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63화 (63/300)

#63화

‘천뢰제왕신공이라.’

남궁세가의 가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초상승의 무학.

정확한 내용은 몰라도 자신이 익힌 청룡신공과 비견될 만한 수준으로 짐작할 따름이었다.

“근래 자네에 관해선 심심치 않게 이야기가 돌았지. 안휘에까지 들려올 지경이었으니 이제 곧 중원에서 명성을 얻는 것은 시간문제겠어.”

“과찬이십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실력입니다.”

그 말에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남궁세가주 정도 되는 인물이 하는 칭찬이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을까.

시원시원한 태도로 술 한 잔을 털어 넣은 남궁한은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정말로 자네가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을는지.”

이 나이를 먹고도 강호는 험난하기 짝이 없다며 그는 구슬픈 웃음을 지었다.

주호는 그것이 일부 공감이 되었다.

남궁한은 이미 장자를 잃었다.

거기에 하나 남은 딸에게까지 호시탐탐 알 수 없는 손길이 미쳐오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요전에 그녀를 품에 안는 남궁한의 모습은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자네에겐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네. 연초에도 그렇고 이번 역시도 그렇고 큰 도움을 받았으니.”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주호의 겸손에 남궁한은 손사래를 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남궁연이 사로잡혔을 터고, 남궁세가는 정말로 큰 타격을 입었으리라.

“작금 연이에 대해 수를 써온 것은 연초에 있었던 일에 대한 보복이겠지.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가 안휘에 숨어든 마교 지부를 대대적으로 타격하지 않았던가.”

남궁한의 말에 이번엔 주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마침 그 시기가 월영사신으로 활동했을 때와 딱 맞아떨어졌으니.

“월영사신이라 했던가?”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부끄럽긴. 무슨 연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근래 개인이 단신으로 마교에 그렇게까지 피해를 준 적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네.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주호는 그 말에 술잔을 묵묵히 기울였다.

마교와 사도맹의 지부를 습격한 것은 옛 동료들의 원수와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서 한 일. 개인의 명성과 일신의 안위를 위해 한 것이 아니었으니 칭찬을 받아도 머쓱할 따름이었다.

“지금도 물밑에선 암투가 계속되고 있다네. 안휘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그러하지. 마교 역시 작정했는지 이젠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네.”

“…그렇습니까.”

주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사흉수의 세력이 마교의 잔당으로 위장해 분열을 일으키려는 것에 강한 주장이 실리고 있는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들의 목적인데.’

왜 굳이 정파와 마교의 불화를 심화시키는가.

애초에 그들은 서로 공생할 수 없는 관계. 그렇기에 정도와 마도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었다.

-사흉수는 대대로 중원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보여왔다네.

문득 사신문에서 들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만약 사흉수가 마교를 사칭하고 있는 것이 전쟁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라면?

정파와 마교가 서로에게 칼날을 들이밀면 이득을 보는 것은 제 삼의 세력이다.

하지만 꼭 사흉수만이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파의 무리도 있었고, 황제도 있다. 세외 역시 넓었기에 사흉수 말고도 수많은 세력이 존재할 터.

주호는 살짝 고민에 잠겼다.

‘남궁한은 사흉수에 대해 알고 있는가.’

정말 기밀로 취급하는 정보라 외부인인 자신에게는 마교의 정보까지만 풀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사흉수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농후했으니 새삼 머리가 아파져 왔다.

“뭐,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복잡한 생각들 위로 남궁한이 종지부를 찍었다.

다시금 그들은 술잔을 나눴고 조금 전까지와는 분위기를 바꾸어 가벼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자네가 맹주의 숨겨진 사제라지? 아무래도 이건 좀 놀랐네. 설마 그 깐깐한 노인네에게 자네 같은 젊은 사제가 있을 줄은.”

“사제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실력입니다. 스승님께서 워낙 늦게 저를 들이셔서.”

“되었네, 자네가 부족하다면 그 누가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겠는가. 그보다 자네를 초대할 예정이라고 서신을 보냈더니 만나게 된다면 맹에도 한 번 얼굴을 비춰달라고 하더군.”

“맹주님이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학관에 온 뒤로 단 노인과 연락을 취하지 않은 주호였다.

학기 중에는 학관의 일로, 이때까지는 사신문의 일로 바쁜 상황이었다.

그렇다곤 하나 자신을 신경 써준 이가 아닌가. 가족을 제외하곤 가장 깊은 관계인 그였기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남궁한은 입을 다물고 있는 주호의 모습을 훑었다.

사내다운 건장한 풍채. 자신조차 감탄이 나오는 수려한 외모.

‘겉모습으로만은 문제가 없군.’

물론 알맹이 역시 흠잡을 곳이 없다.

딸내미의 서신에 의하면 성격은 강직했고 모난 곳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거기에 술이나 주색잡기를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하니 정도를 걷는 그에겐 기꺼운 소리였다.

‘거기에 무공도 말이지.’

남궁한이 눈여겨보는 요소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무공의 성취였다.

딸아이와 섬뢰단 부단주에게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었거늘, 막상 마주하자 내심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현재 세가에 있는 이들 중 은거한 고수를 제외하고 주호에 대적할 수 있는 고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그 이전에 받은 맹주의 서신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반로환동이라도 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을 터.

‘난세는 영웅을 부른다고 하더니.’

그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는지 작금의 강호는 주호라는 걸출한 신진고수를 배출해내었다.

남궁한은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아들이 생각났다.

