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쿵-!
세찬 돌풍이 닥쳐와 주위가 자욱한 먼지로 뒤덮였다.
누군가 검을 휘둘러 그것을 걷어내자 곧 대회랑 한쪽 벽에 처박혀 쓰러져 있는 남궁찬의 모습이 드러냈다.
“…쿨럭.”
시뻘건 선혈을 내뱉으면서도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 앞에 선 존재를 향해 말했다.
“구경만 하던 것은 끝낸 것이오?”
“찬아.”
남궁한은 깊은 한숨과 함께 수하였던 자의 이름을 불렀다.
“어찌하여 네가.”
현재 남궁세가의 단주를 비롯한 간부들은 남궁한이 직접 손수 뽑아 자리에 세웠다.
조직의 근간이 되는 이들이었기에 깊은 관계를 맺어왔고 그들의 충심을 의심할 날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무엇이 그리 불만이었느냐. 남궁의 이름으로는 네 마음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부족했던 것이냐.”
“가주는, 당신은 아마 모를 것이오. 우리가 무슨 마음으로 지금까지 보내왔는지.”
남궁한은 가슴이 아팠다.
그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남궁찬은 고작 이런 일로 눈에 핏발을 세우는 소인배가 아니었다.
의인이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사려가 깊고 정기가 맑았으며, 지혜롭기 그지없었으니.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무엇인가. 온몸에서 마기(魔氣)를 뿜어내는 것이 대천산의 마귀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연이의 정보를 적들에게 팔아넘겼느냐?”
검을 쥔 그의 손에 푸른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예순이 넘은 나이였지만, 분노는 그의 세월을 잊게 했다.
“필요한 일이었소. 지금의 남궁이 어찌 본 모습이라 할 수 있겠소. 이럴 바엔 차라리 부서져 없어지는 것이 나을 것이오.”
“되었다. 네 생각은 잘 알았으니 이제 세가의 가주로서 단죄해주마.”
주호는 자신 앞에 선 남궁한의 넓은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입안이 씁쓸해졌다. 평생을 가족과 같이 지내 온 수하가 배신한다면 무슨 심정이 들까.
“오라, 그간의 정으로 네 목은 직접 베어주도록 하마.”
그 말에 남궁찬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생명을 불태워 일시적으로 얻은 힘이라지만, 그에게 질 것 같지 않았다.
실제로 조금 전의 공격도 조금의 상처뿐으로 버텨내지 않았는가.
“가주가 저승길의 길동무해준다면 나름 심심하지 않겠소.”
“아쉽게도 아직 할 일이 많은 몸인지라 가서 조금 기다리도록 하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땅을 박찼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빛살과도 같은 속도에 모두가 헛바람을 내뱉었지만, 남궁한은 담담한 눈으로 자신에게 쇄도해오는 검과 마주했다.
쿵-!
검과 검이 부딪혔다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할 둔중한 소리가 사위에 울렸다.
귀청을 울리는 공명에 근처에 있던 무인들은 뒤로 훌쩍 물러나 거리를 벌렸고, 다들 긴장한 기색으로 그 경합을 바라보았다.
“아버님…….”
주호의 옆에 선 남궁연이 초조한 얼굴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바라보았다.
용호상박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싸움이었다.
세가의 가주인 남궁한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와 맞서 싸우는 남궁찬의 신위가 믿지 못할 정도로 눈부신 것이었으니.
일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시커먼 마기의 편린과 푸르른 뇌전의 조각이 허공에 아스러진다. 주호는 그런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네 아버지는 강하다.”
무공은 차분히 쌓아 올린 것에서 강함을 발휘하는 법.
비록 주호도 기연을 얻어 무황의 힘을 얻었다지만, 그 이면엔 피나는 노력이 자리했다.
‘더욱이 그의 힘은 겨우 이 정도가 아니다.’
남궁한은 입신지경이라 불리는 신화경의 경지를 넘어선 고수였다.
아마 일순간에 남궁찬의 목을 베어낼 수 있을 터. 그러지 않는 것은 그간의 정과 안타까운 마음에서 오는 망설임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남궁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단환 하나를 먹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힘이 강해졌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희생했다는 것을 뜻했다.
