목을 끌 수 있을뿐더러, 바로 없애버리는 것보단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 이득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는 이들이 있을 줄은. 잘 해봐야 끄나풀 정도인가.’
상부 운운한 것을 보니 사흉수와 직접 연계된 조직은 아닐 터. 그들이 이렇게 허술할 리가 없었다.
꼭대기를 포함한 중추만 그들과 관련된 요인일 것이고, 그 밑에서 일하는 이들은 이곳이 정말로 기루라 믿고 일하는 것일 것이다.
“…빨리 준비나 하러 가게나.”
말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들은 끝내 천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고, 이내 그 기척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잘하면…….’
천후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을 정리했다.
녀석들은 후기지수들이 술에 거나하게 취했을 때를 노려 산공독을 풀 것이라 했다.
아직 일을 벌이기 전이라는 소리니, 그는 서둘러 원래 있던 방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장지문을 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니 여전히 흥겨운 술판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이었다.
“공자님, 소녀 혼자 외로웠답니다.”
“…하하, 그렇소이까.”
천후는 짐짓 눈물을 훔치며 말해오는 기녀의 모습에 작게 웃어주곤 내밀어진 술잔을 받았다.
‘아직인가.’
충분한 대비를 기울인 채 그것을 마셨지만, 독이나 다른 수작을 부린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천후는 잠자코 분위기에 편승하는 태도를 보였으니.
“…….”
모두가 술에 취해 흥이 나는지 목청이 떠나가라 가락을 흥얼거렸다. 여인들은 그것에 호응해주는 척하면서도 이내 저들끼리 시선을 맞췄다.
후기지수들의 신경이 다른 곳으로 팔린 틈을 타 그들 모두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자연스럽게 술잔에 넣었다.
그야말로 한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던 틈이었기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 여겼지만, 그 직후 싸늘한 살기가 내부를 휘어잡았다.
“모두 죽고 싶지 않다면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지 말도록.”
어느새 제 시뻘건 홍령도를 꺼내든 천후가 도신을 까딱이며 날카로운 안광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형?”
갑작스러운 상황에 후기지수들이 당황을 표했다.
“쉿.”
천후는 대답하기보다 먼저 사방을 살폈다.
천장, 밑바닥 할 것 없이 샅샅이 기운을 훑고는 이내 아무도 숨어 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왜, 왜 그러시오?”
“누가 실수라도 했느냐?”
그런 그의 태도에 잠자코 있던 이들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장난이라고 하기에 그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살기는 너무 짙었다. 그렇기에 다들 기녀가 큰 실례를 범한 줄로만 알았지만, 천후는 고개를 젓곤 당천유를 바라보았다.
“당형, 술을 한 모금 드셔보시오.”
“…….”
의미심장한 그 말에 당천유는 얼굴을 굳혔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것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는 신중한 태도로 순순히 술잔을 들었다.
“…….”
이때까지 잠자코 있던 기녀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러면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천후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러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건.”
곧 술잔에 혀를 가져간 당천유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독이다. 그것도 내공을 흐트러뜨리는 종류의 산공독이군. 감히 당가의 무인에게 독을 써?”
당천유의 이가 갈렸다.
진심으로 화가 난 듯 이전까지 훈훈했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이네 소매 끝으로 날카로운 한 자루의 비수가 들렸다.
“진정하시오, 당형. 그들은 아마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겠지. 진짜 흉수는 따로 있소.”
“흉수가 있다고?”
천후의 말에 보통 상황이 아니란 것을 파악한 후기지수들은 동시에 내공으로 주기를 몰아냈다.
그러자 내부가 자욱한 술 냄새로 가득 찼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설명 부탁드리오. 대체 무슨 일이…….”
평소 말수가 적어 조용하던 철대환조차 흉흉한 기세를 뿜어냈으니, 기녀들은 여전히 입도 방긋하지 못한 채 그 몸을 떨어댔다.
“누가 시켰느냐? 그것만 말해준다면 너희들은 해하지 않겠다.”
“저, 저희는 단지 이 가루를 술병에 따르라며 돈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냔 말이냐.”
위천강이 이를 갈며 검을 쥐었다.
이곳에 술자리를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자칫하면 덤터기를 뒤집어쓸 위험이 있었기에 그가 느끼는 분노는 다른 이들보다 더 거센 것이었다.
“이, 이곳에서 일하는 무사 중에 곡현이라는 자가 시켰습니다.”
“저희는 그 말만 따랐을 뿐 정말로……!”
약을 탄 후 어떻게 하려 했냐는 말에 앞으로 반 시진 후에 그들이 이곳에 찾아오기로 했다고 이실직고했다.
“…아까 잠시 바람을 쐬러 갔다가 저들의 이야기를 엿들었소. 안휘 쪽에서의 일을 거론한 것을 보니 아마 마교의 끄나풀이 아닐까 싶더군.”
“그건…….”
위천강의 두 눈이 커졌다.
물론, 하남에도 마교의 지부를 비롯해 여러 조직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신교의 소교주인 자신을 대상으로 수작을 부려올 리가 없지 않은가.
천후로서는 사흉수의 이름을 꺼내지 않기 위해 마교를 거론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던 위천강으로선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소리였으니.
‘아니, 오히려 잘 되었다. 어떤 간 큰놈들이 감히 본교를 사칭하는 것인지 내 손으로 직접 파헤쳐주지.’
천마신교 소교주로서의 체면이 있지 않은가. 반드시 이 간악한 무리를 뿌리째 뽑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면, 이제 어찌할 텐가.”
선우연의 물음에 천후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대로 우리가 물러난다면 저들 역시 낌새를 눈치채고 흔적을 지우겠지.”
“그렇다면…….”
그들의 시선이 한쪽에 모여 있는 기녀들에게로 향했다.
모두가 긴장한 낯빛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 제 잘못을 깨닫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일단 이들 먼저 처리해야겠군.”
“저, 저희는 그저 돈을 받고 시키는 일만 했을 뿐이에요!”
“어쩔 수 없었어요,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끌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니…….”
기녀들은 필사적으로 자신들을 변호했다.
더러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제 처지를 알려오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후기지수 일행에게 있어선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쉭-.
위천강의 손이 가볍게 흩뿌려졌다.
여섯 줄기의 지풍이 기녀들의 맥을 짚었고, 그들은 이내 의식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돈만 받고 했다고 해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일단 일이 끝날 때까지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한쪽에 모아두세.”
그들은 장식으로 세워진 병풍 뒤에 기녀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적어도 누가 발견하기 전까진 깨어나지 못할 터.
“그러면, 여기서 제안이네만.”
손을 툭툭 턴 위천강은 시커먼 흉망이 서린 눈동자로 제 친우들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역으로 이들의 뒤통수를 치는 것은 어떠한가.”
그는 산공독이 타진 술잔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