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그래서 말이네…….”
사람이 늘어나자 마차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다만, 전부가 한 마차에 탈 순 없기에 남궁진영과 남사일은 다른 마차로 이동했고, 주호와 마부를 비롯해 일곱 명의 후기지수가 동승 했다.
‘이것도 나쁘진 않군.’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주호는 미소지었다.
그가 언제 이러한 경험을 해보았겠는가.
일곱 명의 후기지수들은 각자 한 달간 있었던 일들로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각자 사문이나 고향에 다녀온 듯 일어난 일이나 지금까지의 근황을 말하며 쌓였던 해후를 풀어냈고, 주호는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남궁 소저는 예전보다 더 기세가 출중해진 것 같소.”
위천강이 슬쩍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예전이라면 어쭙잖은 수작부리지 말라며 싸늘한 눈길 한 번으로 이야기가 끝났을 테지만, 이번 학기 동안 같은 수업을 들으며 어느 정도 친분을 다진 그들은 그때보단 거리가 많이 가까워진 상태였다.
“아직 많이 부족할 따름이에요.”
“아니요, 소저가 부족하다면 이곳에서 그 누가 성장하였다 할 수 있겠소?”
그가 동의를 구하듯 다른 이들을 바라보자 그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환심을 사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주호만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의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근 한 달간 저런 성장세라니.’
위천강은 점수를 따기 위해 입 발린 소리를 내뱉은 이야기였으나, 그녀의 성장은 눈부시기 짝이 없었다.
다른 이들 역시 수련을 빼먹지 않았는지 각자 원래 경지에서 한두 발자국 앞으로 나가 있었지만, 그녀는 몇 단계 이상으로 성장했다.
자신은 그저 앞으로 가야 할 방향만 조금 짚어주었을 뿐, 저런 성장을 이룩한 것은 오로지 본연의 공이 컸다.
‘재능이라는 건가.’
그토록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얻지 못했던 무언가.
하지만 이젠 그마저도 상관없어졌기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교관님, 하나 여쭤보아도 될까요?”
“음?”
후기지수들끼리 나누던 대화의 주제가 자신에게로 향했다.
주호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내 남궁연 역시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남에서 저희와 합류했을 때 있었던 여인과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여인?”
남궁연의 말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들의 화제는 순식간에 주호의 여인으로 뒤바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금 정천학관의 교관 중 주호의 인기는 수위를 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래도 그 수려한 외모로 뭇 여성들의 방심을 설레게 했다.
거기에 개관 전에 있었던 천무학관과의 연합 연회에서 초일류 고수인 풍운검 강무석을 꺾었다는 소문이 여러 교관의 입을 통해 사실임이 입증되기까지 했으니.
물밑에서 돌아다니던 연줄로 학관에 들어왔다는 의혹은 자취를 감췄고, 젊은 나이임에도 고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선망 어린 시선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은 주호였지만, 그가 특정한 대상과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연이 보기에 그 당시 천우희가 보였던 반응은 평범한 남녀 사이라고 말하기에 힘들어 보였다.
“지인이다.”
“지인이라고 보기엔 각별한 관계라고 보였는데요. 그러고보니 학관 초에 갑자기 괴한의 습격을 받아 며칠간 나오지 못하셨을 때, 수발을 들고 계셨던 것도 그분이었던 것 같네요.”
“…….”
주호는 그녀가 설마 그렇게까지 말해올 줄은 몰랐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 둘 사이에 감도는 미묘한 분위기에 두 눈만 움직이며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 제가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마차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지금껏 실없이 떠들며 은근한 태도로 남궁연에게 말을 걸던 위천강은 죽은 듯이 입을 다물었고, 당천유와 악비산을 비롯한 다른 이들마저 시선을 회피했다.
오직 천후만이 그런 둘 사이에서 입술을 깨물며 복잡한 속내를 숨기지 못했으니.