주호는 이 싸움의 끝이 그리 길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되었다.
보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시커먼 강기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검을 휘두르던 남궁찬의 몸이 돌연 움찔하며 허리가 꺾였다.
“…우웩.”
그러곤 시커먼 무언가가 섞인 사혈(死血)을 토해내곤 숨을 헐떡거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으니.
한계에 다다른 것인지 온몸을 뒤덮었던 굵직한 핏줄 역시 그 끝에서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역천의 대가를 받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소. 아쉽게도 가주를 길동무로 삼는 것은 예상했던 대로 어려울 것 같군.”
남궁찬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억울한 것은 없었다. 처음 세가를 등지며 언젠가 올 때라 생각했고 죽음은 이미 각오한 일이었으니.
‘다만 아쉬운 것은.’
옛 시절 눈부셨던 자신의 모습을 더는 추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쓰러지고 만다면 세가를 배신했다는 꼬리표가 따라붙을 터.
시신은 변변찮은 무덤도 없이 들판에 버려져 들짐승들에게 뜯어 먹힐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후회하느니 뉘우치고 있느니 꼴사납게 그런 모습을 보일 생각은 없소. 하지만……!”
그는 마지막 남은 불꽃을 끌어모았다.
남궁한 역시 끝을 내기 위해 검을 들었지만, 남궁찬은 그보다 빨리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펑-!
“독?!”
시커먼 연무가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멀찍이 물러난 상태였기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가까이 있던 남궁한은 온전히 그것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같잖은.”
웅웅-.
시퍼런 호신강기가 그의 전신을 물샐틈없이 감쌌다.
시커먼 독무는 그 틈을 비집어 파고들려 했지만, 정순한 내공으로 만들어진 호신강기는 그것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그쪽을 향해 의식이 쏠린바.
그렇기에 남궁한은 그 찰나의 순간 남궁찬이 필살의 일념을 담아 쏘아낸 검을 막아내지 못했다.
쐐애애애액-!
거친 파공성이 순식간에 허공을 갈랐다. 남궁한이 아차 하며 몸을 돌렸지만, 이미 검은 그의 곁을 지나친 뒤였다.
“……!”
남궁연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검은 선이었다.
‘윽……!’
황급히 검을 뽑아 조금이라도 빗겨내려 했지만, 반응이 너무 늦은바.
제 생명을 불태우던 남궁찬이 제 모든 것을 담아내어 필살의 일념으로 쏘아낸 검이었다.
어지간한 고수라 할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근처에 있던 제왕단주와 세가의 좌호법인 남궁선이 헛바람을 내뱉으며 검을 들었으나, 지척에 이른 마기는 남궁연을 삼켜갔다.
쐐애애애액-!
시커먼 마기가 자신을 뒤덮기 직전, 남궁연은 돌연 옆에서 터져 나오는 눈부신 빛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남궁찬이 쏘아 보낸 검에서 피어오르는 시커먼 마기와는 대조적으로 이글거리는 새하얀 빛이 주호의 검을 뒤덮고 있었다.
일순간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한 짧은 찰나에 이루어진 발검. 그 직후 한 줄기 빛이 마기를 양단했다.
서걱.
침묵에 잠긴 장내에 바닥에 떨어진 반 토막 난 한 자루의 검이 내는 소음만이 울려 퍼졌다.
제 딸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남궁한은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남궁찬의 목을 베었고, 그것으로 배신자의 색출은 일단락되었다.
***
대회랑에서 있었던 일은 철저하게 함구 되었다.
작금엔 조금 주춤했지만, 천하제일세가로도 불렸던 곳에서 일어난 변절. 그것도 섬뢰단주라는 고위 간부까지 엮였다는 사실이 퍼진다면 큰 파장이 있을 터다.
물론, 언제까지 감출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일이 모두 수습될 때까지는 가능한 한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에게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하라는 지침이 떨어졌고, 다들 각자의 임무를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자네에겐 정말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군.”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정정하던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십수 년은 늙은 듯했다.
