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청아한 보름달이 떠오른 밤하늘.
두 명의 남녀가 한적한 길을 걷고 있었다.
이미 밤이 깊어진 지 오래였기에 인적은 드물다. 간간이 마주치는 것은 순찰 중이던 세가의 무인들이었다.
남궁연을 알아본 그들은 이내 고개를 꾸벅였다. 하지만 그 직후 뒤에 서 있는 주호의 모습을 보곤 모두 놀란 표정으로 둘을 지나칠 뿐이었다.
‘이것 참, 또 이상한 소문이 퍼지겠군.’
세가의 내부라고 하나 이런 늦은 밤까지 남궁연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은 화제일 터.
하지만 남궁연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렸는지, 그저 붙잡은 주호의 소매를 이끌며 그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정말 아버님도 주책이시라니까요. 괜히 그런 말씀을 하셔서.”
그녀는 제 동기들과 함께 연회 자리에서 적지 않은 술을 마셨다. 그렇기에 남궁한이 던져온 짓궂은 농에 그렇게 대답한 것도 잠시간의 치기에 불과했으니.
‘미쳤지. 아직이라니, 아직이라니!’
남궁연은 태연한 기색을 가장하면서도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남에게 받는 호의에만 익숙했지, 자신이 품은 감정에 대해선 아직 낯설기만 했다.
“…일단 이건 놔주었으면 하는데.”
“아.”
주호 역시 그녀의 얼굴이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귓불이 붉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렇기에 정원을 나온 후, 시간을 조금 두고서야 입을 열자니 남궁연은 이제야 깨달았다며 붙잡은 소매를 놓아주었다.
“…….”
남궁연은 평소 모습과는 달리 슬쩍 시선을 돌리며 멋쩍은 기색으로 그 앞에 섰다.
하고 싶은, 묻고 싶은 말은 많았다.
차라리 이렇게 되었으니 술기운을 빌려 이야기하면 어떨까 싶었으나, 어떻게 된 것인지 숨이 턱 막히며 목소리가 토해져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까지 왔으면 괜찮다. 밤이 깊었으니 네 처소로 돌아가도록 하여라.”
주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슬슬 주위 풍경이 눈에 익었다.
밤도 깊었고, 조금 전에 지나다니던 무인들의 눈도 있었으니 돌아가라고 한 것이었지만 남궁연은 작게 고개를 저어왔다.
“…아니에요. 여기까지 온걸요. 바래다 드리고 돌아갈게요.”
“밤이 깊었다. 남녀가 함께 처소로 향할 시각은 아니다.”
“세가의 안이라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교, 교관님은 그러지 않으실 거잖아요.”
맑고 깨끗한 눈동자 위로 청명한 달빛이 잠긴다. 자신을 향하는 그 떨리는 눈빛에 주호는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런.’
막연한 도발, 조금의 기대, 그리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
이전까지 적지 않은 여성을 만나왔기에 그녀의 태도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
남궁연은 밑으로 내린 제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주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수줍은 모습은 마치 한 떨기 수선화가 피어난 것 같은 가련함이 있었다.
다른 이들이 그 모습을 봤다면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겨버렸을 터. 그렇기에 주호는 대답하기보다 먼저 천천히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
남궁연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주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곤 침을 꿀꺽 삼켰고, 그에 맞추어 한 발자국 물러났다.
주호가 다가서면, 남궁연은 물러났다.
곧 그러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더니, 그녀의 등은 딱딱한 벽에 닿게 되었다.
더는 뒤로 갈 공간이 없게 되자 남궁연은 살짝 입을 벌린 채 자신의 지척까지 이른 주호를 올려다보았다.
“…아.”
달을 등진 탓에 음영이 지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입가에 가는 미소가 떠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그 두꺼운 손이 자신의 뺨을 지나 머리카락을 가볍게 건드렸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주호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귓가에 닿는 그 숨결에 남궁연은 입술만 뻥긋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딱-!
이윽고 그 이마로 가벼운 딱밤이 가해졌다.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자, 주호는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강호인이라면 언제 어느 때나 상대를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그것이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
곧 그가 자신을 놀렸다는 것을 깨달은 남궁연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내, 내가 왜 그랬던 거지?’
무엇을 기대하고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런 의문과 함께 주호에 대한 섭섭함 역시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다.
그렇기에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슬며시 주호의 몸을 밀어내곤 무언가의 불만을 품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만 가볼게요.”
감정의 고하가 담기지 않은 짤막한 인사. 그것을 끝으로 남궁연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며 자리를 떠났다.
“장난이 너무 심했나.”
그녀의 기척이 사라진 뒤, 주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으며 텅 빈 길을 바라보았다.
***
동이 트고 날이 밝았다.
비록 외지에 와있다 하더라도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 수련을 빼먹었다면 선우연은 화산의 소신룡이란 이름을 얻지 못했을 터.
여느 때와 같이 고된 수련에 전신이 흠뻑 땀에 젖은 그는 우물가에서 몸을 씻었다.
그러곤 곧 있을 아침 식사의 자리를 위해 단정히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갈 찰나, 급히 자신을 찾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선형, 선형!”
“위형?”
위천강과의 만남은 주호 때와 마찬가지로 최악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이후로 같이 수업을 듣고, 여러 새로운 것을 많이 알려주면서 이제는 죽마고우나 다름없는 관계가 되었다.
평소라면 풍류 공자는 언제나 느긋한 여유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던 그가 오늘은 어째서인지 조금의 여유도 없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오?”