‘스승님과도 그런 관계이면서 남궁 소저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 그의 손이 떨리는 와중, 누군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하하, 교관님 이직 제의도 많이 받으시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다른 곳에 생각이 있으신 건 아닙니까?”
선우연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안은 많이 받았지. 하지만 굳이 지금 상황에서 옮길 생각은 없다.”
뭐라 말하기 곤란한 상황에 끼어있던 주호는 냉큼 대답을 받았고 남궁연은 살짝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닫았다.
정천학관은 중원제일학관인 만큼 교관의 수준이 높다. 그러니 자연스레 여러 문파에서 자신들의 소속이 되라며 제의가 오기도 했다.
주호 역시 적지 않은 곳에서 제의를 받았다.
각 지역에서 힘을 쓰는 유력 문파에서부터 심지어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에 소속된 곳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는 다양했으니.
“마음 같아선 저희 화산으로 모시고 싶습니다만.”
선우연이 아쉬운 듯 말을 흐렸다. 첫 만남은 최악이기 짝이 없었지만, 그동안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주호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였다.
지금에선 겉으론 투덜거릴진 몰라도 남사일보다 더 잘 따르지 않는가.
“여차하면 내가 문파를 만들면 되겠지.”
주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자 악비산이 눈을 빛내며 그것을 물었다.
“개문하실 생각입니까!”
문파를 만든다는 말은 거창했지만, 강호에 하루에도 수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바로 문파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고수가 움직인다면 말이 다르지.’
힘이 있는 곳에 돈이 몰리고, 돈이 있는 곳엔 사람이 몰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와도 다름없다.
주호의 나이는 아직 이십 대 중반에 불과했으나, 매화선풍검이 벅차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젊을 때도 이러할 진데 시간이 흘러 연륜이 쌓인다면 어찌 될지 기대마저 들었다.
‘여차하면.’
악비산은 산동악가에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산동악가는 세가 연합 중에서도 오대 세가라 칭해지는 명문. 하지만 그렇기에 방계인 그가 갖는 한계는 오히려 명확했다.
악비산의 야망은 세가의 그 누구보다 컸다.
고작 세가의 가주 자리가 아니라 중원 전역을 울리는 고수가 되어 곳곳을 누비고 싶었다.
‘악가의 이름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따라간다.’
악비산은 조용히 자신의 가슴에 다짐했다.
***
남궁세가가 위치한 안휘는 하남과 바로 맞닿아 있는 지역이었다.
며칠에 걸친 여정이 거의 끝나갔고, 그들이 타고 있던 마차는 막 안휘에 들어선 상태였다.
“윽…….”
하지만 마차 안의 풍경은 조금 이상했다. 얼마 전까지 멀쩡했던 그들은 누구랄 것 없이 신음을 내뱉고 있었으니.
“어디 한 군데 날아간 것도 아니고, 무인이 고작 그런 상처 하나 가지고 종일 그러고 있을 거예요?”
남궁연은 제 몸 한 군데씩 붙잡고 끙끙거리는 남성 진들을 보며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남궁 소저, 소저도 알고 있지 않소. 교관님의 공격에 맞으면 뼈가 부서지는 듯한 욱신거림이 계속된다는 것을.”
“아니요, 저는 맞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주호는 안휘로 가는 도중 제자들의 단련을 개시했다.
휴관했으니 교관의 직무를 이행할 필요는 없었지만, 자신의 기세에 별다른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물러난 것에 재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
당연히 반론은 없었다.
애초에 반론할 여유도 주지 않고 그들을 몰아붙였고 마차가 멈추는 밤마다 사정없는 대련이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남궁연을 제외하곤 멀쩡한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호가 그녀를 편애한 것은 아니었다.
대련은 각자의 실력에 맞춰 이루어졌고, 남궁연만이 완벽한 대응으로 주호를 상대했다.
주호의 공격은 신묘하기 짝이 없었다.
