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한 시진 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내공을 아끼지 않고 달려댄 덕분에 진짜 신호탄이 터진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가주님.”
서둘러 온 것은 좋았지만, 마차로 이틀 거리를 뛰어넘어온 탓에 모두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아무리 정예 무인이라 할지라도 잠시간의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기에 섬뢰단주가 남궁한을 불렀다.
“내가 앞장선다. 나머지는 천천히 뒤를 따르도록.”
하지만 기다릴 시간은 없다는 듯 남궁한은 숲 안쪽으로 들어섰다.
수풀과 나무가 울창한 곳이었기에 적의 습격을 대비하여 조심스레 진입해야 했지만, 그는 아무런 주저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은 경지에 오른 고수의 자존심이자 딸의 안위가 걱정되는 아비의 마음에서 나온 행동.
남궁한의 두 눈이 시퍼런 안광을 내뿜으며 어둠 속을 이 잡듯 뒤질 때, 그 뒤를 쫓던 수하들이 바닥에 누워있는 싸늘한 시신을 발견했다.
“숨이 끊어진 것이 한 시진쯤 되었습니다.”
신호탄이 쏘아졌을 때와 비슷한 시각에 사망한 시신이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습격한 무리 중 하나로 보이는 이.
이곳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남궁한은 인원을 나눠 흔적으로 찾도록 명했다.
쉬시시식-
수십 명의 섬뢰단원들이 섬전처럼 몸을 날려 숲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곧 숲 곳곳에서 숨이 끊어진 시체들이 발견되었고 그 합이 팔십구에 육박할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생각보다 적들의 수가 많습니다.”
그 옆에서 보고하던 섬뢰단주가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기껏해야 소규모 습격을 생각했는데 적들의 수가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이 정도라면 섬뢰단 전체가 나서야 했을 정도였으니.
‘안휘이 이 정도 외부 세력이 들어왔거늘 눈치채지 못했다니.’
남궁세가의 실책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기에 남궁한은 입술을 잘게 씹었다.
“모두 한 명에게 당했군.”
시신을 살피던 남궁한은 그들의 몸을 베고 지나간 궤적이 모두 한 사람이 만들어낸 흔적임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매화선풍검 남사일이 일행을 탈출시키기 위해 홀로 적들과 맞서 싸운 줄로만 알았으나, 화산의 검은 이렇게 패도적이지 않았다.
‘초식도 무공도 없다. 단지 극한의 효율적인 동작으로 일 검에 한 명씩 해치웠군.’
“가주님! 섬뢰단의 무인들을 찾았습니다만…….”
수하의 말에 남궁한은 황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암수에 당한 듯 급소를 당해 바닥에 누워있는 무인을 볼 수 있었다.
“…….”
모두 일말의 기대조차 할 수 없이 숨이 끊어진 상태.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섬뢰단의 무인들이 이를 악물며 분노를 참아냈다.
“모두 수습해라.”
남궁한은 담담한 표정으로 시신의 수습을 명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세가의 식구이자 가족이었다. 고작 이런 곳에서 누울 이들이 아니었기에 가슴이 아파 왔다.
“아가씨께서 계십니다!”
더욱 안쪽에서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말이 들려왔다.
파바박-!
남궁한은 지금껏 보였던 움직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땅을 박찼고 옅은 잔상까지 남기며 소리의 근원지로 떨어져 내렸다.
“연아!”
넓은 공터를 중심으로 몇 대의 마차가 죽 늘어서 있다.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듯 복면을 뒤집어쓴 괴한들의 시신이 한가득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이 끝났는지 대부분 지친 얼굴로 앉아 있던 상태. 남궁한의 등장에 환한 얼굴로 그들을 맞아주었다.
“아버님!”
남궁한은 자신의 딸을 품에 안았다.
그 심장 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부단주 정말로 수고했네.”
“아닙니다, 아가씨께서도 훌륭하게 적을 격퇴하셨습니다.”
남궁연을 호위하던 섬뢰단의 무인들은 전부 상처투성이였다.
