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저벅.

단 한 걸음이었지만, 모두가 긴장을 금치 못했다.

청룡이 괜히 청룡이겠는가. 지금 그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세만 해도 어지간한 이들이 감당키 벅찬 것이었다.

“될 수 있으면 서로 상처 없이 끝내고 싶은데…….”

“그게 쉬운 일이겠나. 저 살벌한 걸 보세.”

장로들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련의 과정 중 간혹 이런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리 심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성을 되찾았다.

“마가 단단히 씌웠군.”

하지만 멀리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살기에 현무는 투덜거렸다.

망량환혼진은 무공의 고하에 상관없이 그 정신에 직접 간섭한다. 그렇기에 시련의 용도로 쓰이는 것이었으니.

그 반동은 경지가 높을수록 컸고, 더욱 강렬한 반향을 내뿜었다.

하지만 청룡의 경지는 높아야 절정의 완숙. 그렇기에 여기 있는 이들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그리 멀지 않았다.

웅웅웅-.

바닥을 향해 겨눠진 주호의 검 위로 새하얀 빛이 작열했다. 마치 폭발적인 기운이 일렁거리는 듯한 그 기세에 장로 중 한 명이 살짝 경직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검강?”

“…아니, 검강이 아닐세. 저건…….”

옆에 있던 하월벽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호의 신형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쐐애애애액-!

거친 파공성이 주위를 가른다. 그 주위를 둘러 서 있던 사신문의 고수들은 절로 긴장하며 제 몸이 힘을 불어넣었다.

“흡-!”

제일 앞에 서 있던 현무가 전력을 끌어 올리며 그 앞을 막아 세웠다.

시련으로 인한 과정은 사신수, 그리고 사신단이 견뎌내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현재 백호는 다친 상태. 그렇기에 주작보다 더 높은 경지의 현무가 일격을 받아낼 심산이었다.

터엉-.

“……!”

그는 주호의 검을 받아내는 순간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분명 전력을 끌어올렸을 터임이 분명했지만,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채 두 다리가 사정없이 뒤로 밀려 나갔다.

어떻게든 견뎌내려 강하게 발을 내디뎠으나, 흘리지 못한 충격이 그 주위의 땅으로 번져나갔을 뿐.

“…이거 장난 아니군.”

겨우 멈춰 섰을 땐, 자신을 중심으로 균열이 퍼져나가 있는 주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호.”

그리고 그 옆으로 천우희가 내려섰다. 주작의 신병인 주작신도가 허공에 들리며 그 끝이 주호에게 향했다.

“…….”

가만히 서 있던 주호는 그것에 반응했다. 분명 두 눈을 뜨고 있었지만, 그 차가운 눈동자에 이성은 보이지 않았다.

“…물러나라, 네 상대가 아니다.”

“괜찮아요. 수극화라고 해도 같은 신공인데.”

“아니, 상성이 문제가 아니다. 그는 이미 내 경지를 뛰어넘은 것 같으니.”

“…그 정도라고요?”

그 말에 천우희는 경직된 표정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망량환혼진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저렇게 살벌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것일까.

우우웅-.

기울어진 주호의 검이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천우희는 본능적으로 도를 들었다. 이미 본 것이 있었기에 순식간에 내공을 끌어올렸고, 곧 그녀의 검을 뒤덮은 시뻘건 화마는 새하얗게 변했다.

팅-!

쇠가 팅기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와 동시에 천우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

뺨이 길게 찢어지며 피가 흘러내린다. 도로 막아내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비틀지 않았더라면 목이 베였을 것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그리고 그 뒤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몇몇 고수가 그것에 휘말려 바닥에 나뒹군다. 그 모습을 본 현무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느꼈겠지.”

“…예.”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현무는 뒤쪽으로 눈짓했다.

“문주와 장로들께서 함께 나서주셔야겠소.”

“흠.”

하월벽을 비롯한 사신문의 장로들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여기까지 온 이상 관례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상관없겠지, 문주?”

“동감일세. 피해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겠군.”