나이도 같고, 무공의 성취 그리고 서로 마주하고 있노라면 느껴지는 분위기까지 비슷하지 않은가.

평상시엔 제 어미를 닮아 따뜻한 마음을 지녔지만, 검만은 자신의 것을 물려받아 무궁무진한 재능을 품고 있었던 그때의 아련한 기억이 눈가를 스쳤다.

“…….”

남궁한은 입을 다문 채 씁쓸한 눈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주호 역시 그의 표정으로 말미암아 남궁한이 아들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궁벽이라.’

무황의 비동 안에 있는 조사대의 일원 중 한 명. 주호 역시 살아남기 위해 시체를 뒤적거리던 중 그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검절 남궁벽.

남궁세가의 후계로 내로라하는 검의 고수.

다른 이들 역시 예사롭지 않은 인들이었지만, 검절과 남궁세가라는 이름은 주호에게 좀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었다.

탁.

하지만 그 역시 입을 다문 채 술잔을 기울였다.

천우희를 제외하곤 비동의 이야기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 또한 그 일을 함구하겠노라 스스로 맹세까지 했다.

사신문은 주호가 청룡의 이름을 계승한 것에 중점을 둘 뿐, 그것을 어디에서 익혔는지, 또는 어떤 방법으로 물려받았는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주호 자신도 더는 이것을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미안하군, 잠시 옛 생각이 나서.”

잠시간의 침묵 끝에 정신을 차린 남궁한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사과를 건넸다.

“아닙니다. 그럴 수 있지요.”

“고맙네.”

주호의 배려에 그는 가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화제를 달리했다.

“참, 우리 연이가 학관에서는 어떤가? 내 걱정되어 여기저기 주워들은 이야기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자네의 시선이 좀 더 정확하겠지.”

“하하, 남궁연 소저 말입니까.”

“소저는 무슨. 편히 말하게, 우리가 남도 아니고.”

남궁한은 짐짓 허심탄회한 태도로 이야기했으나, 주호는 가벼운 미소만 지었다.

보통 아버지들은 딸에 대해 맹목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남궁한이 남궁연에게 가진 그것 역시 소문이 자자한바. 그렇기에 주호는 이전과 같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말했다.

“당장 보자면 학관 내에는 남궁 소저보다 뛰어난 관생이 많습니다.”

“그렇겠지. 사실 그 아이가 수석입관생이 되었다는 소리에 살짝 의아했다네. 일전에 본 명문의 후기지수들은 연이보다 성취가 높았으면 높았지, 절대 낮지 않았으니.”

“입관 시험엔 여러 가지 요인이 포함되지 않습니까. 다른 부분에서 남궁 소저가 우수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초기엔 그랬을지도 모르나,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른다면 그들은 모두 남궁 소저에게 뒷덜미를 붙잡히고 말 겁니다.”

주호가 본 남궁연의 재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단지 상태창에 上上이라 표시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 자신의 무공을 완벽히 이해한 상태에서 펼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과의 대련에서 낭패를 보는 일이 없었고, 항상 무언가를 얻어갔으니.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 했습니다. 남궁 소저는 같은 것을 보더라도 이해의 깊이가 남다르지요. 그렇기에 지금 당장은 그 성취가 낮아도 시간이 흐르면 분명 달라질 겁니다.”

“흠…….”

남궁한은 흐뭇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제 자식의 칭찬을 하는데 싫어할 아비는 없었다.

하물며 그것이 학관에서 그녀를 직접 가르치는 교관의 말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으니.

“아버님? 교관님도 여기 계셨군요.”

그러던 차, 남궁연이 의아한 얼굴로 정원을 들어왔다.

둘은 이미 옛적에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던바. 그렇기에 서로를 바라보며 슬쩍 웃고는, 남궁한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소협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독점하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다른 이들과 안면을 틀 시간은 주셔야지.”

남궁연은 조용히 자신의 아버지를 나무랐다.

물론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한과 인연을 쌓는 것은 그 누구를 만난 것보다 이득이 되는 것을 부정할 순 없지만, 주호는 아직 무림초촐인 입장이다.

때로는 얕고 넓은 관계가 더 도움이 될 수 있기에 한 이야기였으나, 남궁한은 짓궂은 얼굴로 농을 던졌다.

“녀석. 벌써 이 아비보다 주소협을 챙기는 것이냐.”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주세요. 교관님과는 아직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남궁연은 슬쩍 주호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분명 그사이 한순간의 망설임이 서려 있던바.

“…어?”

남궁한의 얼굴이 굳었다.

그로선 당연히 농으로 던진 말이었다. 어떤 남자를 만나도 매몰차던 태도를 보이던 딸이었기에 술기운에 내뱉은 것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잠시 사고가 경직되고 말았다.

“자, 잠깐…….”

“이미 시간이 늦어 제가 대신 연회 자리를 파했어요. 교관님도 거처로 모셔다드리고 올 테니 아버님도 부디 거기까지 하시고 처소에 드시길 말씀 올립니다.”

하지만 남궁연은 매몰찬 태도로 그것을 무시했다. 그러곤 살포시 주호의 소매를 잡아 이끌었으니.

“…하하.”

주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한이 멈칫거리며 손을 내밀지만, 주호는 슬쩍 눈인사하며 자리를 떠났다.

“…….”

연회는 한참 전에 끝났고 남궁한만이 홀로 그곳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술잔만은 제 주인의 복잡한 상념을 대변하듯 밤이 깊어질 때까지 멈추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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