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단 노인과 술자리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날, 주호는 잠자리에 들지 못한 채 꼬박 밤을 지새웠다.
‘무황의 비동.’
그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고금제일인, 천하제일의 고수.
무황의 모든 유산이 잠들어 있다는 비동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곧 온 강호에 진동했다.
고수부터 하수까지 막론하지 않고 연신 그 이야기를 해댔으며, 모두가 절세신공에 탐욕을 드러냈다.
주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작 무림맹 말단 무사에 그치는 인생을 바꿔줄 기연. 마치 무황의 비동은 그런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 같지 않나.
‘어쩌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삭막해져 가던 마음속에 한줄기 새싹이 피어올랐다.
물론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무림맹 말단 무사인 그가 강호의 대사에 한 발을 걸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흘러들어오는 소문을 먼발치에서 듣는 것이 전부. 하지만 주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황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가슴 한편에 피어오르는 묘한 흥분감에 도취하여 결국,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가자, 무황의 비동으로.’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할 것이다.
결단을 내린 뒤부터는,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이었다.
무황의 비동에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의 무공으론 비동의 탐사대나 주요 관계가 있는 요직을 꿰차기 힘들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비동의 외곽을 경계하는 순찰대의 자리였다.
그곳 역시 말단 무사의 이름으로 들어가기 어려운 자리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주호는 그간 쌓아온 인맥과 연줄을 총동원했다.
맹에 있는 동기부터 시작해서 들쑤시기 시작했고 평소 호형호제하며 술 대작하던 인사 관리 담당자에게 뒷돈까지 찔러줬다.
끝내는 결국 비동으로 파견을 나가는 보직 중 겨우 한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비록 말단직에 외곽을 경계하는 위험천만한 임무를 맡고 있었지만, 강호의 중심에 관계되었다는 사실에 그의 기분은 크게 고무되었다.
물론, 현실은 냉정했다.
경계를 서는 한 달간 비동의 입구는커녕 그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으니.
“내일로 복귀로군. 특근 덕분에 제법 짭짤하겠어.”
“돌아가면 곧바로 한잔 어떤가. 듣자 하니…….”
같이 근무를 서는 무인들은 들뜬 태도로 돌아가면 무엇을 할 것인지 열띤 태도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네는 어떤가?”
“…때를 보아서 동석하겠습니다.”
주호는 못내 아쉬웠다.
눈앞에 절세 무공이 잠들어 있는 비동이 있는데, 고작 술자리 이야기밖에 할 수 없다니.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비동 입구는 각 세력의 고수들이 엄중히 감시하고 있어 감히 발을 들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별일이 없었더라면 결국 그렇게 시간만 보내다 다시 맹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무황의 비동이 주는 마성은 주호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있어서도 그리 쉬이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크아악-!”
“기습이다! 물러나서 시간을 벌어라!”
“본대에 지원을 요청해!”
각 세력의 인원으로 이루어진 조사대가 비동 안에 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선수를 친 세력이 있었다.
솨사사사-!
수많은 마교의 고수가 흉악한 기세를 피워 올리며 거친 파도처럼 밀고 들어왔다.
사방에 피분수가 치솟아 오르고, 시체의 산이 바닥 위로 쌓이기 시작했다.
기존에 있던 각 세력의 고수들 역시 저마다 꿇리지 않는 무공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대의 수준은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던가.
궁지에 몰려 덜덜 떨고 있던 다른 이들과 달리 주호는 혀를 씹으면서까지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이대로 있다간 무조건 죽는다.’
조장을 비롯한 경계의 책임자들은 지원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일부는 사고가 마비되어, 혹은 발이 굳어 제자리에 있었으나, 마교 고수들의 칼날은 이미 지척까지 이르렀다.
“으, 으아아아!”
“도망가!”
이윽고 바람에 밀려온 짙은 피 냄새와 산산이 조각나는 제 동료들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무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전열에서 이탈했다.
뒤에 있던 조장들이 도망치는 이는 엄벌에 처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모두 예외 없이 차디찬 주검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타다다닥!
동료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주호 역시 그사이에 섞여 힘껏 땅을 박찼다.
다만, 그 방향은 후방으로 도망가는 다른 이들과 달리 비동의 입구를 향해 있었다.
“허억, 헉…….”
일전 섬서에서 구룡파 패거리에게 쫓겨 잡히기 일보 직전일 때보다 더욱 필사적으로 달려나간 주호는 기어코 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비동의 입구는 우물 형태로 되어있어 밑쪽으로 통로가 뚫려 있었다.
어디까지 뚫려 있는지 모를 구멍을 보니 망설임이 솟아올랐지만, 그는 이내 이를 악문 채 안으로 몸을 던졌다.
“허억-!”
전신이 물밑으로 쑥 꺼짐과 함께 조금 전까지 귀를 먹먹하게 울려왔던 전장의 소음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런.”
하지만 안쪽도 이미 한차례 혈투가 벌어진 후였다.
겨우 바닥에 내려선 주호가 얼마쯤 앞으로 나아갔을 때,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주검들이 그를 맞이했다.
단 한 명만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복부의 상처를 부여잡은 채 벽에 기대 주저앉아있다.
‘…마인인가. 빌어먹을.’
하필 남은 한 명은 마교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잠시간 주호의 마음속에 갈등이 피어올랐다.
앞으로 가느냐.