“검은 내가 어떻게든 받아내 볼 테니 나머지는 자네들이 알아서 해보게. 내 나이가 들면서 요새 기력이 좀 달리니.”

“쌓은 내공만 일갑자가 넘는 귀신이 무슨 기력 타령을…….”

장로들이 짐짓 가벼운 어조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진지한 시선으로 주호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하여튼, 잘 따라오게.”

제일 선두에 선 일장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들은 주호와 격돌하는 순간, 그가 공세를 막고 나머지가 한 번에 달려들어 제압할 생각이었다.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그 몸에 충격을 주어 원래의 정신을 일깨우면 성공일 터.

웅웅-.

“온다-!”

주호는 수십의 고수가 자신을 둘러쌌음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전혀 망설임 없는 태도로 천천히 땅을 박찼고, 이내 전과같이 세찬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파아앗-!

거친 해일이 일어나 주변을 휩쓸어온다. 그러자 미리 약속했던 대로 제일 앞에 있던 일장로가 일신의 기운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하아아아-!”

장포가 나팔거리며 그를 중심으로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폭풍과도 같은 기파. 그것 역시 땅을 거세게 뒤흔들며 주호의 기운과 격돌했다.

파아앗-!

그와 동시에 사신문의 정예들이 땅을 박찼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주호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의 움직임을 옭아맸다.

현무는 그 제일 앞에서 주호의 측면을 쳤다. 적어도 사신수의 시련인 만큼 자신이 주축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한 행동이었지만, 갑작스레 불쑥 솟아오른 손에 헛바람을 내뱉었다.

턱-!

“…컥!”

깨달을 틈도 없이 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현무는 황급히 몸을 비틀어 그것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주호의 손은 호락호락하게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현무신공의 호신강기로도 주호를 밀어낼 수 없었다. 낭패에 빠진 그가 황급히 몸을 웅크릴 찰나, 그 뒤를 이어 닥쳐온 이들이 주호를 공격했다.

우웅-.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주호는 한 걸음도 피하지 않았다. 오직 제가 쥔 검을 더욱 강하게 휘둘렀을 뿐.

“…이건!”

청룡신공 파천(破天)

본 적은 없지만, 구전으로 들은 모습과 똑같았다. 청룡신공의 무공 중 손에 꼽는 위력을 자랑한다는 초식. 그것이 수백 년을 지나, 사신문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왔다.

“모두 물러나-!”

현무는 제 공력을 한계치로 끌어올리며 앞을 막아섰다. 다른 이들 역시 물러나야 함은 알고 있었지만, 필연적으로 큰 공격을 사용한 직후엔 빈틈이 생기기 마련.

그렇기에 전부 얼마 정도 상처를 각오 달려들었지만, 그건 상처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쐐애애애액-!

주호와 사신문의 고수 사이로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곧 그 자리에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 강대한 힘으로 주위를 뒤덮었고, 이내 서로의 기세를 강제로 해소했다.

“…문주.”

“다들 물러나라, 내가 상대하겠다.”

그 덕에 겨우 주호의 손에서 탈출한 현무가 기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을 때, 초연한 태도로 서 있던 하월벽을 볼 수 있었다.

“…….”

하월벽은 가늘어진 눈으로 주호의 공격을 막아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신문의 공격을 막아낸 쪽은 별문제가 없었지만, 그 손만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즉, 주호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일 터.

‘초월지경에 이르렀다?’

흔히 말하는 신화경이라 불리는 경지는 쉬이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시대에 재능과 노력, 그리고 그 이외의 것들을 타고나 하늘의 점지를 받은 이들만 오를 수 있는 경지.

주호는 분명 나이에 비해 뛰어난 고수이긴 했지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망량환혼진의 안쪽에서 무언가 작용했다는 소리. 하지만 역대 시련의 과정 중 이런 기록은 분명 적혀 있지 않았다.

“이번 청룡은 무언가 특별한가 보구나. 이것이 본문에 득이 될지 화가 될지는…….”

