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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귀환-71화 (71/300)

#71화

주호 일행은 해가 질 때쯤 하남에 들어섰다.

눈앞에 펼쳐진 익숙한 거리의 모습에 이제야 돌아온 것이 실감이 났던 것일까.

며칠 간의 노숙에 지쳐 있던 후기지수들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학기 시작은 사흘 뒤부터군. 모두 고생했다. 쉬는 동안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주호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각자 거처를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던 중 마지막까지 남은 남궁연만이 머뭇거리며 주호에게로 다가왔다.

“교관님, 이 이후로 일정이 있으신가요?”

“아니, 없는…….”

“미안한데, 이 사람은 내가 빌려 갈 거라.”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주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자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를 천우희가 씩 웃으며 그를 반겼다.

“천우희?”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 고생했다며.”

그녀의 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생이란 말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하루 정도는 술을 진탕 마신 뒤 잠자리에 들고 싶을 정도로 마음속의 실타래가 엉켜 있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천 소저.”

“…소저라 불릴 나이는 아니지만. 뭐, 남궁 소저 쪽도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둘은 전과는 다르게 산뜻한 분위기로 인사를 나눴다.

‘한 잔 어때.’

직후, 천우희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마침 자신도 술이 고팠던 차.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찰나, 그 가운데로 남궁연이 끼어들었다.

“저도 합석해도 될까요?”

그녀는 둘 사이에 오고 간 암묵적인 대화를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꺼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지간한 남성보다 주량이 강했기에 적어도 천우희에게 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크나큰 실책이었다.

쿵.

술자리가 시작된 지 한 시진 째.

천우희에게 맞서 쉬지 않고 술잔을 기울이던 남궁연은 곧 한계를 맞이했다.

꾸벅거리던 머리는 이내 탁자에 부딪혔고, 그 이후론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작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만이 또르르 굴러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귀엽네.”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천우희는 손을 뻗어 남궁연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렸다.

“집안도 좋지, 얼굴도 예쁘지. 무공에 재능까지 있다며? 누구랑은 다르게 타고났네, 정말로.”

대상을 지칭하지 않았지만, 주호는 그것이 천우희 자신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술잔을 비우곤 슬쩍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외모는 당신도 타고났다고 생각하는데. 무공도 그만하면 되었고, 집안도 그렇지 않나?”

“…….”

천우희는 설마 주호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듯 살짝 입을 벌렸지만, 이내 쿡쿡 웃으며 비어버린 제 잔을 채웠다.

“소싯적에 여심 좀 훔쳐봤나 봐.”

“적어도 마음먹은 일이 실패한 적은 없었지.”

“어쩐지 너무 능숙하더라.”

천우희는 연거푸 술잔을 비워냈다. 그러곤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주호를 바라보았다.

“이 애랑도 했어?”

“…푸흡.”

그 적나라한 질문엔 아무리 주호라 할지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내뱉고 있을 찰나, 천우희는 다시금 쿡쿡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그 숫총각 같은 반응은.”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이다.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지옥 끝까지 쫓아올 이가 수백, 수천이야.”

“미녀를 얻기 위해선 용기를 내야 하는 법이지. 보아하니 이 아이도 네게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 듯한데.”

“…그러는 당신은 어떻지?”

주호는 술잔을 내리곤 가라앉은 눈으로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서로 정을 통한 사이였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려 해도 지난날들의 기억을 쉽사리 머릿속에서 지울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천우희의 눈동자에 한줄기 망설임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천천히 손을 뻗어 주호의 얼굴로 손을 향했다.

“윽?!”

천우희는 엄지와 검지로 주호의 코를 콱 움켜쥐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내가 까불지 말랬지. 우린 그저 한여름 밤의 그런 관계라고.”

“쯧.”

혀를 한 번 찬 주호는 시큰둥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쳐냈다.

천우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제 손을 거뒀고, 이만 올라가서 자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그 끝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던 주호를 보며 한마디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으니.

“저렇게 예쁜 아이가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데,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줘.”

“…쓸데없는 참견이다.”

주호가 인상을 쓰며 대답하자 천우희는 어깨를 으쓱이곤 발걸음을 옮겼다.

객잔 안에는 둘만 남았다.

밤이 깊어진바.

슬슬 돌아가야 했기에 주호는 탁자에 엎드려 있던 남궁연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거라, 잠들지 않은 것을 알고 있으니.”

“…….”

그녀의 몸이 작게 움찔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흐트러진 제 머리카락을 다시금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남궁연이 정말로 취해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은 주호와 천우희 둘 다 알고 있었다.

특히 천우희 쪽은 그렇기에 일부로 그런 화제를 꺼낸 것이었다.

남궁연은 물 한 잔을 따라 마시곤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여름 밤의 관계인가요.”

“…….”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가 되돌아오자 주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연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피어올라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초조 불안, 실망, 그리고 조금의 기대까지.

“…그렇다면 저희는 무슨 관계인가요?”