외상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내기가 섞인 타격이었기에 그 기운은 그대로 타격 지점으로 스며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신체를 자극해 더욱 강하게 몸을 단련시켜주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강한 통증을 유발하니 혹독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그들의 대련을 흥미 깊게 지켜보던 남사일이나 남궁진영을 비롯한 섬뢰단의 무인들까지 몸서리칠 정도였다.
“오늘부로 대련을 끝낸다. 각자 푹 쉬도록.”
“…후.”
남궁세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짧으면 이틀, 길면 사흘거리까지 다가왔기에 대련의 끝을 선언하자 후기지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남궁세가에 가서도 골골거리면 안 되니 말이지.’
밤이 되자 마차는 멈추고 말들은 휴식에 들어갔다.
그들은 숲의 중앙에 있는 공터에 자리 잡고는 모닥불을 피워 그 앞에 옹기종기 앉아 제 몸을 주무르며 편히 휴식을 즐겼다.
“남궁세가라.”
“선형은 남궁세가에 가본 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당천유의 말에 선우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열 살 즈음이었던가, 구파일방과 세가 연합의 회동이 남궁세가에서 열렸었지. 그때 스승님을 따라 한 번 가본 것이 전부라네.”
아쉽게도 남궁 소저를 보진 못했다며 그는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땐 검절께서, 음…….”
계속해서 당시의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선우연이 멈칫했다. 남궁세가에게있어 검절 남궁벽의 이야기는 금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무황의 비동 사태에서 실종된 수많은 고수가 사망 처리된 상황에서 남궁세가가 얼마나 절실하게 그를 찾아 헤맸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
자신의 실언에 그는 입을 다물며 슬쩍 남궁연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그녀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니.”
“소저.”
선우연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담담한 목소리로 말해왔지만, 그 당시의 그녀가 얼마나 슬퍼했겠는가. 다른 이들 역시 숙연한 분위기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무황의 무공이라. 얼마나 대단할지.”
그때, 위천강이 의문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천유가 그 옆에서 슬쩍 눈치를 줬지만, 악비산이 콧김을 내뿜으며 말한 탓에 허사가 되었다.
“상승 무공이라 해도 거기서 거길 테지. 나는 악가의 무학이 결코 그보다 낮지 않다고 생각하네. 무황의 강함은 오로지 그의 본신에 새겨진 힘일 테지. 자네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다들 그 말에 공감하는 바였다.
각자가 소속된 가문의 것을 최고이자 최강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당연하였으니까.
“…교관님인가.”
잠깐의 침묵은 풀을 밟으며 울려 퍼지는 소리에 깨어져 나갔다.
“후.”
근처 냇물에서 간단히 씻고 온 주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이면 이제 이런 노숙은 끝을 맞이했으니.
일행이 있는 모닥불로 돌아갔을 때, 제자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봄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교관님, 교관님은 무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무황?”
뜬금없는 물음에 주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그들은 조금 전에 나눴던 대화를 다시금 말했고, 이야기를 전부 들은 주호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무황이란 이름은 그에게 있어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보진 않았지만, 고금제일인이라 불린 만큼 대단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도 옛날엔 지금처럼 무공이 이렇게 발달하지 않았을 수도 있잖습니까. 만약 제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천하제일은 몰라도 십 대 고수가 될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죠.”
위천강의 장난기 어린 말에 그들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주호 역시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발상이군. 나는 무황이 돌아온다면 일초지적도 되기 힘들다고 생각했거늘.”
“에이,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너무 지나친 억측이라며 위천강은 고개를 저었다.
모닥불 앞에 앉아 머리를 말리던 주호에게 있어선 한 치의 과장 없이 한 말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적으로서 눈앞에 마주한다면…….’
자신은 고작 칠성에 이르는 경지로 이 정도의 힘을 끌어냈다.
하지만 청룡신공을 대성하고 그 위의 경지를 밟은 무황과 싸우게 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군.’
질색하는 얼굴과 함께 그는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