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미안하네. 이야기가 잠시 딴 길로 빠졌군.”
남궁한은 부끄러움에 부들거리는 제 딸에서 시선을 돌린 채 긴 한숨을 내쉬며 주호를 바라보았다.
‘음.’
주호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남궁연과 슬쩍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을 푹 숙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자신에게 무언가의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냐는 별개의 문제. 지금껏 주호를 스쳐 지나갔던 여성은 많았지만, 딱히 사랑이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남궁한의 말과 그녀의 태도에 당혹스러움만 들었을 뿐.
문득 천우희의 얼굴이 시야 한 편에 떠오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래서 어떻게 세가 안에 숨어든 배신자를 색출해내겠다는 건가.”
“그 이전에 사실관계부터 정정하자면, 저번 습격은 몰라도 이번 습격의 배후에 있는 것은 마교가 아닙니다.”
“마교가 아니라고?”
“혹시 이것을 아십니까.”
주호는 손끝으로 한줄기 기운을 피워 올렸다. 그러자 허공에 푸른 불꽃이 서리며 그 궤적을 따라 문자를 그려가기 시작했다.
四神
상태창의 능력을 설명한다면 조금 더 쉽게 흐름을 풀어나갈 수 있겠지만, 그쪽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결정한 것이 바로 사신문의 이야기였다.
사신문의 문주인 하월벽의 말에 따르면 구파일방이나 명문 세가 같이 오랜 세월을 지닌 곳들은 옛적부터 물 밑에서 사신수와 긴밀한 공조 관계를 지녔다고 했다.
“…사신? 사방신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옆에 있던 남궁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하지만 그것을 읽은 남궁한은 입을 닫은 채 그저 두 눈을 찡그렸을 뿐이었다.
‘사신, 사방신, 사신수. 허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 터.’
분명 무언가의 신호나 표식을 뜻하는 것일 터.
“…….”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순간 남궁한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언젠가 전대 가주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지.”
“조부님께서요?”
“이 강호엔 수많은 신비 조직이 있지만, 남궁세가의 가주로서 가슴에 새겨야 할 곳은 딱 한 군데밖에 없노라며.”
주호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마치 과거를 회상하듯 깊어졌다.
“사방신의 형태를 딴 사신을 상징으로 삼으며 중원에 전란이 일기 전에야 모습을 드러낸바. 전대 가주님과 그 윗세대 역시 마교와 전쟁을 치른 바가 있지. 분명 그 이름이…….”
“사신문이라 하지요.”
주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포권했다.
“사신 중 청룡의 좌를 맡은 주호라 합니다.”
지금은 정천학관의 교관이 아닌 청룡으로서의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사실 정식으로 그 이름을 계승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라 익숙지 않았지만, 그는 그런 내색을 숨긴 채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
남궁연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두 눈을 크게 뜨며 주호를 바라봤다.
사신문이니, 청룡이니 하는 것은 모두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맹주도 그런 것인가? 내 알기로 점창과 연이 닿아 있다고 알고 있거늘.”
“사형께서는 모르십니다. 그 진전을 물려받은 것은 제 쪽뿐이니.”
“그런가.”
자세한 이야기가 오가진 않았으나, 남궁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 조직엔 그 나름의 사정이 있는 법. 구태여 세세히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잠시만요, 맹주라는 건 무림맹주님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분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참, 말하는 것을 잊었군. 뭐, 이렇게 된 이상 상관없지 않겠나?”
남궁한의 말에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의지를 확인한 이상 남궁연 역시 이 일의 관계자다. 앞으로의 이야기와 비교한다면 이 정도는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나와 맹주님은 동문이다.”
“…그런.”
남궁연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놀람을 표했지만, 그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예상외의 반응이다 싶어 의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교관님 정도의 고수가 흔할 리 없잖아요. 차라리 맹주님의 사제라는 게 더 개연성 있는 이야기겠네요.”
“하하…….”
“그래서, 그 사신문이 이번 일과 관련 있다?”
“정확히는 그 흉수들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사방신의 대적자를 아십니까?”
“분명 사흉수였지. …설마?”
“저희가 사신수를 내세웠듯, 그와 대척점에 있는 사흉수를 상징으로 활동하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흉수라는 자들이 개입했다는 거군요.”
남궁연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있었던 습격은 잘 모르겠으나, 이번 건은 사흉수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저희는 그들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파악할 수 있다는 건…….”
“일정 거리 안에 있으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물론, 상대 쪽은 알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호오.”
남궁한은 물론, 남궁연 역시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사신문 내에 그런 비전이나 능력을 지닌 이가 정말로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럴 때는 신비 조직이라는 것이 좋은 방패막이였다.
사실은 그저 슬쩍 상태창을 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어쨌든 잘 된 이야기군. 하나 의문이 있다면 그들은 어째서 마인 행세를 했냐는 것인데.”
“마교가 물밑에서 무언가 음모를 작당하고 있다. 대충 이런 식의 상황을 원했겠지요. 제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그렇게 되었을 테니.”