“다들 뒤로 물러나-!”

“최대한 거리를 둔다!”

하월벽이 앞으로 나서자, 현무와 일장로가 고수들을 뒤로 물렸다.

곧 망량환혼진을 끝으로 둔 채 하월벽은 주호와 마주 섰다.

이성을 잃었다기엔 느껴지는 기세가 너무 차분하기 그지없다. 하다못해 천우희의 경우엔 눈이 돌아가 마구잡이로 초식을 뿌려댔으니.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 무서운 것이겠지.’

어떤 방식을 써올지 몰랐다.

그렇기에 하월벽은 더 피해가 나오기 전에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고자 마음을 먹었다.

핏-!

곧 두 명의 신형이 땅 위에서 사라졌다. 사신문의 고수들이 헛바람을 내뱉으며 그들의 모습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을 때, 현무와 일장로를 비롯해 경지에 오른 초고수들만이 침중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폭풍이라도 몰려오는 듯 거센 광풍이 일어나고, 눈 한 번 깜짝일 때마다 폭음이 터져 나왔다.

아름드리나무가 뽑히거나 부러지는 것은 예삿일이었으며, 땅이 뒤집히며 지형이 바뀌어 갈 정도였으니 다른 이들은 감히 그 사이로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저 정도라니.”

한 고수는 자신이 저 사이로 끼어들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오금이 저려 몸을 떨었을 정도였다.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싸움은 절정에 이르렀다.

모두가 그것을 긴장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구보다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든 이가 있었다.

‘오라버니…….’

주예향은 망량환혼진이니 시련이니 하는 것들에 잘 아는 것이 아니었지만, 상황이 별로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던바. 그렇기에 그저 지켜볼 수밖에 할 수 없어 속만 타들어 가는 와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둘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큰 폭발만 연신 일어났으니 점차 겁에 질렸다.

“오라버니!”

그렇기에 그녀는 다시금 큰 목소리로 주호를 불렀다.

근처에 있던 사신문의 고수들이 대경실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주예향은 이제 참을 수 없던바.

탁.

그 직후, 주호와 하월벽의 신형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내렸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고, 주호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향아.”

“……!”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사신문의 고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병장기를 거두었다.

“오라버니!”

주예향은 눈물을 흩뿌리며 사신문의 고수들 사이로 달려나갔고, 곧 제 오라버니의 품에 안겨들었다.

“…걱정 끼쳐 미안하구나.”

“무서웠어요, 오라버니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곤 그 안에서 훌쩍이며 얼굴을 비빈다. 주호는 그저 미안한 얼굴로 그녀를 안아주며, 등을 쓰다듬어줬을 뿐.

“…정말로 돌아온 거 맞아?”

천천히 그들 곁으로 다가온 천우희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어왔다.

함부로 경계를 풀기엔 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광경들이 뇌리에서 잊히질 않았으니.

그 물음에 봉두난발이 된 머리를 쓸어올린 주호는 그녀를 바라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뭣하면 오늘 밤에도 시험해볼까?”

“…….”

그 품에 안겨 있던 주예향의 몸이 움찔한다.

일순간 동생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주호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고, 천우희는 새빨개진 얼굴로 슬쩍 뒤쪽의 눈치를 보았다.

“뜨겁구먼.”

“하긴, 청룡도 주작도 한창 그럴 나이가 아닌가.”

누구는 주호와 천우희의 관계를.

“에잉, 여기 수백 고수보다 그녀 한 명이 더 낫구먼.”

“설마 그 부름 한 마디에 정신을 차릴 줄은. 청룡도 어지간히 제 혈육을 아끼는구먼.”

누구는 주예향의 한 마디에 정신을 차린 주호의 모습을.

사백에 이른 고수가 흐뭇한 얼굴로 각기 다른 감상을 내뱉으며 그 광경을 보고 있었으니.

“흠흠, 어찌 되었든 일이 잘 풀린 것 같으니 우린 먼저 돌아가겠네.”

머쓱해진 하월벽만이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