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아침 이후 거처로 돌아오던 주호는 갑작스레 어수선해진 세가의 분위기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언가 일이 일어난 것인지 다들 심각한 얼굴로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다. 각 구역에서 경계를 서는 인원은 배로 늘어났고, 분위기까지 흉흉해진 것이 필시 가벼운 일은 아닐 듯싶었다.
“저기, 무슨 일 있소?”
주호는 제 옆을 지나치던 남궁세가 무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이립을 넘은 나이로 보이는 사내는 순간 그의 얼굴을 보곤 흠칫하더니 작게 인상을 쓰곤 대답했다.
“세가의 일이오. 부산스러울 테지만 조금만 참아주시오.”
분명 초면일 텐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퉁명스러운 태도였다.
그러곤 그 말을 끝으로 매몰찬 모습으로 그 자리를 떠나갔으니, 주호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내가 무슨 결례를 저질렀나?’
객(客)의 입장으로 충분히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던가.
당연히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고, 그저 상대의 기분이 좋지 않았겠거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런 사소한 것으로 분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으니.
“교관님!”
그때 저 멀리서부터 남궁연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 같은 다급한 발걸음으로 그에게 달려왔다.
“…….”
그러자 앞을 걸어가던 사내는 우뚝 발걸음을 멈추곤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사내는 주호를 대할 때와는 완전 딴판인 얼굴로 남궁연을 불렀다.
“좌호법께서도 계셨군요.”
“아가씨, 아직 흉수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홀로 돌아다니시다가 봉변이라도 당하시면 어찌하시려고 그럽니까.”
“저도 어엿한 세가의 일원이에요. 언제까지고 그렇게 어린애 취급하는 건 그만둬주세요.”
“그것도 어느 정도의 선이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곡절을 겪으셨는데…….”
“좌호법님.”
남궁연의 살짝 낮아진 목소리에 사내는 옆에 있던 주호를 슬쩍 곁눈질하고는 이내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여튼, 가주께서 계신 내원까지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저는 교관님을 뵈러 온 거예요. 이제부터 이분과 함께 움직일 거니 괜찮아요.”
“하지만 상황이 제법 심각합니다. 세가의 무인을 죽이고 철옥에 감금된 인원을 탈취해갔으니 흉수는 적지 않은 경지에 오른 고수입니다.”
“…탈취해?”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호가 살짝 놀란 얼굴로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네, 간밤에 철옥에 습격이 있었어요. 경계를 서던 세가의 무인이 죽고, 사로잡았던 마인을 강탈해갔죠.”
그녀는 침중한 낯빛이었다.
세가의 배신자를 밝혀낼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그것을 놓친 것에 대해 아쉬움이 진해 보였다.
“그러니 돌아가시지요. 지금은 고집부릴 상황이 아닙니다.”
좌호법이라 불리는 사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에 편승했다.
하지만 남궁연의 태도는 이전과 같았으니.
“분명 말씀드렸죠, 교관님을 뵈러 왔다고. 작금 세가 내에서 아버님과 어르신들을 제외하고 가장 고수인 분의 옆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주호는 묘한 눈으로 언쟁으로까지 번진 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이 차이가 있기에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남궁연의 얼굴에 서린 감정은 귀찮음과 거리감이었지만, 그 반대로 좌호법이라 불린 사내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연정이 피어올라 있었으니.
‘이것 참…….’
남궁의 무인이 제가 모시는 금지옥엽에게 마음을 품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기 짝이 없었다.
“남궁 소저의 안전은 제가 보장하도록 하지요. 그쪽은 볼일을 보러 가도록 하시오. 아까 보니 발걸음이 바쁜 것 같던데.”
주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남궁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밤의 일도 있었기에 그녀는 잠시나마 움찔했지만, 이내 그 손길에 순응하며 주호의 옆으로 붙었다.
“감히 누구의 어깨에 손을 대는 것이냐!”
그 모습을 본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거친 고성이 토해져 나왔다.
명백히 선을 넘은 모양새에 주호 역시 눈빛이 싸늘해졌다.
“네놈은 감히 누구 앞에서 소리치는 것이지?”
가볍게 제 기세를 풀어 주위의 공간을 장악했다.
남궁세가의 객으로 온 이상 어느 정도 예의를 표할 생각은 있었으나, 그 이상은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윽?!”
거센 해일과도 같은 압력에 사내는 순간적으로 압도되어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추태를 깨달은 것인지 얼굴을 붉히며 두 팔을 떨쳤다.
“하아아아-!”
힘찬 기합성과 함께 그의 장삼이 펄럭거리며 경지에 오른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남궁선, 무위는 절정 초입 수준인가.’
과연 큰소리를 칠만하다 싶었다.
이립이 조금 넘은 나이에 좌호법이란 높은 위치, 그리고 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였으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와 시비가 붙는 것이 부담스러워 자리를 피했겠지만, 오늘만은 상대가 심히 나빴다.
스윽-.
남궁연의 신형을 조금 더 깊숙이 끌어안은 주호는 가볍게 손을 내리그었다.
“대, 대체…….”
단지 그것만으로 폭풍 같던 기류가 일시에 갈라지며 순식간에 와해 돼버렸다.
“대, 대체…….”
한눈에 보아도 알아볼 수 있는 압도적인 격차에 남궁선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호의 옆에 서 있던 남궁연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좌호법, 세가의 직계로서 명하겠어요. 당장 자신의 책무를 다하도록 하세요.”
“…아가씨.”
남궁선은 이를 악물며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단호한 그녀의 시선에 고개를 푹 숙인 뒤 너털거리는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
쓸쓸히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궁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분이신데, 가끔가다 저렇게 꽉 막한 면모를 보이셔서 그래요. 예전엔 이렇지 않으셨는데.”
