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갑작스러운 소집이라니. 자네, 무슨 일인지 아는가?”
대회랑.
세가의 큰일이 발생했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세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다만, 삼 년 전 이래로 사용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이례적으로 세가의 몇몇 조직들이 그곳으로 호출되었다.
“글쎄, 향후 방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군. 봉문도 풀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강호 일에 나설 때가 되지 않았나?”
“그렇긴 하네. 아가씨께서 정천학관에 수석으로 입관하셨겠다, 이번에 무림맹과 연합해 마교의 세력을 색출해내는 데도 큰 공을 세웠지 않는가.”
“마침 모인 면면들을 보게. 모두 세가의 정예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닌가.”
서로가 각자의 의견으로 분분한 와중 드디어 주역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한을 필두로 세가의 간부들이 뒤를 따랐고, 그 제일 후미엔 주호와 남궁연이 자리했다.
“모두 모여줘서 고맙네.”
남궁한은 흐뭇한 얼굴로 자신 앞에 선 수많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들 하나하나가 세가를 이루고 모두가 모여 남궁이란 이름을 이루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들을 기만하는 배신자를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이곳에 모이자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닐세.”
쿵.
남궁세가의 신물(神物)이자 가주의 상징인 제왕검이 큰 진동과 함께 땅에 박힌다. 그와 동시에 제왕단이 대회랑을 둘러쌌고 날카로운 기세를 피워올렸다.
“오늘 우리는 남궁이란 이름 아래 섞여든 쥐새끼들을 잡을 예정이라네.”
“쥐새끼?”
“대체 무슨 말씀을…….”
쥐새끼들을 잡을 것이란 남궁한의 선포에 장내는 웅성거림에 잠긴다. 그러면서 수많은 이들이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당황을 토해냈다.
“본가에 배신자라도 있다는 겁니까.”
“어찌 남궁의 이름에 그러한…….”
“배신자들을 제압하라!”
모두가 설명을 필요로 하는 얼굴로 남궁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더없이 단호한 얼굴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솨사사사-!
대회랑을 둘러싼 제왕단의 고수들이 일시에 몸을 날렸다.
그 광경에 위협을 느낀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검을 뽑아들며 대응하려 했지만, 그 전에 먼저 남궁한이 외쳤다.
“경거망동하지 말라! 그대들이 세가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검 끝은 그대를 향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사람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어찌 되었든 남궁한은 남궁세가의 가주. 그렇기에 남궁의 이름 아래 그의 말은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걸리는 것이 없는 이들은 천천히 검에서 손을 떼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 역시 설마 자신을 알아차리겠냐는 마음으로 눈치를 보며 기세를 거두었다.
“악!”
“어째서 나를 포박하는 것이오!”
하지만 그들의 짐작과는 달리 제왕단의 고수들은 귀신같이 배신자를 찾아내었다.
간혹 상황이 어그러졌음을 깨닫고 저항하려 했던 이도 있었지만, 수적 열세에 밀려 처참하게 포박당하고 말았으니.
내공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 굵은 포승줄로 온몸을 구속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섬뢰단주.”
“…이게 무슨 짓인가?”
섬뢰단주 남궁찬을 비롯한 섬뢰단의 무인들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 작전에서 섬뢰단은 철저하게 제외되었다.
그 이유인즉슨, 그들의 수장인 섬뢰단주가 바로 배신자였기 때문이었으니.
그뿐만이 아니라 섬뢰단원 중 적지 않은 수가 적들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포착되었다.
“마치 우리 안에 배신자라도 있는 것 같은 태도인데.”
“우리는 남궁세가의 자랑스러운 섬뢰단이다!”
“감히 우리의 충성을 의심하느냐?”
남궁찬의 말에 호응하듯 섬뢰단의 단원들 역시 분개한 얼굴로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제압당하고 있는 대부분은 세가 외인, 그리고 방계라 할지라도 말단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섬뢰단이라면 달랐다.
그들은 명실상부한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조직 중 하나.
그렇기에 주위에서도 그들 안에 배신자가 있단 소리에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세가를 위해 한 번만 참아주면 안 되겠나.”