단순히 교관과 관생의 사이이냐, 남궁연은 그렇게 물었다.

주호는 고개를 돌려 비어버린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이전까지 적지 않은 여성을 만나왔지만, 이랬던 적은 없었기에 섣불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그녀가 상처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주호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날이 깊었다. 슬슬 일어나자꾸나.”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까지 해왔던 태도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더 나은 결론을 찾아내지는 못했으니.

“…네.”

남궁연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식으로든 원하는 형태의 대답은 아니었으나, 지금 당장 주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녀 자신도 무서웠기에.

“준비하고 나오너라.”

주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주점을 나왔다.

이미 깊은 밤이 내려앉은 거리는 고요했고,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후우.”

쌀쌀한 밤공기가 폐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주호는 이때까지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마음이 맞으면 가까워졌고, 아니라면 멀어질 뿐의 연속. 비록 그것이 오래가지 못하더라도 그런 형태의 관계 말고는 알지 못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현재 그의 관심은 무공에 온전히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구태여 여성을 만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주호는 문득 먼저 자리를 떠난 천우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말로는 애써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부정은 참으로 덧없는 모습이었다.

말로는 자신을 부정했다.

하지만 이쪽에서 조금만 더 강하게 나간다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벽은 간단히 깨어져 나갈 터.

간혹가다 보이는 그 눈동자에 서린 슬픈 기색이 마음에 걸려 차마 깊숙이 파고들지 못하고 있었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열리며 내는 소리에 주호의 상념은 깨어져 나갔다.

면사까지 착용을 끝낸 남궁연이 조용한 걸음걸이로 주점을 나와 그 앞에 섰다.

“가지.”

그런 그녀를 슬쩍 바라본 주호는 이내 앞장서서 학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시간을 되돌려 몇 시진 전.

남궁세가에서 돌아온 후기지수 일행은 제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스승님께선 교관님과 술자린가.”

잠시 뒤에서 주호 쪽을 지켜보던 천후는 살짝 씁쓸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천우희뿐만 아니라 남궁연까지 그곳에 합류하는 것을 보니 입안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은 배가 되었지만,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 피로를 풀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다른 이들과 같이 학관의 숙소로 향한 그는 서둘러 짐을 풀었다.

그러곤 곧바로 씻기 위해 밖으로 나갈 찰나, 문을 두드리는 조용한 손길에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천형.”

“…위천강?”

익숙한 목소리에 문을 열자 천후는 미소를 띤 얼굴로 그 앞에 서 있던 위천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짐은 다 풀었소?”

“막 다 푼 참이오.”

“그러면 기다릴 필요는 없겠군.”

“…무슨 일이라도 있소?”

천후의 물음에 위천강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러곤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발걸음을 재촉했으니.

“자자, 얼른 가도록 하지. 다들 기다리고 있소.”

“…기다려?”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천후는 의문을 표했지만, 위천강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자니.’

그간 겪은 바로 위천강은 평범한 사람과 살짝 동떨어진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쌓인 인연이 있기에 지금은 순순히 그 손길에 따라 나갔고 이내 숙소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선우연, 당천유, 악비산, 철대환 그리고 자신들까지.

남궁연을 제외하고 주호 밑에서 사사 받는 제자들이 그 자리에 전원 모여 있었다.

‘함께 수련이라도 하자는 것인가.’

“천형. 목 빠지게 기다렸소. 얼른 갑시다.”

“으하하, 이게 얼마 만인지.”

“……?”

하지만 수련을 한다기엔 이들의 복장이 지나치게 가벼웠다.

‘마치 어디에 놀러라도 가는 듯한…….’

그리고 천후의 직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기루?”

청화루라 적힌 휘황찬란한 간판을 마주한 천후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동시에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자니, 주범일 것이 분명한 위천강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냐는 얼굴로 헤실헤실 미소를 흘렸다.

“아니, 난 이런 곳은…….”

천후는 아직 이런 방면에 대한 경험이 없다시피 했다.

물론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작년까지 사신문에서 수련만 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자, 무인이라고 쌈박질만 하는 줄 아시오. 다양한 경험을 겪고 또 실전에서 응용할 줄 알아야 고수라 할 수 있는 법!”

“…흠.”

“남자든 여자든 중요하지 않소. 사람이라면 풍류를 알아야 하오. 특히 우리 같은 창창한 나이대에선 즐기지 않으면 손해요. 한 번 저문 꽃은 다시 피어나지 않으니 말이오.”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천후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들었던 것은 청화루 내부에서 슬쩍슬쩍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들이었으니.

‘목적지를 말하지 않고 앞까지 끌고 오길 잘했군.’

그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위천강은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천후의 등을 밀어 넣었다.

“돈은 걱정하지 마시오. 오늘은 내가 남궁세가행이 끝난 기념으로 거하게 한턱낼 테니.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소. 서로 쌓인 피로도 풀고, 친목도 다지니.”

“…그렇다면야.

앞서 말했다시피, 천후 역시 이러한 것들에 흥미가 없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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