“…….”
주호는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다 이내 입을 닫았다.
남궁연 쪽은 아예 의식하지 않는 상화에서 굳이 저쪽의 일을 들출 필요는 없을 것 같았으니.
***
철옥이 습격되었다는 말에 주호는 곧바로 남궁연과 함께 남궁한을 찾아갔다.
“내 실책이네.”
그는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미간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설마 연회로 어수선한 틈을 타 수작을 부려올 줄은.”
“근래 세가에 외부인이 출입한 적이 있습니까.”
“자네들밖에 없지 않은가. 거기에 철옥은 절대 외인이 드나들 수 없는 곳이라네.”
그 말에 주호는 입을 다물었다.
모든 정황이 가리키는 사실은 하나이였다. 하지만 남궁한에서 그것을 꼬집어 이야기하기엔 저어되는 부분이 많았으니.
“…세가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건 확실하군요.”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궁연이 경직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로 인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당사자. 그것도 두 번이나 험한 일을 겪었기에 분노하는 바가 컸다.
“다 내가 부덕한 탓이네. 일이 이렇게 된 것도, 연이 네가 그런 이들을 겪은 것도.”
그 말을 하는 남궁한의 얼굴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그 마인에게도 어떻게든 배후를 밝혀내려고 온갖 수를 다 썼다네. 하지만 독한 놈이더군. 한 마디도 제 정체에 관해 입을 열지 않아. 사지 근맥이 끊어지고 단전이 파괴되어 대라신선이 오더라도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인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빼낸 것을 보니 제법 중한 인물이었나 보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었다.
더군다나 이제 며칠이 지나면 그들은 다시 안휘를 떠나 하남으로 돌아가게 될 터.
내부에 있는 배신자를 잡지 못한다면 아무리 방비를 단단히 하더라도 위험을 초래할 수가 있었다.
‘단서, 단서가 필요하다.’
마교든 사흉수든 배신자를 색출해내야 했다. 그들을 뿌리 뽑지 못하면 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니.
“……?”
남궁한과 남궁연이 고심하는 사이, 일순간 주호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곧 두 눈을 크게 떴고, 이내 가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배신자를 찾을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방법이 있다고?”
그 말에 남궁한은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사로잡은 남진을 고문하면서도 세가에 숨어든 배신자를 찾을 단서가 있을까 싶어 그의 전신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먼지 한 톨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허사가 되었을 뿐이었으니.
“우선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주호의 태도가 의미심장한 것을 느낀 남궁연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닌 듯했기에 자리를 벗어나려 한 것이었지만, 남궁한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딸을 붙잡았다.
“그대로 있도록 하여라.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후에 세가를 이끌 때 큰 도움이 될 테니.”
“아버님.”
남궁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말이 주는 의미는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차기 가주로 점찍어 두고 있다는 건가.’
더군다나 이곳에는 그 둘뿐만이 아니라 주호라는 외인까지 자리한 상태였으니 어느 정도 마음을 결정했다는 것일 터.
“…….”
주호는 아무 말 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입안에 퍼지는 청아한 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들자, 남궁한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벽이 그 아이가 떠난 지 벌써 삼 년이란 시간이 지났구나. 하지만 언제까지 떠나간 아이를 그리워할 수만은 없지 않으냐. 지금 이곳엔 우리만 올려다보는 이들이 수천, 수만 명은 더 넘으니.”
“허나…….”
남궁연은 곧바로 입을 열었으나. 이내 다물고 말았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으나, 적어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래, 무림에서 여성의 몸으로 우뚝 서는 것은 힘든 일이지.”
무림, 강호는 철저한 강자 존이었다.
아무리 남궁연이 직계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무공의 성취와 명성이 뒤떨어진다면 가주의 자리에는 앉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여성이라는 점 역시 큰 약점이 되었다.
아미파 같이 전원이 여성으로 구성된 일부 문파를 제외하곤 여성이 일가(一家)를 이끄는 경우는 드물었으니.
“성별이 무에 중요하겠느냐.”
하지만 남궁한의 생각은 달랐다.
남궁연은 성별의 한계에 연연하지 않았다. 세가의 그 어떤 무인보다 더 열심히 수련하고 노력해 자신이 물려준 재능을 갈고닦았다.
“정천학관의 수석입관자. 어지간한 후기지수라도 달성하기 힘든 업적이지. 최소한 네가 지금처럼만 쭉 이어 나가준다면, 학관을 졸업하고 때가 무르익었을 때 내 결정에 토를 다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전까지는 이 아비가 꽉 붙잡고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각골명심 하겠습니다.”
제 아버지의 뜻이 확고한 것을 느낀 남궁연 역시 비장한 얼굴로 답했다.
남궁한은 그런 딸아이의 모습이 흐뭇한지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너무 힘주지 말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가주라. 아마 남궁세가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일 테지.’
주호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식을 아끼는 모습이 꼭 제 가족을 보는 것만 같았기에. 남궁한은 그런 그의 시선을 눈치채곤 전과 같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자네가 많이 도와줄 것으로 알고 있겠네.”
“교관으로 맡은 소명을 다하겠습니다.”
“딱딱한 소리는 말게나. 대충 보니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듯한데.”
“아버님!”
그 말에 남궁연은 이전의 진지했던 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남궁한 쪽이 오히려 더 당황한 얼굴로 입을 벌렸으니.
“다, 단순한 농이었거늘…….”
이미 크게 마음이 기운 것 같은 딸의 모습에 황급히 가슴을 진정시키려 찻잔을 집어든 남궁한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