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연아!”
남궁연은 바로 옆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아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작금 세가의 그 누가 너의 나이에 그러한 경지를 이루었을까!”
남궁한이 그녀를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그는 세가의 배신자로 인해 생겨난 전력의 공백을 메우고 각 조직의 수장들을 불러 다독이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찰나, 남궁연과 남궁선의 설전이 있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누가 잘못이 있다고 특정하긴 어려웠지만, 남궁선의 말도 일리가 있기에 한숨을 내쉬며 딸을 다독이러 오던 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교관과 함께 비무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비무가 아니었다. 숫제 검무라 해도 될 정도로 유려했으며 아름다웠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남궁한은 내심 흡족했다. 딸아이의 마음은 짐작했다.
제 목숨보다 귀히 여기는 그녀를 내어주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지만, 남녀 간의 정은 아비라 할지라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둘의 대련을 바라보던 남궁한은 딸이 어느새 저러한 경지에 이르렀는지 감탄이 들었다.
정천학관의 수석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실력이지 않은가.
‘안타깝구나, 네가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아니, 그렇게 된다면 귀여운 딸아이가 없어지니 안 될 소린가.’
시답지 않은 생각이나 하며 둘의 비무를 구경할 찰나, 생각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큼.”
비무에 열중해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한 번 헛기침해서 제 존재를 알렸지만, 그 직후 남궁연을 가리키며 조용히 하라는 주호의 손짓에 머쓱한 얼굴로 입을 다물게 되었으니.
‘이건…….’
하지만 그 이후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남궁한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탈각의 현장이었다.
흔히 말하는 입신지경의 경지는 아니었지만, 남궁연은 분명 자신을 가두고 있는 껍질을 부쉈고 좀 더 높이 도약할 준비를 끝냈다.
그 성취를 눈앞에서 지켜본 남궁한은 지금껏 고생했던 피로가 한 번에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고생했다, 딸아.”
이때까지 얼마나 고생하고, 고심했을까.
그렇기에 그저 온몸으로 기특한 제 아이를 강하게 안아줄 뿐이었다.
***
이름: 남궁연
별호: 안휘제일미, 검화(劍花)
나이: 스물
소속: 남궁세가
무공: 창궁무애검법
경지: 초일류(二/十)
잠재력: 上上
호감도: 上上
감탄이 나올 정도의 성장세였다.
남궁연이 초일류에 오른 지 사흘째. 그녀는 그동안 습득했던 깨달음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경지가 한 단계 더 상승했고 이제는 자신을 아래로 두던 후기지수들과 나란히 설 수 있을 날이 머지않게 되었다.
“합!”
주호는 자신과 대련뿐만 아니라 후기지수들끼리의 비무도 시행시켰다.
다들 엇비슷한 실력이기에 깨닫는 게 많아졌고 무공을 굳건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정천학관의 이학기 개관이 보름이 조금 넘게 남은 날짜까지 다가왔다.
주호 일행은 다시 학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꾸렸고, 잠시나마 정들었던 남궁세가를 뒤로 했다.
“아쉽군, 이제야 좀 편해졌는데.”
푹신한 잠자리를 놔두고 이제 며칠 동안 허허벌판에서 노숙해야 하는 신세가 되자 선우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후기지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관을 앞두고 있으니 학관으로 돌아가야 하긴 했지만, 그때까지의 노숙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그런 풍족한 환경에서 보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말도록.”
그런 그들의 모습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삼 년이란 세월을 비동 안에 갇혀 이끼와 이슬로 지새운 그에겐 제자들의 투정이 철없이 보일 뿐이었다.
탁 트인 공간으로 나와 저 하늘과 태양, 그리고 신선한 공기와 시원한 물을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비동을 나온 것이 반년이 지남에도 주호는 아직 그때의 처절했던 기억을 잊은 적이 없었다.
‘다시 하라면 죽어도 못하겠지만 말이야.’
누가 미쳤다고 자신을 비동에 삼 년이나 가두겠는가.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잡념을 털어버리며 일행들을 재촉했다.
남들의 이목도 있기에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이른 새벽에 출발을 예정했다.
콧김을 내뿜은 말들이 곧 앞으로 달려갔고 세 대의 마차는 다시 제가 왔던 곳으로 방향을 돌렸다.
‘호위는, 섬뢰단 전부인가?’
익숙한 기운 수십 명이 주위에 모습을 감춘 채 마차를 쫓아오고 있었다.
섬뢰단주인 남궁찬이 배신자로 지목된 와중 다시금 그들이 남궁연의 호위를 맡는 것은 섬뢰단의 기를 살려줌과 동시에 남궁한의 배포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호는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미 상태창으로 배신자를 솎아냈고, 어지간한 고수가 적으로 온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선에서 충분히 상대해낼 수 있었다.
꽈아악.
사신문 이후로 곱절이나 증가한 힘이 제 안에서 꿈틀거렸다.
딱 한 가지 불안한 것은 혈기가 백회까지 다다랐을 때 뿜어져 나왔던 그 충동적인 살기였다.