정천학관의 후기지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악전고투하였는지는 보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지는바.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망한 이가 몇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남궁한은 반 시진 사이 십 년은 더 늙은 것 같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곧 그 뒤를 따라 섬뢰단의 무인들이 속속히 주위로 모습을 드러냈고 근방에 생존한 적이 없다는 말에 그들은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남장로 정말 고생하셨소이다. 내 이에 대한 보은은 나중에 톡톡히 하도록 하겠소.”
남궁한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던 남사일에게 몸을 돌려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표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수고는 주교관이 했지요. 습격한 적 중 상대하기 힘든 고수가 있었습니다만, 주 교관이 매서운 신위를 발휘해 쓰러뜨렸습니다.”
“저 청년이.”
주 교관이란 말에 남궁한이 눈을 빛냈다.
일찍이 그는 섬뢰단의 보고와 남궁연의 서신에 적힌 내용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바.
이번에 세가에 초대한 것도 안면을 트기 위해서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더없이 좋은 판단이 되었다.
아직 이립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눈부신 성취를 이뤘다고 했지만, 지금 그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를 보아하니 결코 함부로 평가할 것이 아니었다.
“주호입니다.”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을 깨달은 주호가 그들에게 다가와 포권을 취했다.
남궁한 역시 극진한 태도로 그것을 받았고, 주호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정말로 고맙네. 남궁의 이름으로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지.”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남궁세가주 정도 되는 인물에게 빚을 지워두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으니.
‘이것이 당대의 검제(劍帝).’
남궁한이 주호에게서 비범함을, 주호 역시 남궁한에게서 감히 가늠하지 못할 경지를 느꼈다.
당대 천하제일가를 이룩한 절대 고수 중 한 명의 등장에 주호는 흥분되는 마음이 컸으니.
“이놈들 약에 취한 상태였던 것 같은데?”
그때, 상황의 정리 중이던 섬뢰단의 무인 사이에 껴서 시신을 뒤적거리고 있던 당천유가 뜨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이라고 했나?”
남궁한이 관심을 보이자 당천유는 살짝 경직된 표정으로 제 손에서 작은 침을 꺼냈다.
“피에 들어있는 이질적인 것들을 밝혀내는 침입니다. 순수한 피가 아니라면 침이 검게 물들죠.”
그는 여러 구의 시신에 침들을 꽂았다. 곧 그것들은 여지없이 모두 검게 물들었으며 모두의 신음을 자아냈다.
“거기에 보통 혈액보다 더 끈적하고 이상한 냄새까지 나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당천유의 말대로 초목을 물들인 피는 아직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꿀을 섞은 것처럼 질척거리기 짝이 없었다.
공기 중에서 느껴지는 피 내음에도 분명할 정도로 이질적인 악취가 느껴지는 상황.
“역시 마교군요. 마인들에게 이지를 상실하게 하는 약을 주입해 오로지 명령만을 따르도록 훈련한 다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설마 진짜일 줄은…….”
당천유는 질린다는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참, 생포한 이가 있습니다. 적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인데 혹시 몰라 제압해두었습니다.”
“그런가.”
적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이를 생포해뒀다는 말에 남궁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문이든 협박이든 수단을 가리지 않고 마교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낼 생각이었다.
설사 정도(正道)에 반하는 일일지라도 상대는 마교의 인물. 사정을 봐줄 생각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돌아가도록 하지.”
남궁한의 말에 그들은 모두 남궁세가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혹시 모를 조사를 대비해 마인의 시체도 몇 구 챙겼고, 나머지는 모두 태워버리는 것으로 정리했다.
특히 사로잡은 남진은 단전을 파괴하고 사지 근맥을 끊은 채 포박하기까지 했으니.
“여러분도 고생하셨습니다. 이제부턴 저희가 모시도록 하지요.”
남궁한이 먼저 걸어나가자 섬뢰단주가 남은 이들을 안내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의 뒤를 쫓으며 주호는 싸늘히 식은 적들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표면적으로는 흉수가 마교라 결론 난 상태지만, 주호는 상태창으로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흉수. 어째서 마교를 사칭하고 있던 것이지?’
설마 후기지수를 납치했다는 것을 퍼트려 세력 간의 균열이라도 초래하려는 것인가.