“…이이제이(以夷制夷). 중원 무림과 마교 사이를 악화시켜 전쟁이라도 일으키려는 것인가?”
하지만 이미 둘의 사이는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삼 년 전에 일어난 무황의 비동 사태만 하더라도 마교가 갑작스럽게 협정을 깨고 다른 세력들을 습격한 덕분에 전쟁의 목전까지 다다랐으니.
물론, 전쟁은 그리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의 인명이 우습게 죽어나가고 천문학적인 물자가 소모된다. 그렇기에 전면전이 벌어졌던 것은 강호 역사에도 몇 없던 일이었다.
“일단 중요한 것은 배신자를 색출해내는 일입니다.”
“만일 자네의 말이 사실일 경우 배신자를 색출해내는 것은 일시에 이루어져야 하네. 그렇지 않다면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위험이 있으니 말이지.”
“그렇습니다.”
“대충 이유를 붙이면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는 쉽네만, 내 쪽에서도 상당한 도박을 하는 셈이니 모쪼록 신중히 움직여주었으면 하는군.”
사실 남궁한으로서는 아무리 주호가 사신문과 사흉수 운운하더라도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에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세가의 일원을 의심하는 것이니 가주의 입지 이전에 세가에 대한 신뢰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배신자를 잡기 위해 과감히 그것을 감수하기로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남궁한은 먼저 세가의 최정예 조직인 제왕단을 소집했다.
족히 이백에 달하는 고수들이 연무장 위에 모여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장관이었다.
-이중엔 없습니다.
-…그런가.
한 명 한 명 모두의 상태창을 펼쳐본 주호의 말에 남궁한의 눈에 안심한 기색이 스쳤다.
“얼마 전, 연이가 습격당한 일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입을 열자 모두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제왕단은 남궁세가의 정예 중에서도 정예였다.
그런 만큼 세가에 대한 충성심도 남다른바. 그런 상황에서 세가의 직계, 그것도 남궁연이 습격당했다는 사실에 모두 예민해져 있었다.
“올해만 벌써 두 번 있는 일이지. 상대는 어찌 된 일인지 세가의 사정을 속속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연이를 앞질러 습격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일 터.”
“세가 내에 배신자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제왕단원 중 누군가 물었다. 그에 남궁한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다행히 우리는 그 배신자를 색출해낼 방법을 찾을 수 있었지.”
남궁한이 주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이 사내는 정천학관의 소속으로 연이의 가르침을 담당하고 있는 교관이다. 더군다나 무림맹주 쪽에서 본가를 돕기 위해 은밀히 파견해준 고수기도 하지.”
정천학관의 교관이란 감투는 사실 어지간한 고수 이상이라면 별 신경 쓸 감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림맹, 그것도 무림맹주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거론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는바.
모두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우선, 자네들에게 사죄의 말을 전하겠네. 사안이 사안인지라 누가 배신자인지 알 수 없어 이렇게 모이게 했다. 하지만 자네들 중에 배신자는 없다는군.”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저희 중에 배신자가 있다면 그것은 저희가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누군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외친다. 다른 이들도 역시 더러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에 공감했다.
‘다들 강인하구나.’
주호는 그런 그들을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과연 오랜 역사를 지닌 명가였다. 자신들이 의심받아도 세가를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노라며 웃어넘기고 있지 않은가.
남궁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자부심과 자긍심은 그로서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부터 세가 곳곳을 돌아다니며 배신자를 색출할 것이다. 그러곤 그들이 움직이는 것보다 먼저 이쪽에서 일망타진할 생각이니 모두 긴장을 늦추지 말고 준비하도록.”
“존명!”
이백 명의 제왕단이 마치 한 명이 된 것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자, 그럼 가보겠나? 세가의 든 쥐새끼들을 잡으러.”
주호는 남궁한과 동행하며 두 시진에 이르도록 세가 곳곳을 돌아다녔다.
과연 천하제일가라 칭해지는 만큼 남궁세가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은 많았다.
“직계의 수는 한정되어 있지만, 방계만 해도 몇백 명에 이르고 외인이었다가 남궁의 성을 하사받은 이들까지 합하면…….”
절로 혀가 내둘러지는 숫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기어코 모든 곳을 돌아보았고 적지 않은 배신자들을 색출해낼 수 있었다.
“직계 쪽은 없군. 방계엔 여덟, 그리고 나머지가 열둘이라.”
남궁한은 입맛이 씁쓸해졌다. 외인이나 식객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런 목적을 가지고 세가에 침입한 이들일 테니.
하지만 방계의 인원들은?
거기에 곁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배신자로 지목된 이들 중에는 세가의 고위직에 있는 인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 주호가 그의 이름을 말했을 때 남궁한이 믿지 못한 채 몇 번이나 되물었을 정도로.
“다 내 업보로다.”
그렇기에 그는 칼을 빼 들었다.
자신의 부덕함으로 인해 벌어진 일을 스스로 청산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