“지난날의 충정이 배신자라는 오명이라면 자네는 참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말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남궁찬에 제왕단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글쎄, 일단 우리 제왕단도 조사를 받았는데 말이지.”
“자네는 자신의 충정이 의심을 받은 것에 아무렇지 않은가!”
그의 태도는 정말로 억울하다는 사람과 같았기에 제왕단주가 일순간 멈칫할 정도였다.
하지만 제왕단주는 이내 고개를 젓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진정으로 세가를 위한다면 그런 의심 정도야 언제든 걷어낼 수 있겠지. 그만 협조해주게나. 흑백이 명확하게 가려지면 내 무릎을 꿇고 사죄하지.”
챙-!
하지만 싸움을 피하기 위한 제왕단주의 간곡한 말에도 불구하고 남궁찬은 기어코 검을 뽑아들었다.
그에 따라 섬뢰단 역시 제 무기를 들었고 장내 분위기는 험악해져 갔다.
“가주! 우리의 충심에 대한 보답이 고작 이것이오!”
“그렇소이다! 대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러는 것이오!”
숫제 목이 터지라 외치며 분위기를 바꿔놓고 있었다.
대다수는 휙휙 바뀌어 가는 상황에 침묵했다.
설마 가주인 남궁한이 의미 없는 일을 할까 하며 신뢰를 보냈지만, 배신자로 지목된 이들을 비롯해 그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자들은 모두 억측이라며 비난을 해댔다.
“후우.”
남궁한은 가볍게 한숨을 흘렸다.
짐작은 했지만, 저리도 악착같이 반항하는 것이 못내 마음이 아팠다.
‘무엇이 그리 불만이었느냐.’
그가 무어라 입을 열려 할 때, 주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해도 괜찮겠습니까.”
“…세가의 외인인 자네가 나서면 괜한 소란만 불러일으킬 터네.”
“남궁세가가 보기엔 제가 외인이겠지만, 저들에게만큼은 다를 것입니다.”
주호는 천천히 관중을 해치고 섬뢰단이 농성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잠시 제가 말해보겠습니다.”
제왕단주는 말없이 한옆으로 비켜 자리를 내주었다.
“남궁찬.”
“…감히.”
남궁찬은 갑작스레 양측에 끼어든 주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외인은 빠져라! 이것은 남궁세가의 일이니!”
“별호 운뢰검(雲雷劍), 섬뢰단 단주.”
“자네도 저것을 보고만 있을 것이지? 언제 남궁세가가 내부의 일을 해결하는데 남의 손을 빌렸는가!”
“그리고 혈천신교 소속.”
“……!”
제왕단주에게 소리치던 남궁찬이 주호가 나지막하게 내뱉은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이 자리에 있는 대다수는 세가의 고수라 할 법한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모두 감각이 곤두서 있었고, 주호가 혈천신교의 이름을 내뱉었을 때 남궁찬의 몸이 한차례 반응한 것을 느꼈다.
섬뢰단원 역시 두 눈을 크게 뜨고 그에게 물었다.
“…단주?”
남궁찬은 황급히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주호의 말이 더 빨랐다.
“변명할 생각은 집어치워라. 탈옥하기 전에 남진은 이미 모든 것을 불은 상태였으니.”
‘…젠장.’
남궁찬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어쩐지 세가 숨어둔 배신자를 정확히 지명한다고 했다.
누군가 그 명단을 넘기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으니.
“어리석은 종자 하나가 대계를 망치는구나.”
그가 안타까운 어조로 한탄을 내뱉자 섬뢰단원중 하나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다가갔다.
“다, 단주. 아니지요? 뭔가 착오가…….”
푹.
“…네놈!”
남궁찬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에게 다가온 무인의 가슴에 뽑아든 검을 박아넣었다.
그는 반응할 새도 없이 급소를 당해 절명했고 이내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그 모습에 제왕단주를 비롯한 다른 무인들이 이를 갈며 검을 세웠다.
“단주! 대체 왜 그러는 것이오!”
“대체 왜!”
뒤에 있던 섬뢰단원들은 단주의 배신과 동료의 죽음에 악에 받친 비명을 질렀다.
