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주호와 남궁연은 그 이후에도 천천히 저잣거리를 둘러보았다.
안휘의 중심지인 만큼 번화가의 규모는 다른 곳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크기였다.
길은 한참을 걸어도 끝나지 않았고, 둘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계속 구경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슬슬 날이 저물어갈 즈음이 되었을 때.
“저기도 한 번 가볼까요?”
마지막으로 그녀가 가리킨 곳은 고급스러운 옷감을 파는 포목점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형형색색의 비단이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십쇼!”
주인장은 오래간만에 오는 손님에 힘찬 인사와 함께 달려나갔다.
“아, 아가씨가 아니십니까!”
“오랜만이에요, 양 노인.”
“아이고, 미리 기별을 주셨다면 더 좋은 물건들로 준비를 해놓았을 텐데. 그래,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한 번 둘러보려고 왔어요. 잠깐 구경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하십시오. 소인은 저 옆에 있겠습니다.”
양 노인이라 불린 노인은 남궁연에게 말하면서도 슬쩍 주호를 살폈다.
외모도 수려하고 풍채도 건장한 것이 어디 높은 집의 귀공자처럼 보였다.
‘혹, 아가씨의…….’
“양 노인, 이것 좀 봐주실 수 있으신가요?”
“역시 아가씹니다. 탁월하신 안목이시군요.”
양 노인은 보지도 않고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냈다.
남궁연이 집어 든 것은 연한 청색의 비단이었다.
그 위로 금색의 자수로 푸른 용이 새겨져 있는 것이 한눈에 보아도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이걸로 무복을 제작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사흘, 아니 이틀만 주십시오. 아가씨께 어울리는 무복으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입을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둘의 시선이 주호에게로 향했다.
“무복 말이더냐.”
갑작스레 무복을 제작한다는 말에 그는 살짝 당황했다.
보답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으로 끝내려 했건만, 예정에도 없는 선물을 받게 생겼다.
“난 괜찮다. 무복이야 여벌이 있으니.”
“이제 곧 이름을 날리실 분인데요. 이런 무복 한 벌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그녀의 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 비단은 고급스럽기 짝이 없다. 일순간 그의 마음이 혹할 정도로. 잠시간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양 노인은 그의 신장 정보를 기록하고 이틀 뒤에 완성품을 세가로 보내겠노라 말했다.
“굳이 해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괜찮아요, 이게 성의 아닌가요.”
하늘이 어두워졌기에 그들인 이만 세가로 발걸음을 돌렸다.
막, 정문을 넘어가니 한 무리의 인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가씨!”
“…좌호법?”
“도대체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들의 숨넘어갈 듯한 모습에 남궁연은 혹시 또 세가에 무슨 일이 있던 것은 아닌지 놀란 마음이 들었다.
세가의 배신자들을 색출해낸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미처 파악하지 못한 잔당이 있었고, 그들이 무슨 일을 벌였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니.
“아가씨께서 없어지신 것이 무슨 일입니다! 저희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아십니까!”
남궁선의 말을 입증하듯 그 뒤에 있던 무사들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그녀가 세가를 나간 직후부터 소란을 피운 것이라면 적어도 몇 시진은 지난 것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전 분명 오늘 주 교관님과 외출한다고 가주께 말씀드렸는…….”
“시국이 시국인지라 세가의 요인에게는 호위의 숫자를 늘리기로 했습니다. 이미 전례가 있으신 아가씨께서는 더더욱 엄중한 호위를 받으셔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 없이 행동하시다니요!”
남궁연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지만, 남궁선이 말을 자르고 답답한 듯이 외쳤다.
하지만 그 태도는 명백히 무례한바. 남궁연은 슬쩍 아미를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저를 위해 고생하신 것은 잘 알겠어요. 그에 대해선 죄송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호법의 이런 행동은 옳지 못해요.”
“아가씨, 아가씨야말로 세가의 직계로서 자각이 부족하신 겁니다. 이런 시국에 한가롭게 나들이나 나가시다니요.”
“무슨…….”
남궁연은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듭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남궁선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가주께선 평시와 같이 행동하라고 지침을 내리셨어요. 더군다나 혼자 나간 것도 아니고 교관님과 동행한 것이고요.”
“아무리 학관의 교관이라고 하더라도 세가의 외인입니다! 그리 깊은 관계가…….”
“좌호법. 당장 그 말 취소하도록 하세요. 세가가 큰 은혜를 입은 은인이십니다. 저와 가주님의 손님으로 오신 분을 모욕하는 것은 곧 남궁 세가를 모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남궁의 이름에 먹칠할 생각인가요?”