“…뭐, 그것은 사로잡은 녀석에게 물어보면 되는 일이니.”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주호는 피가 진득하니 묻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싸움 중이라 경황이 없었지만, 머리끝까지 끓어오르던 피가 식으니 조금 전의 자신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맹목적인 살심(殺心).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죽여야만 해야 한다는 마음과 진득한 피 냄새를 갈구하는 갈증이 목을 타게 했다.
꽉.
주먹을 쥐니 평상시와 다름없는 감각이 느껴진다. 그렇기에 더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망량환혼진 때부터였나.’
망량환혼진.
진정한 사신수로 인정받기 위해란 명목하에 치러진 시련 이후 무언가 생소한 감각이 드문드문 드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엔 상승 경지의 벽을 허물고 위로 올라서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만, 이쯤이 되니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부디, 별일 아니기를 바래야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주호는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행을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
밤새 이동한 끝에 정오에 이를 즈음 그들은 남궁세가에 당도할 수 있었다.
밤사이 있었던 격렬한 싸움으로 인해 한 명 한 명이 모두 녹초가 된 상황.
남궁한의 배려 덕에 쓸데없는 행사는 모두 생략하고 모두 휴식에 들어갔다.
개중 남사일은 한 주간 요양해야 할 정도의 상처를 입었기에 일행의 관리는 주호의 몫이 되었다.
그렇게 이틀 후, 모든 피로를 씻어낸 그들은 말끔한 모습으로 남궁세가에서 개최된 환영식에 참여했다.
비동의 혈사 당시 차기 가주 후보였던 검절 남궁벽이 실종 당해 한동안 휘청거렸지만, 그럼에도 천하제일가의 이름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다.
식객을 비롯해 세가의 일을 거들고 있는 수많은 인사가 연회에 참여해 그들을 반겼고, 정천학관의 후기지수들은 제각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특히 화산의 소신룡으로 유명한 선우연을 비롯해 같은 세가 연합의 출신인 당천유와 악비산 역시 많은 관심을 받았으니.
물론, 주호 역시 적지 않은 이목을 끌어모았다.
연초 천무학관과의 연합 연회에서 풍운검 강무석을 꺾었고, 동년배에선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성취를 얻었다고 알려진 상태니 당연한 결과.
일부에선 설마 이립도 되지 않은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겠냐고 말이 나왔지만, 그와 동행했던 섬뢰단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입을 보태자 제법 신빙성 있는 말이 되었다.
이십 대 중반의 절정 고수.
사실 그보다 더 윗선의 경지를 이뤄냈지만, 알려진 사실로도 충분히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작금의 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초고수들의 전철을 밟아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세가로 복귀하던 남궁세가의 일행을 습격한 천마신교의 흑영수라대 대주를 사로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것은 그 주장에 뒷받침이 되어 이목이 쏠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궁세가는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널리 알렸다.
주호가 자신들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였으며,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작업이었다.
“잠시 나 좀 보겠나.”
연회의 중간, 몇 명인지 모를 무인의 인사를 받던 주호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한의 등장에 그 주위는 쥐 죽은 듯 침묵에 잠겼다.
수많은 이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물러난다. 오직 주호만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등 뒤를 쫓았을 뿐.
연회장을 나선 그들은 남궁한의 개인 정원에 들어갔다.
한줄기 강이 장원 중심에 흘렀고 그 위로 작은 누각이 자리했다.
간단히 준비된 술상을 두고 남궁한은 기꺼운 얼굴로 그에게 앉으라며 손짓했다.
“자네에겐 많은 도움을 받았네.”
“미흡한 실력이 도움이 되어 기쁠 따름입니다.”
“허허, 겸손해하지 않아도 된다네.”
자네 정도의 고수라면 그렇지 않으냐는 표정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상태창]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이름: 남궁한
별호: 검제(劍帝)
직업: 남궁세가 가주
나이: 예순다섯
소속: 남궁세가
무공: 천뢰제왕신공
경지: 화경(二/十)
호감도: 上上
남궁한 역시 단 노인과 더불어 화경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으니, 그 눈을 피할 순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