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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귀환-54화 (54/300)

#54화

[시스템 어시스트가 활성화됩니다.]

[일시적으로 초월 상태에 도달합니다.]

귓가에 아스라이 들려오는 상태창의 알림음에 주호는 호흡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마음속으로 한 자루의 검을 벼려내었다.

날카롭게.

더욱더 날카롭게.

마인 따위는 일 검에 베어 넘길 수 있도록 날을 세웠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에서 한 줄기 구절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내가 베고자 함은 못 할 것이 없으니.”

[청룡검식 제칠식 만월(滿月)의 첫 구결이 활성화됩니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한 자루의 검이 홀연히 그의 앞에 떠오른다. 그 누구도 잡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검은 스스로 떠올라 그 끝을 마인에 겨누었다.

‘윽…….’

피를 많이 흘린 것에 한계가 온 것인지 주호는 의식이 점멸하는 걸 느꼈다.

두 눈은 천근을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웠고 다리는 경련을 일으키며 제 주인의 명령을 거부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탈력감에 주호는 혀를 깨물어 억지로 정신을 각성했다.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을 새도 없이 그는 이를 악물고 멈춘 구결을 이었다.

“…그것이 곧 만월의 시작이니.”

그와 동시에 주호의 검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세상을 베어냈다.

***

“…길어도 반 시진이면 끝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망량환혼진의 밖.

주예향이 불안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 각만 더 흐르면 주호가 망량환혼진 안으로 들어간 지 한 시진째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초대 사신수를 제외하곤 망량환혼진에서 한 시진 이상을 버텨낸 사람은 없었다고 했거늘.”

그 옆에서 있던 현무가 굳은 표정으로 망량환혼진을 바라보았다.

비단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청룡의 의식을 치르기 위해 모인 사백 명의 고수가 모두 이례적인 사태에 술렁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사신수의 의식은 애초에 실패를 전제로 두고 진행되는 것이었다.

망량환혼진은 내면의 어둠을 보여주는 진법. 심마와 마주함으로 자신의 신기체를 공고히 다지라는 취지에서 대대로 이뤄진 의식이었다.

일단 진 안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이 겪어왔던 사람 중 가장 강한 적수가 등장했다.

상대의 강함에 비해 당사자는 내공까지 봉인된 상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멀쩡한 사지로 발악하는 것이었다.

터무니없을 정도의 난이도를 가진 이 의식은 죽음을 맞이함으로 끝을 맞이했다.

물론, 안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환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팔다리가 잘렸든 목이 잘렸든 모두 가상의 일이 되었다.

“나는 이각 만에 나왔는데.”

천우희 역시 주작의 이름을 달기 전, 제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망량환혼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적과 맞서 싸웠고, 필사적으로 분전했지만 사라진 내공 때문에 고작 이 각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당대 사신수 중 가장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려 반 시진을 버텨낸 현무였다. 그것조차 그의 무공이 공격보단 방어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하지만 곧 한 시진이 지났다. 지금껏 이래왔던 적은 없었기에 그들의 얼굴엔 초조함이 서렸다.

“진을 해체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문주.”

“망량환혼진은 심마와 싸우는 진법, 무공의 고하를 막론하고 의식 깊은 곳을 건드립니다. 잘못하다간 정신이 파괴될 수도 있는…….”

사신문의 장로들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문주인 하월벽에게 말한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필시 무슨 일이 있을 테지.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

“하지만……”

“이대로 해제한다고 하더라도 좋게 끝날 일은 없겠지. 차라리 순리에 맡겨 빠져나오는 것에 희망을 거는 것이 낫지 않겠나.”

하월벽의 태도는 단호했다. 한숨을 내쉰 장로들은 다시 진을 응시했고, 그대로 사백 명이 넘는 대인원이 숨을 죽인 채 시간을 보냈다.

쿵.

“……!”

유의미한 변화가 생겨난 것은 그로부터 일각이 더 지나고 난 뒤였다. 갑작스러운 진동이 망량환혼진을 중심으로 사방을 뒤흔들었다.

지진이라 불러도 될 만한 충격. 이때껏 없던 변화에 모두가 술렁이며 동요를 드러냈다.

“사신단은 앞으로!”

그때, 하월벽이 내공이 담긴 외침을 터트리며 그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망량환혼진에서 빠져나온 직후, 그 당사자의 정신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죽거나 죽음에 다다를 정도의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실제로 진에서 빠져나온 직후, 현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한 채 닥치는 대로 살수를 뿌려댄 이들이 다수 있었다.

그렇기에 의식을 치를 동안 사신문의 고수들이 그 자리를 지키는 관습이 생겨났다.

사백 명에 달하는 고수.

그리고 장로들을 비롯한 문파의 중진들이 든든히 그 앞에 호법을 섰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무인이라도 힘을 쓸 도리가 없었다.

“드디어 나오는가.”

저번에 있었던 사흉수 중 궁기와의 싸움에서 다친 백호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지만, 방어가 특기인 현무는 무리의 제일 앞으로 나섰다.

“모두 긴장하도록. 청룡의 경지는 절대 낮지 않다. 살수를 펼쳐 온다면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감각을 벼려라.”

보통 사신수에 임명받아 망량환혼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일류를 벗어날 때부터였다.

하지만 주호의 현재 경지는 절정의 완숙. 그 정도의 고수가 마음 먹고 살수를 뿌린다면,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놈한테 패했다지?”

선두에 있던 현무가 녹색 호신강기를 피워 올리며 옆에 있던 주작에게 물었다. 그에 천우희는 샐쭉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쳤다.

“첫 번째 불꽃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니까요. 다음에 붙으면 이길 수 있어요.”

“…그러기엔 기세가 심상치 않은데.”

“예?”