날 선 남궁연의 말에 그는 일순간 흠칫했다. 그리곤 순순히 실수를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건에 대해서는 사죄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나…….”
둘이 설전을 벌이는 사이에서 머쓱한 얼굴로 껴있던 주호는 문득 남궁 세가의 무사들 틈으로 자리한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
선우연을 비롯한 정천학관의 관생들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후.”
대화는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남궁연이 어떻게든 설명하려 해보지만, 남궁선은 귀가 꽉 막힌 듯 거듭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녀가 나간 것은 나 때문이오. 그리고 언쟁은 그만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군. 주위에 보는 눈이 많으니.”
주호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남궁연과 남궁선은 그 말에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단 세가의 무인뿐만 아니라 식솔들까지 불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란이 끝난 것이 바로 전날의 일이다. 구태여 또 다른 일을 벌일 필요는 없기에 그들은 입을 닫았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엇.”
남궁연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그녀의 손에 소매를 붙잡힌 주호는 헛바람을 내뱉으며 끌려갔고, 남아 있는 이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사라져가는 둘을 바라보았다.
“…….”
선우연은 조심스레 그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천후가 그의 어깨를 잡곤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실수한 듯하네.”
그것은 남궁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마음이었다.
***
남궁연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숨기지 못하며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그 표정이 얼마나 사나웠던지 평소라면 가볍게 고개를 숙여왔을 세인들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한달음에 거처로 돌아온 그녀는 거친 숨을 들이 내쉬었다.
“진정하거라.”
“…….”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제야 자신이 주호를 끌고 왔음을 깨달았지만, 그녀는 소매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교관님께서도 제가 미덥지 않으신가요?”
무림에서 여성이라는 점이 갖는 한계는 명확하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것을 깨부수고 싶었다.
피나는 노력과 수련. 세가의 어지간한 후기지수를 뛰어넘는 땀을 흘렸고 그에 맞는 경지를 이루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결국 안휘제일미라는 바라지도 않던 허명이었다.
‘이깟 겉가죽이 무엇이기에… 차라리 추녀로 태어났더라면 무인으로 보일 수 있었을까. 아니,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복받쳐 오르는 서러움에 새어 나오던 눈물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러자 그녀의 귓가에 담담한 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검을 들어라.”
“……?”
남궁연이 새빨개진 눈가로 의문을 품은 채 고개를 들자, 주호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무인은 검으로 말하는 법이지. 증명해보아라. 네가 미덥지 않다는 것이 헛된 소리임을.”
“…알겠어요.”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린 뒤 눈가를 훔쳤다. 그러곤 다시 강인한 눈으로 제 검에 손을 가져갔다.
챙-!
시원할 정도의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혀 나온다. 주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원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나뭇가지를 꺾었다.
“…검을 드시지 않으시나요?”
당신마저도 나를 무시하느냐는 듯한 말투에 주호는 나뭇가지를 흔들어 보였다.
“이것이 무엇으로 보이느냐.”
“…네?”
남궁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의문이었지만, 곧 그 눈은 크게 뜨였다.
‘이건…….’
분명 주호는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을 터. 하지만 어느새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잘 벼려낸 시퍼런 장검이었다.
금방이라도 제 몸을 벨 것 같은 살기에 남궁연은 입술을 깨물며 검을 다잡았다.
주호와 대련했을 때마다 항상 태산을 마주하는 듯했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우웅-
남궁연은 한 번에 모든 것을 쏟아붓기 위해 전력을 끌어올렸다.
주호와의 대련은 대강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뒤를 생각하다간 한 호흡도 버틸 수 없다. 그저 순간순간 휘두를 수 있는 최고의 검을 해내야 겨우겨우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큰 차이점이었다.
위천강이나 천후를 비롯한 후기지수들은 호흡이나 분배에 신경 쓰느라 매 순간에 여력을 남겼다.
하지만 남궁연은 뒤를 생각하지 않았고, 지금 휘두르는 것이 마지막 검이 될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항상 그 앞에 섰다.
‘이미 껍질을 부술 준비는 되어 있다. 무엇을 망설이느냐?’
주호는 그녀의 그런 점을 크게 평가했다.
자신의 밑에서 사사 받는 후기지수 중 상대적으로는 경지가 얕지만, 그 탄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즉, 검술에 대한 이해도가 터무니없이 깊다는 것. 만약 자신과 비슷한 경지까지 올라온다면 주호는 감히 그녀의 검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흡!”
