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마차로 이동 중, 주호는 남궁연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겉으로는 평온한 분위기였지만, 실상 그의 속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안휘로 돌아올 줄은 몰랐거늘.’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자니 비동에서의 생활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했다.
학관 생활을 겪으며 조금 퇴색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이번 망량환혼진의 일로 다시금 선명하게 뇌리에 각인되었으니.
‘남궁세가라, 남궁이라면 검절이 그 안에 있었지.’
검절 남궁벽.
무황의 비동 탐사대의 일원으로, 그의 주검 역시 비동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살기 위해 그 시신들 사이에서 먹을 것을 뒤졌을 때 몇 번이고 확인해본 것이었으니 틀림없을 터.
남궁세가 자체는 소가주가 사망한 것 때문에 봉문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고 하니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리라.
주호가 살짝 복잡한 마음을 품었을 때, 마차는 곧 하남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속도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것에 남궁진영은 마부석에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게, 일단의 무리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무엇이?”
아직 하남을 벗어난 것도 아닌 데다 마차에는 남궁세가의 표식이 새겨진 깃발이 달려 있다. 마차를 막아 세운 것이 어느 간 큰 놈들인지 주호는 헛웃음이 나왔다.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남궁진영이 밖으로 나갔다.
“요즘 도적들은 눈이 어두운가 보구나. 감히 남궁세가의 문양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
그 말에 남궁연은 어색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
그 이해하지 못할 반응에 주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를 찰나, 마차를 가로막은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기시감에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여섯, 아니 일곱인가.’
여섯은 그럭저럭 실력 있는 고수였지만, 마지막 한 명은 무시하지 못할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남궁연을 호위하는 섬뢰단의 실력 역시 대부분 일류에서 초일류 사이. 부단주인 남궁진영은 초일류에서도 완숙에 이른 고수였다.
과연 남궁세가라고 감탄할 전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길을 막아선 괴한들을 상대하기에 힘들어 보였다.
“나도 나가보아야겠군.”
주호도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의 문을 열었다. 밖을 나가자니 마차의 맨 앞, 길을 막고 선 일곱 명의 괴한을 볼 수 있었다.
“감히 남궁세가의 행보를 막다니!”
“가능하다면 뚫고 지나가 보던가.”
제일 선두에 선 복면인의 목소리에 주호는 살짝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데. 마교? 아니, 그때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죽였다. 굳이 꼽으라 한다면 사흉수인가.’
현재 자신들을 습격할 곳을 굳이 특정하라면 마교와 사흉수의 세력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은 사흉수라면 왜 주작과 함께 있을 때 습격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고 마교라고 생각하기엔 상대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쿵.
괴한 중 가장 강한 기세를 가진 이가 한 발자국 내디뎠다.
절정의 기세가 사방을 장악했고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주춤하는 얼굴로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큭.”
남궁진영조차 입술을 깨물며 주춤할 정도의 기세였기에 주호가 앞으로 나섰다.
가볍게 손을 휘저은 그는 괴한의 기세를 사방으로 흩어버리고 청룡신공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우웅-
거센 파동과 함께 시퍼런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솟구친다. 주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배후를 부는데 입이 여러 개일 필요는 없겠지.”
농밀한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와 조금 전 괴한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짓눌렀다.
“……!”
괴한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제일 강한 기세를 품고 있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물이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주호는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쐐애애액-!
전광석화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속도였다.
푸른 궤적이 허공에 깔끔히 새겨짐과 동시에 주호의 신형은 괴한들의 앞까지 육박했다.
쉬이이익!
시퍼런 검기가 피어오른 청룡신검이 휘둘러진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괴한들은 하나같이 아차, 하며 뒤로 물러났으나 제일 앞에 있어 표적이 된 이만은 몸을 빼내지 못했다.
“큭!”
물 흐르듯 뽑혀 나온 괴한의 검으로 농밀한 검기가 피어올랐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의 놀라운 신위로 주호의 검을 막아내는 듯싶었지만, 그것은 날카로운 고성과 함께 주인의 의지를 배반했다.
캉-!
허공으로 치솟은 검이 파공성을 일으키며 한참이나 옆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주호는 빈손이 되어버린 괴한을 보며 다시금 검을 치켜세우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자, 잠깐! 자네, 나일세, 나야!”
괴한은 황급히 손을 휘적거리며 복면을 벗었다.
식은땀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정천학관의 일급 교관이자 화산파의 장로인 매화선풍검 남사일이었다.
그가 복면을 벗자 뒤에 있던 이들도 다 제 복면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던 주호는 흘깃 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남궁진영을 비롯한 남궁세가의 인물들은 흠칫하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뭐, 저도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습니다.”
주호는 상태창을 얻고 난 뒤로 모르는 사람과 만났을 때 상태창을 호출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렇기에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괴한들의 상태창을 확인했고, 그곳에 떠오른 낯익은 이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매화선풍검 남사일.
화산의 장로이자 정천학관의 일급 교관인 그가 왜 복면을 뒤집어쓰고 자신 앞에 있단 말인가.