그때의 자신을 남이 본다면 마공을 익혔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무언가의 심마(心魔)인가.’
분명 그러한 것들은 비동을 나올 때 떨쳐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망량환혼진을 겪은 이후 새로이 생겨난 것인지 그저 마음만 무거워질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나요?”
창밖으로 휙휙 바뀌어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남궁연이 그에게 물어왔다.
주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
하남 청화루.
하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규모의 기루였다.
온갖 아름다운 기녀들이 모여 있고 그 꽃 향에 취한 벌레들이 사시사철을 가리지 않고 기어들어 왔다.
청화루는 보통의 기루가 그러하듯 밤늦게 문을 열고 동이 트기 전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문이 닫히기 직전, 예정되지 않은 불청객이 그곳에 방문했다.
보통이라면 가차 없이 문전박대당했겠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청화루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해지는 여인인 청화루주가 손수 나서서 방문객을 자신의 거처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 모습을 두고 청화루의 사람들은 방문객의 내력이 심상치 않을 것이라며 수군거렸다.
어디의 유명한 고수라니, 아니면 황족과 관련이 있다느니.
다만, 아쉽게도 그 소문은 모두 틀린 것이었다.
“청룡이라.”
청화루주는 자신 앞에 누워 초주검이 된 사내를 바라보며 흥미로운 눈길을 보냈다.
“좀 더 자세히 말해주지 않겠나요.”
“그 전에 혈환(血丸) 먼저 주지 않겠나. 단전이 부서지고 사지 근맥이 끊어져서 숨쉬기도 괴롭군.”
남진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은 청화루주는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더니, 바닥을 조작해 작은 목함을 꺼냈다.
“은형혈귀대 부대주께선 제게 은혜를 입었음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뭣 하면 몸으로도 갚아줄 수 있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입이나 벌리시지요.”
청화루주는 곧 목함에서 단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시뻘건 것이 꼭 피에 담갔다 꺼낸 것 같았지만, 향은 상서롭기 그지없었다.
청화루주는 그것을 남진의 입에 넣고는 목의 혈을 눌러 그것을 삼키게 했다.
스르륵.
혈환은 신기하게도 남진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물이 되어 목으로 흘러들어 갔다.
“……!”
촌각이 지난 후,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남진의 몸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휘기 시작했다.
급기야 경련이 일어나더니 뼈와 근육이 쪼개지기까지 했으니.
뿌드득. 뿌드득.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청화루주는 그저 옅은 미소와 함께 그 모습이 마치 재미난 구경거리인 것처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후우.”
남진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눈을 떴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거슬리기 그지없다. 그렇기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기랄, 두 번 다시는 이 짓거리를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건만.”
“그렇다고 평생 불구로 살 건 아니잖아요?”
“그럴 바엔 자결하고 말지.”
그는 얼굴을 뒤덮은 땀을 쓸어냈다.
흥건해진 손바닥을 허공에 털고는, 깊은 한숨과 함께 겨우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청룡 이야기 좀 해봐요. 삼백 년 만의 등장 아닌가요?”
그녀의 독촉에 남진은 마실 것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청화루주는 밖에 있던 시종에게 시켜 술을 가져왔고, 그는 그 자리에서 세 병이나 비워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궁기께선 분명 절정 수준이라고 했지.”
“네, 당신이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하셨죠.”
“그 정보는 잘못되었다. 절정은 무슨, 최소한 초절정이었지.”
“그 정도인가요?”
“그래, 반항도 못 하고 나가떨어졌으니까.”
“은형혈귀대의 위명이 우네요.”
“끌고 갔던 놈들은 다 죽었으니까 울만도 하지. 나도 원래 무위로 돌아가려면 한동안은 회복에 힘써야 한다.”
“뭐, 그런 녀석들에게 혈환을 쓰는 것도 아까우니 말이죠. 소모품은 다시 만들면 그만이니.”
소매로 입가를 가린 채 웃던 청화루주는 이내 웃음을 지웠다. 그러곤 진지한 눈으로 남진을 바라보았다.
“작업은 거의 끝마쳤다는 소문이에요. 사도맹은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고 마교 역시 중진 몇몇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어요. 다만, 무림맹을 비롯한 정도 문파는 아직도 조금 버벅거리더군요. 특히 남궁세가에선 이번 일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됐다는 정보에요. 아마 청룡의 소행이겠죠.”
“쯧, 문책이 있겠군.”
“그래도 소기의 성과는 달성했으니까 그리 걱정하진 말아요.”
혀를 한 번 찬 남진은 그녀가 준비해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래서 다음 일정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글쎄, 아마 무림맹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남진은 긴 한숨과 함께 남은 술병을 마저 들이켰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청룡의 목을 베러 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실력으론 무리였으니.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마.’
그의 목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는 자신을 제외하고도 수없이 많았다. 슬쩍 이야기를 흘리면 모두 눈이 뒤집혀 벌떼같이 몰려갈 터.
“기다리는 시간은 아마 그리 길지 않을 테지.”
남진은 그때가 너무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