시퍼런 검기가 몇 줄기나 맹렬하게 쇄도했다.
요 반년 동안 수십 번은 보아온 창궁무애검법의 검로에 주호는 익숙하게 대응해갔다.
하지만 그녀의 공세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웅웅웅-
조금 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파공성이 남궁연의 검 끝에서 터져 나왔다.
그 본질을 어렵지 않게 꿰뚫어 본 주호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창궁무애검법이지만, 창궁무애검법이 아니다.’
창궁무애검법의 요지는 드넓은 하늘을 지향하는 것. 하지만 그녀의 검은 하늘을 보면서도 대해의 깊이를 품고 있었다.
마치…….
‘마치 내 검을 보는 것 같군.’
몇 번 보지 않았을 터인데 용케도 자신의 검에 녹여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견하다고 생각되는 한편, 제대로 알려준다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까지 했다.
샤아아악-!
주호는 제 검을 맹렬히 흔들었다.
화산의 산검(散劍)과 같은 형태로 갈라진 검들이 남궁연의 검기를 베어갔다.
으득.
하나둘씩 부서져 가는 자신의 검기를 보며 남궁연은 이를 악물었다.
평소라면 이즈음에서 패배를 인정하곤 하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마음은 혼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기에 내려가던 검에 다시금 힘을 넣고 땅을 박찼다.
스스로 무엇을 하였는지도 몰랐다.
그저 머리를 비우고 몸의 중심을 검으로 옮긴 채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어릴 적부터 익혀 온 창궁무애검법의 정수가 검 끝에서 피어올랐다.
단순히 초식을 펼치는 것만으로는 상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남궁연은 자신의 검을 바로 세우며 창궁무애검법의 구결이 끊임없이 뇌리에 반복했다.
어릴 적부터 받은 심득과 가르침을 다시금 되새겼고,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잊었다.
마치 맹인이 서투른 손놀림으로 땅을 더듬으며 어두컴컴한 길 위로 발걸음을 내디디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아.”
돌연 남궁연은 두 눈을 크게 뜨였다.
자신을 막아선 주호의 검은 그저 이쪽과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그 위로 부드럽게 등을 떠밀고 있었다.
남궁연은 흥분을 억누르며 그 위에 검을 실었다. 어느새 두려움은 사라졌고, 천천히 그 흐름에 편승했다.
어느 순간 자신과 검의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검이었으며, 검이 자신이었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였다.
동시에 남궁연은 그 끝에 다다라 창궁무애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었다.
하늘의 드넓음을 흉내만 내던 검이 이제야 진정으로 하늘을 품었다.
그것이야말로 창궁무애(蒼穹無涯)였으니.
하지만 남궁연의 재능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역사가 깃든 무공은 세월이 흐를수록 선조들의 손에 정리되어 누가 익혀도 익숙해질 수 있도록 고쳐져 왔다.
그 이야긴 즉, 완성을 바라보는 시점에선 군더더기가 많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곧바로 정형화된 틀을 부수고 새로운 검로를 개척했다.
토대가 되는 것은 스무 해 동안 쌓아온 경험과 가르침들. 그것으로 기반을 다지고, 새로이 궤적을 그려냈다.
하나의 무공을 재정립할 수 있다는 것.
즉, 대종사의 기질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서걱-.
“…아.”
남궁연은 자신을 감싸고 있던 껍질을 부쉈다.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던 먹구름이 일순간 걷히며 찬란한 하늘이 드러났다.
찰나라 할 수 있을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휘둘러왔던 검이 품고 있던 본질을 전신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제법이구나.”
영원 같았던 찰나, 찰나 같았던 영원은 주호의 한 마디에 깨어지고 말았다.
툭.
남궁연이 정신을 차리자 제일 먼저 눈앞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검에 베여 반 토막 난 나뭇가지였다.
반듯하게 베인 단면이 허공에 드러난 그 반쪽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녔다.
“…검이.”
“그것은 내 심상으로 구현해낸 것이다. 본질은 나뭇가지지만, 너는 그것을 검으로 인식했지. 지금까지는 그러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다르겠구나.”
그 차이는 아주 크다며 주호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껍질을 부수고 다음 경지로 나아간 소감이 어떠하냐.”
“아.”
주호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남궁연은 감격에 찬 얼굴로 숨을 뱉어냈다.
조금 전에 느꼈던 그 황홀경은 꿈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으로 이뤄낸 것이며 자신의 노력이 내디딘 발자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