처음엔 학관에 잠입하려던 주작의 말이 떠올랐다.
정천학관주인 설우진이 사흉수와 긴밀한 관계다.
즉, 사흉수의 끄나풀인 그가 남사일을 회우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지만, 곧 그 옆으로 죽 늘어서 있는 이들의 이름을 보곤 재미삼아 장단에 어울려준 뿐이었다.
“너희들은 또 왜 이곳에 있는 것이지?”
선우연을 비롯해 그에게 가르침을 받는 여섯 제자가 그곳에 자리했다.
심지어 산동으로 가서 그의 가족을 호위했다던 천후까지 있었으니 주호는 황당함을 넘어 기가 찰 지경이었다.
‘남궁세가의 태도로 보아 사전에 이야기되었던 것이군.’
“이들은 잘못이 없다네. 모두 내가 계획한 일이지. 원래라면 자네와 용호상박의 싸움을 벌여 이들에게 좋은 경험을 심어주고 싶었지만 말이야.”
겸사겸사 오랜만에 비무를 하고 싶었지만, 일초지적도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며 그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남사일은 등 뒤로 숨긴 손이 아직 경련하는 것을 보곤 씁쓸함을 되삼켰다.
‘이젠 상대조차 되지 않는구먼.’
남사일은 물론 그 뒤에 서 있던 후기지수와 상황을 지켜보던 남궁세가의 무인들까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호가 강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한 학기 동안 일류에서 초일류 사이에 이른 일곱 명의 후기지수의 공격을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받아냈던 그다.
하지만 남사일이 누군가.
그는 당대 화산신룡보다 더욱더 촉망받던 화산의 기재였다.
어릴 적 두각을 보였던 엄청난 재능은 세월이 흘러 매화선풍검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한 꽃봉오리를 피워올렸으니.
비록 지금은 정천학관의 교관으로 있지만, 그가 강호를 주행할 때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매화선풍검의 위명이 높아졌다.
하지만 그런 남사일조차 주호의 일 초를 받아내지 못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연신 눈을 비비고 있으며, 그 뒤에 있던 후기지수들 역시 괴물인 것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까지 몰랐다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미리 아셨다면서 왜 그리 저희를 겁박하셨습니까.”
선우연이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 내리며 물었다.
조금 전 주호와 마주한 그는 정말로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온몸이 난자되고 피를 토하고 죽을 것 같은 압박감에 정신이 아득해지기까지 했으니.
다른 후기지수들의 표정도 다름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실력이 뛰어난 천후나 위천강, 담이 큰 악비산 정도는 괜찮았으나, 철대환이나 당천유는 고개를 저으며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남 교관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이런 경험을 하기엔 흔치 않은 것이니 말이야.”
주호의 말에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와 동시에 마차의 문이 열리며 남궁연이 밖으로 나왔다.
“후…….”
밖의 모습을 본 그녀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초췌했던 후기지수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지기 시작했다.
“남궁 소저!”
“시끄러워요, 분명 저는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아까의 어색했던 표정은 이 때문인가.’
기품있는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온 남궁연은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서 말이 퍼졌는지는 몰라도 제가 교관님을 본가로 초대했다는 것이 새어 나갔더군요. 누가 알아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또 이상한 말이 돌아서요.”
“이상한 소문?”
주호의 물음에 남궁연은 순간 주저하며 말을 아꼈다.
“별로 신경 쓰실 건 아니에요. 하여튼 임시방편으로 그들도 초대하기로 했답니다. 원래라면 미리 서신을 넣어 알려드리려 했는데…….”
남궁연은 시선으로 남사일을 지목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제 머리를 긁었다.
“이번 일을 계획하기 위해 내가 말렸지. 오히려 한 방 먹은 것은 우리지만.”
“미리 말하지 못한 것은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한옆에서 남궁연을 돕기 위해 남궁진영이 치고 들어왔다.
하지만 주호는 그들을 탓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남궁연의 아랫사람으로서 그녀를 따를 수밖에 없을 테니.
“그러니까 원흉은 남교관님이라는 겁니까.”
“큼, 원흉이라니. 살짝 어감이 이상하네만.”
주호가 미간을 좁히자 남사일은 연신 헛기침을 내뱉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연배나 직책이 까마득히 높은 그에게 뭐라 할 수도 없으니 그저 한숨만 내쉬었을 뿐이었다.
“…….”
선우연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이 조용히 걸음을 옮겨 마차를 향한다. 하지만 주호의 시선이 이내 그들에게 꽂혔다.
“뭐, 그것까지야 좋습니다. …하지만.”
“…….”
주호가 말끝에서 서늘한 미소를 짓자, 그것을 본 후기지수들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고작 기세 따위에 휘둘러 옴짝달싹하지 못한 것을 보니 이번 학기 간의 수련은 헛된 것이었구나. 아니면 고작 한 달 만에 까먹은 것이냐? 어찌 되었든 이젠 절대 까먹지 않도록 그 몸에 제대로 새겨주마.”
심상치 않은 기색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동시에 일곱 명의 후기지수는 거무죽죽한 얼굴이 되며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