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망량환혼진에서의 시련을 끝마친 사흘째가 되던 날의 아침.
“…….”
주호는 연무장에 홀로 서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망량환혼진에서의 감각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일시적으로 초월 상태에 진입합니다.]
[경지가 상승했습니다.]
[경지가 상승했습니다.]
.
.
.
수많은 상태창이 눈앞에 떠오르고,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양감이 뇌리에 가득 채워졌다.
자신의 검에 서린 그 넘실거리는 빛무리는 베지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마침 지척에서 자신을 향해 닥쳐오는 수많은 기운이 있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싸움을 이어 나갔다. 종래엔 마주하기도 막대한 존재와 서로 자웅을 겨뤘으니.
적막한 산골짜기를 울리는 듯한 익숙한 목소리에 멈칫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끝을 보았으리라.
“오라버니!”
누군가 발하는 애타는 외침에 집중이 깨어져 나갔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 편린을 붙잡으려 애썼지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그것들은 모래를 붙잡은 것처럼 손아귀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고 말았다.
아쉬움과 허탈함.
일순간 가슴이 뻥 뚫린 듯한 공백에 몸이 휘청거렸을 때, 주호는 한 줄기 싸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방해하는 것을 모조리 죽이자.]
살심(殺心)이 아니었다.
그저 숨 쉬듯 자연스레 떠오른 생각에 몸을 맡길 뻔했다. 하월벽이 자신을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주예향이 자신을 불러세우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 채 사신문의 고수들을 도륙했을 것이리라.
“후우.”
주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맛본 경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승의 경지. 자신은 역시 아직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바. 과분한 힘에 취한 미련한 이에게는 비참한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니.
“상태창.”
과거의 잔재에서부터 벗어난 주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수 개의 반투명한 창이 허공에 떠오른다. 상태창 안에는 다른 사람의 것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전신이 투영되었고, 더 없이 최상의 상태라는 정보도 표시되어 있었다.
[상태창]
이름: 주호
별호: 월영사신
직업: 정천학관 일반교관
나이: 스물여섯
소속: 정천학관, 사신문
경지: 초절정(四/十)
무공: 청룡신공(七成)
잠재력: -
“칠성인가.”
얼마 전까지 오성을 넘어 육성을 넘보던 청룡신공의 경지가 한 단계를 뛰어넘어 칠성에 다다라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절정의 완숙이었던 경지가 단숨에 초절정으로 진입해 몇 단계씩이나 뛰어넘는 기염을 토했다는 것이었다.
꽈아악.
주먹을 쥐니 강맹한 힘이 손아귀에서 휘몰아쳤다.
그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강호를 동경하며 집을 뛰쳐나간 철없던 아이가 고작 삼 년 만에 강호의 최정상을 노리는 고수가 되었을 줄은.
‘망량환혼진이 의도치 않게 커다란 벽을 넘게 했군.’
스릉.
가볍게 검을 뽑아 든 주호는 천천히 청룡신공의 기운을 집중했다.
시퍼런 귀화가 그의 검에 피어올랐다. 칠성에 올랐기 때문인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기운이 선명하고 강렬해졌지만, 불꽃의 일렁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웅-
바람의 일렁거리는 불꽃처럼 제 몸을 흔들며 몸집을 키운 검기가 곧 하나의 형태를 이뤘다.
막, 망량환혼진에서 나왔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미친 듯이 날뛰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대해(大海)의 흐름처럼 깊고 차분하기 짝이 없다.
범인(凡人)은 꿈도 꾸지 못할 상승 경지의 무학이었지만, 주호의 얼굴은 어딘가 만족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때의 그것은 이런 검강 따위가 아니었다.’
청룡신검을 뒤덮은 작열하는 빛.
그것은 검강을 ‘고작’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할 정도로 휘황찬란한 것이었다.
그 빛을 한 번만 더 밝혀낼 수 있다면 여한이 없으련만,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었다.
“벌써 검강의 발현이 자연스러워졌는가.”
돌연 연무장 한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하얀 백발을 휘날리며 백발의 노인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주호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담담한 얼굴로 기운을 거두곤 검을 집어넣고 포권을 올렸다.
“백호를 뵙습니다.”
“되었네, 같은 사신수 간에 그리 예를 차리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도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이시잖습니까.”
“자네가 거기서 죽을 운명이 아닐 따름인 게지.”
백호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제 수염을 쓰다듬곤 말을 이었다.
“망량환혼진의 경험이 대단히 유익했나 보군. 일전에 하남에서 보았을 땐 주작 그 아이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거늘.”
“그것 또한 운명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말을 빌려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백호는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하지만 뭔가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인데.”
“…백호께서도 그 자리에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그때 제 검에서 피어오른 기운을 보셨겠군요.”
백호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달았다.
사실 망량환혼진에서 나온 직후, 그의 검에 서려 있던 기운에 관해선 사신문의 고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검강이라느니, 청룡신공의 기운이 발현되어 형태가 바뀐 것이라느니.
각자 알고 있는 지식을 짜내 의견을 내놓았지만, 하나 같이 그럴듯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백호는 그 당시 상대적으로 후방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주호에게 피어오른 기운은 생생히 느껴졌다.
“검강이라.”
사신문 내에 검강을 사용할 수 있는 고수가 여럿 있었다.
백호 역시 그 하나에 속하는바. 그렇기에 확언할 수 있었다.
“그것은 검기나 검강 따위가 아니었지.”
검강을 사용할 수 있는 고수들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의견일 것이 분명했다.
다만, 그 빛이 무엇인지까지는 알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렇습니까.”