돌연 현무의 얼굴에 서리는 긴장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저저적-

망량환혼진이 펼쳐진 공간에 균열이 일어났다.

“…이건.”

하월벽은 처음 보는 현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신문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사신문이란 이름을 가지고 이곳에 정착한 것이 벌써 수백 년도 더 전의 일이다.

하지만 이때껏 이어진 기록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서술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망량환혼진의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마치 유리를 부순 것처럼 균열이 서린다. 그리고 곧 조각조각 갈라져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고 그 잔재는 허공에서 팍하고 터져나갔다.

“갈-!”

그와 동시에 현무는 제 기운을 극성으로 끌어 올리며 큰 소리로 기합성을 내뱉었다.

정순하고도 깊은 내공을 품은 사자후가 망량환혼진을 때렸다.

‘이것으로 정신을 차려준다면 좋겠지만.’

하지만 그것은 내부를 파고들기도 전에 균열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부딪혀 소리 없는 메아리가 되었다.

파바바바바박-!

그것을 시발점으로 망량환혼진이 깨어져 나갔다. 균열을 따라 사방팔방으로 눈부신 빛줄기가 솟구쳤고 그 뒤를 따라 무지막지한 무형의 기운이 해일처럼 그들에게 닥쳐왔다.

쿠구구구구궁-

“모두 물러나!”

심상치 않았다. 전신을 짓누르는 무지막지한 압력에 현무는 경직된 얼굴로 뒤에 있던 이들을 향해 외쳤다.

이전부터 경각심을 가지고 있던 고수들이 훌쩍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고 제일 마지막으로 현무가 물러났다.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온몸의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강대한 기운이었다.

‘차원이 다르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자신이 들어갔을 땐 그저 막기만 하다 끝났을 터인데.

솨아아아아아-

무형의 파도는 그것에 휩쓸린 모든 것을 파괴했다. 멀찍이서 그것을 지켜보던 이들은 입을 벌린 채 그저 경악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기점에 도달했을 때.

후우웅-

이 산을 뒤덮을 것 같았던 폭풍은 곧 제 기세를 잃었고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되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참으로 기묘한 조화구나.”

그 현상에 하월벽은 감탄을 내뱉었다. 저만한 기운을 순식간에 풀어헤쳤다. 그것은 즉, 저것이 전력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무형의 해일이 내뿜던 기세를 정면

에서 맞은 현무가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살짝 뒤에 있던 천우희가 안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나온다!”

짙은 안개가 물러나며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사백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한 곳에 자리했지만, 사방은 고요하기 짝이 없다.

풀을 스치는 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고 곧 주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모습은 처음 망량환혼진에 들어갔을 때와 변함이 없는 것이었다.

다만, 단정히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세찬 바람에 맞은 듯 산발이 되어있었다.

“…오라버니.”

주예향이 천천히 제 오라비를 부르며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갔지만, 그것을 막는 손길이 있었다.

“움직이지 마.”

천우희가 가늘어진 눈으로 주예향을 붙잡았다.

사람에게는 각자 고유의 기운이 있다.

처음 만난 이들은 그것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녀와 주호는 몸을 섞을 정도로 가까웠던 사이. 그렇기에 지금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특히나 제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모습이 그러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 정도의 고수라면 슬슬 평정을 되찾았을 터.

하지만 주호의 기세는 여전히 흉흉했고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난 듯했다.

척.

“…….”

하월량의 손짓에 사신문의 고수들이 각자 병장기에 손을 올린 채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긴장하지 않은 이가 없다. 강호 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조차 절로 긴장이 될 정도로 주호의 투기는 거대한 것이었다.

스릉.

천천히 그의 검이 뽑혀 나온다. 하월벽의 시선은 다른 이들을 향했다.

“…….”

사신문의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주호가 공격을 시작하는 순간 그들이 그 공세를 막고 나머지가 한 번에 제압할 생각이었다.

설사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고수는 많았고 굳이 제압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원래의 정신을 일깨우면 성공이었다.

웅웅-

“…허어.”

뽑혀 나온 검이 하늘 위로 향한다. 곧 푸른 불꽃이 검신을 뒤덮었고 모두가 그것을 보며 소리 없는 감탄을 터트렸다.

휘청거리듯 일렁이던 짙푸른 검기가 더더욱 몸을 부풀려간다. 끝없이 몸집을 키워나가던 그것은 어느 기점으로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그가 정신을 차린 것으로 생각해 검을 내렸지만, 곧 그 사이로 하월벽의 날카로운 일갈이 내달았다.

“방심하지 마라!”

키잉.

“…검강?”

그와 동시에 주호의 검 위로 새로운 기운이 맺힌다. 그것을 본 장로 중 한 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내뱉었지만, 현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비슷하지만 검강이 아닐세.”

작열하는 빛이 그의 검에서 피어오른다. 항거할 수 없는 기세가 해일처럼 휘몰아쳤고 사신문의 고수들은 이제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스슥.

제일 선두에 있던 이들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딘다. 주호가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선수를 치기 위해 만발의 준비를 마쳤다.

“오라버니!”

그렇게 얼마나 대치 상황이 지나갔을까, 답답함을 참지 못한 주예향이 큰 소리로 주호를 불렀다.

사신문의 고수들은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주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상태의 고수를 자극한다는 것은 어떤 후폭풍을 불러올지 몰랐다.

실제로 천우희의 경우 방심하던 두 명의 고수가 그 시뻘건 도에 피를 묻혔다.

“…….”

하지만 일말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청룡은 제 동생을 지극히 아끼는바. 혹시라도 그 애타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수도 있지 않은가.

키잉-.

“…시팔, 턱도 없었군.”

하지만 그 부름에 대한 대답 대신 나온 것은, 폭풍 같은 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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