선우연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며 뛰어온 그를 진정시켰다.
위천강은 몇 번이고 심호흡을 내쉬고도 진정이 되질 않는지,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남궁 소저가.”
“남궁 소저가?”
“요 깊은 밤에 주교관님과 함께 그 거처로 향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다고 하오.”
“…뭐라?”
그 말에 다른 남자들 역시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계속 말해보라는 시선에 위천강은 먹이를 물고 온 어미 새처럼 황급히 정보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세가의 시비들이 워낙 반반해서 말이오. 말이라도 붙여볼까 해서 남궁 소저를 화두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글쎄 한 시비가 야밤을 거닐고 있던 둘을 보았다고 하지 않소. 그 방향은 분명 교관님의 침소였으니.”
“그게 뭔…….”
옆에 있던 당천유는 아침부터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한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다른 이들의 태도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남궁연이 남자를 대할 때의 성정은 워낙 유명한바. 그런 사사로운 정에 휩쓸릴 여인이 아니었다.
“아니, 정말이란 말이오. 순찰하던 무사들도 전부 봤다고 하니. 지금 세가의 위쪽도 그 일로 술렁인다고 하오.”
“…정말인가.”
“믿지 못하겠으면 교관님께 직접 물어보러 가든가!”
가슴을 치며 장담하는 위천강의 모습에 선우연의 입술이 떨렸다.
이 자리에서 남궁연의 동경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이야기라니.
“…일단 가봅시다. 교관님께 자초지종을 들으면 사실이 밝혀지겠지.”
주호의 처소는 후기지수들과 구분이 되어있었다.
좀 더 내원에 가까운 위치였는데, 따로 연무장이 없는 후기지수들의 숙소와는 달리,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선 선우연을 필두로 한 후기지수들은 막, 수련을 끝내고 검을 내리던 주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 곧 식사할 시간이 아닌가?”
이른 아침부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자신을 찾아왔냐는 시선에 선우연을 비롯한 그들은 입을 오물거렸다.
“…그.”
“그?”
하지만 막상 주호를 앞에 두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주호는 한차원 위의 고수. 남사일은 그를 스스럼없이 대했지만, 후기지수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으니.
“아.”
서로 눈을 맞추며 말없이 상대를 내세우던 그들의 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주호는 이내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가.”
“…예?”
“하긴 며칠이나 쉬었으면 몸이 찌뿌둥할 만도 하겠군.”
주호는 적극적인 제자들의 모습에 기꺼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하기 전까지 조금 시간이 있겠지.”
어서 전부 연무장 위로 올라오라는 주호의 웃음에 후기지수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격언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굴에 머리를 집어넣었을 때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
남궁세가의 철옥.
세가의 규율을 어긴 죄인이나 외부에서 잡아들인 흉악범을 가두는 장소였다.
근래 사용된 적이 없었기에 먼지만 쌓여 있었지만, 얼마 전부터 쇠사슬에 손발이 묶여 그 안에 갇힌 한 인영이 있었다.
모진 고문 탓인지 전신에 상처가 가득하다. 움직일 기력조차 없는 것인지 제 옆에 쥐가 기어 다니고 있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각은 이제 막 남궁연이 주호와 헤어져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던 때.
철옥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천장에 돌출된 돌기에서 습기가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소리를 제외하면 조그마한 생물들이 미력하게 제 존재를 알리는 기척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그 고요함을 깨고 낯선 발걸음 소리가 그 안으로 울려 퍼졌다.
단조롭게, 아무런 높낮이 없이 내부를 채운 그 소리는 곧 쓰러진 인영의 앞으로까지 도달했다.
“은영혈귀대 부대주 남진.”
“…….”
아무런 감정 없이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에 조금 전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던 그의 몸이 움찔했다.
천천히 머리를 움직여 고개를 들었고, 곧 흉흉한 눈동자로 상대를 쏘아보았다.
“교에서 왔나.”
“애초에 전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온 것이지요.”
“시시콜콜한 잡담은 집어치우고 빨리 빠져나갈 방도를 말해라.”
“몸의 상태가 심각하실 텐데 말입니다.”
그 말대로 남진의 상태는 심각했다.
단전은 파괴되어 더는 내공을 운용할 수 없었다. 사지 근맥은 검에 잘려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었고, 피폐해진 몸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위태로웠다.
“교로 돌아가면 이깟 육체적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지. 네놈도 알지 않나?”
“그건 그렇지요.”
남진 앞에 선 사내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임무를 그르친 탓에 제 입지도 위태로워졌습니다. 가주가 배신자를 색출하고 있어요. 저도 당연히 그 범위 안에 걸려들었고요.”
“정보를 잘못 알려준 네놈 잘못 아닌가.”
“그건 인정합니다만, 설마 은영혈귀대의 부대주가 실패할지는 몰랐습니다.”
쯧.
남진이 혀를 차는 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그의 참을성이 한계에 가까워졌음을 깨달은 사내는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철옥의 문을 열었다.
차랑-!
그가 일수를 휘두르자 남진의 손발을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들이 엿가락처럼 부러져 나갔다.
“걷기는, 힘들겠군요. 사지 근맥이 모두 잘렸으니.”
“굳이 알고 있는 걸 되묻다니 악취미로군.”
“조그마한 불평이라고 하죠. 당신 때문에 꽤 귀찮아졌으니까.”
남진의 탈옥 사실이 알려진 것은 아침 식사를 마친 철옥의 다음 근무자가 싸늘한 동료의 시신을 발견한 직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