백호의 표정에서 그 심정을 읽은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나머지는 천천히 스스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니.
백호는 그런 주호를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흉수의 습격을 받았을 때 그의 무공은 주작과 별 차이가 없었다. 젊은 나이에 상승 경지에 오른 것이 놀라웠으나, 고작 그것만으로는 사신수의 제 이름을 다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주호와 마주한 백호는 그의 기세를 단번에 읽어내기 힘들었다.
‘이제 나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가.’
그가 알기론 주호의 나이는 고작 스물여섯에 불과했다.
무공을 나이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지만, 사신문의 역사상 저렇게 젊은 나이에 상승 경지에 오른 것은 초대를 빼고 손에 꼽히는 숫자로 알고 있었다.
“자네라면 더 위의 경지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르지.”
“아직 부족할 따름입니다.”
주호의 겸손에 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부족은 이 노인네가 부족하지. 말은 호기롭게 했다만, 이미 나이가 나이인지라 육신이 많이 쇠했어. 얼른 백호의 이름을 물려주고 은퇴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적당한 놈이 없군.”
“사신문 내에도 유망한 후기지수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신문의 규모만으로도 구파일방 중 두세 곳을 합친 것과 자웅을 가릴 수 있을 정도라 생각되었다.
그러한 문파들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즉시 전력이 되는 정예 고수였지만, 후기지수를 양성하는 것도 그에 뒤지지 않는 순위에 꼽혔다.
사신문 정도 되는 문파가 그것을 경시하지 않을 터. 하지만 백호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후기지수야 많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사신수의 무공은 복잡하기 짝이 없어. 아무나 데려다가 익히게 할 수야 없지.”
그건 주호도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만약 상태창이라는 것이 없어 홀로 청룡신공을 독학했더라면 아직 비동을 탈출하지 못했을 터다.
“그렇기에 임무를 빌미로 강호를 돌아다니며 후계를 찾고 있었거늘, 몸까지 상해 골치 아프게 생겼네.”
사신수와 사흉수의 기운은 서로 상극으로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궁기 그놈도 한동안 운신하지 못할 테지. 어린놈이 뭐 그리 손이 매운지.”
“후계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전후 사정이 어떻든 백호가 다친 것은 자신의 책임이었다.
적어도 후계를 구하는 일에 도움을 주고 싶어 조심스럽게 운을 띄우자 그는 마침 떠올랐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군, 자네 정천학관에 몸을 담고 있었지. 어때, 창을 쓰는 이 중 쓸 만한 아이가 있는가?”
주호는 곰곰이 생각을 되짚었다.
학관 내에 가장 많은 것은 검을 쓰는 후기지수였다. 그 뒤를 도, 창이 비슷한 숫자로 뒤따랐고 권과 암기는 비교적 소수에 속했다.
‘창이라.’
창의 명가라 한다면 산동악가와 진주언가를 꼽았다. 정천 학관 내에는 두 세가의 후기지수가 적어도 수십은 있었고, 명성 높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주호의 뇌리를 주호의 뇌리를 스친 것은 호전적인 성격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제자의 얼굴이었다.
“제 밑에서 배우고 있는 아이가 한 명 있습니다. 태생이 강골(强骨)에다 창 실력도 제법이지요.”
“호오.”
백호는 흥미가 동하는 표정을 지었다. 주호 정도의 고수가 높게 평가한다면 제법 재능이 뛰어나다는 소리였기에.
“무공도 준수하지만, 눈여겨보던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그 아이를 보고 있자면 부러질지언정 휘청거리지는 않을 커다란 고목을 연상케 합니다. 호승심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제 몸이 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까지 겸비했으니 상승 경지로 나아가기에 알맞은 조건이라 할 수 있죠.”
“이야기만 들어도 군침이 당기는군. 혹 사문이 있는가?”
“악가의 아이입니다.”
그 말에 백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가능하면 명가의 자제는 후 순위로 밀어놓고 있다네. 그들은 그들만의 색채가 너무 강하거든.”“제가 창술은 견문이 짧아 그럴지 모르겠지만, 비산의 창에서 그러한 것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호쾌하다면 호쾌할 수 있겠지요.”
“흠.”
백호는 잠시 침음성을 흘렸다.
직접 두 눈으로 보아야 정확히 알겠지만, 청룡이 저리 호언장담하는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조만간 내 학관에 들리지. 마침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아이도 있으니 말이야.”
“미리 연락을 주시면 언질을 해놓겠습니다.”
백호는 때가 되면 잘 부탁한다며 씩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장소가 장소이니 이렇게 된 것 가볍게 몸이나 풀지 않겠나?”
“그게…….”
주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비무를 하자는 소리였으나, 그는 근래 한 번에 너무 많은 경지를 뛰어오른 직후였다.
아직 제 기운을 다루는 것에 미숙한 부분이 있었고, 고수 간의 싸움에서 그것은 치명적인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백호가 입은 부상이었다.
‘실수라도 한다면.’
예기치 못한 피를 불러올 수 있었다.
다만, 입으로 꺼내기엔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니 곤란할 따름이었다.
“그리 본격적으로 하자는 게 아니야. 말 그대로 몸만 푸는 것이지. 초식만으로는 어떤가.”
“그렇다면 좋습니다.”
내공을 사용하지 말자는 소리에 주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식과 초식 간의 싸움이라면 출수에 여유를 둘 수 있을 터.
‘칠성에 오른 청룡신공에 익숙해질 기회다.’
조용히 창을 세운 백호를 바라보는 주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