“구구절절 이야기해보아야 입만 아플 터.”
남궁찬은 수많은 고수에게 둘러싸인 와중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건가 싶었지만, 그 눈동자에 서린 기색을 보아하니 포기한 것 같지는 않았다.
‘무위는 절정의 완숙. 하지만 제왕단의 고수들이라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남궁찬은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금껏 단정히 모양을 유지하고 있던 그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흘러내렸고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얌전히 제압당해라. 그리하면 목숨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니.”
제왕단주가 경직된 표정으로 경고함과 동시에 주위에 있던 고수들이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들킨 시점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은 버렸다. 다만…….”
남궁찬은 품에 손을 넣었다. 암기인가 싶어 모두가 경계를 취했지만, 그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종이에 쌓인 정체 모를 것이었다.
“저승길에 혼자 가기는 외로우니 길동무라도 만들어야겠구나.”
“막아!”
그가 종이를 벗기자 시커먼 단환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제왕단주가 몸을 날리며 막으라고 외쳤지만, 남궁찬은 이미 그것을 삼킨 뒤였다.
“하하하.”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고수들을 보며 그는 큰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목을 기점으로 시커먼 핏줄이 툭툭 솟아올랐고, 이내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보라! 이것이 그분께서 내려주신 힘이니!”
남궁찬은 시커멓게 변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던 이들을 향해 말했다.
웅웅-
거센 기세가 그를 중심으로 장내를 뒤덮었다.
내공이 약한 이들은 핏줄기를 내뱉으며 뒷걸음질쳤고 고수라 할지라도 그 꺼림칙한 기분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주호만의 얼굴이 굳었다.
[불특정 각성을 감지했습니다.]
[주의를 요합니다.]
[상태창]
이름: 남궁찬
별호: 운뢰검
직업: 남궁세가 섬뢰단 단주
나이: 마흔여덟
소속: 남궁세가
무공: 섬뢰검법
경지: 절정(三/十)→초절정(五/十)
호감도: 下下
‘경지를, 뛰어넘었다?’
고작 단환을 하나 먹은 것만으로 기존의 경지에서 십수 배나 뛰어올랐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 그렇기에 달려들던 모습 그대로 남궁찬을 공격해나갔다.
“물러나!”
주호가 급하게 외치며 몸을 날렸지만, 그보다 먼저 다섯의 목이 날아가며 그 몸이 허물어져 내렸다.
“…이 무슨!”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절정 이상의 고수들뿐. 하지만 그들 역시 가슴께에 갈라진 상처를 입은 것을 보니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쉬시시식-!
시커먼 검기가 섬뢰 같이 사방에 쇄도했고 곧 장내는 피와 비명이 난무했다.
“물러나! 물러나라고!”
제왕단주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남궁찬의 기세는 매서웠고, 주호가 나선 뒤에야 겨우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좋지 않은가. 무림은 힘으로 말하는 곳. 언제까지 그 알량한 이름으로 천하제일가를 논할 수 있겠는가.”
“네 이놈, 남궁찬! 남궁의 이름을 달고 간자를 칭하다니 돌아가신 선조에 부끄럽지도 않으냐!”
“시대는 바뀌어 간다. 우매한 네놈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가는 죽음뿐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우우웅-
시커먼 검기가 더더욱 짙어졌다.
곧 그의 검 끝에서 피어나 일렁거리기 시작한 기운에 제왕단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검강?”
그가 알기로 남궁찬의 무위는 자신보다 한 수는 아래였다.
같은 단주지만, 섬뢰단에 비해 제왕단은 정예 중의 정예가 모인 조직이었으니까.
하지만 살이 에는 듯한 기운을 내뿜으며 일렁이는 검강은 분명 환상이 아니었다.
“예전부터 네놈은 마음에 들지 않았어. 꼴에 제왕단이라며 거들먹거리고 다니던 모습이.”
샤아아악-!
남궁찬의 검이 휘둘러지자 제왕단주는 자신의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주호는 황급히 제 검에 검강을 피워 올리며 그들 사이로 끼어들려 했으나, 그보다 한 발자국 먼저 남궁찬에게 쇄도하는 인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