“지금은 그저 마음을 추스르십시오. 심(心)이 시들면 기와 체도 상하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그래, 그래야지.”
남궁한은 거듭 마른세수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제야 좀 과거의 충격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이젠 배신자들에 의해 세가가 출렁거렸다.
모두 자신의 부덕함 때문이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늘어질 수는 없는 노릇, 자신이 불안해한다면 세가에 있는 수천의 사람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외세에 흔들릴 터다.
“지금은 사람들을 다잡아야 할 때겠군. 고맙네, 이 건에 대한 감사는 추후에 충분히 하도록 하겠네.”
“…감사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배신자를 처리하고 그들이 맡고 있던 직무를 넘기는 등 이제부터 남궁한이 가주로서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그렇기에 주호는 더는 시간을 잡아먹지 않고자 자리에서 일어났고, 밖에서 기다리던 남궁연이 그 옆으로 따라붙었다.
“교관님께는 감사할 일밖에 없네요.”
“감사를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지만, 이번 일은 겸손을 떨기엔 조금 크군.”
주호의 말에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가끔가다 정말 엉뚱하신 것 같아요. 하긴 그렇죠, 저를 세 번이나 구해주셨으니.”
“그렇지, 세 번이나 구해줬는데 단순한 인사치레로 끝내려는 것은 아니겠지?”
“…예?”
“설마 대남궁세가의 아가씨께서 구명지은의 은혜를 그저 말로만 끝낼 생각이셨던가.”
장난식으로 말해오는 주호의 말투에 남궁연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남궁세가에 끼친 은혜가 적지 않다.
아니, 어떤 사람이 개인으로서 그 정도의 은혜를 쌓을 수 있을까.
“무엇을 원하시나요?”
“흠.”
그 물음에 주호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잠겼다.
돈이나 재화를 원하는 것은 풍취가 없었다.
무엇을 말할까 싶어 그는 무심코 남궁연을 바라보자 갓 내린 눈처럼 새하얗던 그녀의 뺨이 조금씩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잠시 기분전환이나 할까.”
“네?”
이 각 후, 밖으로 나갈 채비를 마친 그들은 세가를 나섰다.
“정말 그것으로 되겠어요?”
면사를 쓴 남궁연이 옆에선 주호에게 물었다.
그가 원한 것은 단순히 저잣거리를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남궁연은 주호가 원한다면 재화나 보검이라도 내어줄 용의가 있었다. 자신의 권한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것들이었으니.
‘아니면, 세가에 들어온다거나.’
주호 정도의 고수라면 모두가 두 팔을 벌려 환영할 것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되면 이름은 남궁호가 되려나.’
썩 괜찮은 이름이라 생각하며 그녀는 주호와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세가에서 벌어진 소란이 거짓말처럼 밖의 일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아이들은 활기찬 얼굴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
남궁연은 그런 이들을 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아직 자신들의 손엔 세가의 배신자를 처분하느라 묻은 피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느긋한 태도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마치 조금 전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표정이 너무 굳었구나. 모처럼 나온 나들이인데.”
“아…….”
언제 사온 것인지, 주호는 남궁연의 머리에 매화 무늬가 새겨진 삿갓을 덮어주었다.
면사를 썼다곤 하지만, 거추장스러운 것이 불편할 터.
하지만 삿갓을 썼다면 굳이 면사를 달 필요가 없었기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외인(外人)인 내가 말하기엔 그렇다만, 너무 심려하지 말아라. 어차피 모두 세상일이다. 모두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라 흘러가게 돼 있으니.”
주호는 비동 안에서 삼 년간 지내면서 깨달은 진리를 읊었다.
막막한 무저갱과도 같은 그곳을 나올 수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가.
남궁연 역시 그때의 자신과 비슷한 심정일 터. 물론, 그 어둠의 깊이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 건가요. 아직 저에게는 너무 어려운 소리네요.”
작게 한숨을 내쉰 남궁연은 투정하듯 미소를 지으며 주호의 옆으로 좀 더 붙어 설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