아니면 입구 쪽에 숨어 있다가 소동이 잠잠해지면 빠져나가느냐.
이 앞에 있는 자는 원래라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고수다. 위중한 상처를 입었더라도 자신 따위는 손쉽게 갈가리 찢어버릴 힘 정도는 남아 있을 터.
하지만.
하지만 둘도 없는 기회였다.
수십 번의 갈등 끝에 주호는 겨우 결정을 내렸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다. 이대로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
주호는 최대한 기척을 지운 채 발걸음을 옮겼다.
종래엔 숨까지 참아가며 발을 내디뎠으니, 그 긴장감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릴 정도였다.
툭.
하지만 그 노력이 허망하게도 발치에 있던 검을 보지 못한 채 건드리고 말았다.
“…….”
마인의 두 눈이 천천히 뜨인다. 그것에 주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쐐애액-!
일격에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필사의 각오로 검을 뽑아 온몸의 힘을 실어 마인의 목을 내리쳤다.
하지만 긴장으로 인해 시야가 좁아져 있던 탓에 검 끝이 벽에 걸렸고, 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 아아.”
주호는 이때까지 수많은 범죄자를 만나왔고, 수많은 살인자를 지나쳐왔다.
하지만 시선을 마주한 마인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원색적이고 농후한 살기는 난생처음 겪는 것이었다.
“…이거, 참.”
마인은 제가 기습을 당해 어처구니없이 죽을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지어 보이며 천천히 검을 들었다.
“…….”
주호는 그때까지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마인의 움직임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이토록 격한 사투를 벌였으니 온전하지 못한 것일 터.
주호는 천천히 검을 다잡았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스스로 되뇌며 얼마 되지 않는 내공을 몽땅 검 위로 쏟아부었다.
파바박-!
그렇게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땅을 박차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두 자루의 검광이 어둠을 갈랐고 하나의 피륙음만이 그곳에 자리했다.
“……!”
왼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주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고, 잘려나간 왼팔이 피를 흩뿌리며 차디찬 바닥을 나뒹굴었다.
신음을 내뱉지 않은 것만으로 칭찬해줄 법한 기개지만,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야수는 상처를 입어도 야수였다. 오히려 목숨이 경각에 달렸기에 더욱 위험한 법. 그것을 망각한 주호는 죽음 앞에 섰다.
‘일단 피한 다음 태세를 정비해야 한다.’
마인 역시 상태가 좋지 못한 것인지 그 일격을 끝으로 피를 토해내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주호는 그 틈을 타 옷가지를 찢어 잘려나간 왼팔을 질끈 동여매고 힘껏 땅을 박찼다.
“제발, 제발.”
무황의 비동이다. 당장 절세무공은 바라지도 않는다. 상처를 치료하거나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영약이라도 있다면.
“…윽.”
하지만 잘려나간 팔에서 흘러나온 피의 양이 적지 않았다.
어디 무림의 고수라면 점혈을 통해 지혈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런 류의 지식이 전무한 주호에게는 허울 좋은 소리일 뿐이었다.
“크아아아아!”
“윽?!”
그때, 저 뒤에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괴성이 귓가에 닥쳐왔다.
흡사 덩치 큰 짐승이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해 내뱉은 포효라 할 수 있을 정도.
기력이 전부 쇠한 주호는 결국 제자리에 멈춰 섰다. 마인은 곧 그를 따라잡았고, 짙은 미소와 함께 말해왔다.
“이제 더 이상 도망가지 않는 것이냐. 버러지 같은 것.”
“…….”
주호는 대답하는 대신 하나 남은 오른팔로 검을 들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진득한 후회가 들이닥친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었고, 그 끝이 머지않아 보였다.
“이제 그만 죽어라.”
고요한 비동 안에 마인의 걸음 소리만 울려 퍼진다.
주호는 남은 의식을 쥐어짜 검에 실었다. 아픔과 고통을 도외시한 채 정신을 집중했다.
이전에 느껴본 적이 없던 감각이었다. 자신과 마인의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졌으며, 어디를 어떻게 베어야 할지에 대해 확신이 들었다.
‘할 수 있다.’
그렇게 주호는 모든 의념을 집중해 검을 휘둘렀고, 그것은 마인의 몸을 가르는 듯했다.
쩌억-!
“…컥.”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검은 끝까지 휘둘러지지 못했다.
채찍처럼 세차게 휘둘러진 마인의 검이 검째로 주호의 팔을 갈랐다. 두부를 자르는 것보다 더 쉽게 잘려나간 팔이 또다시 바닥을 뒹굴었고 이제는 혈을 집을 수도 없이 그의 신형은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한 줌의 내공만 있었다면.’
주호는 아쉽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한 줌의 내공만 있었더라면 마인을 수백 조각으로 도륙해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단전은 텅 비었고 목숨보다 더 귀한 두 팔을 모두 잃었다.
“…크흑.”
단정하게 정리되어 묶여 있던 그의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얼굴로 흘러내렸다. 더는 무엇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떨어진 상태였으니.
‘검을 쥘 수도 없는데 더 이상 무엇을 하겠느냐.’
팔을 잃었다.
검객으로서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설사 자신 말고 다른 고수가 이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 상황을 타파할 수는 없을 것이리라.
“…….”
주호의 의식이 느슨해졌다.
삶을 포기한 듯 그의 두 눈은 초점을 잃었고, 그 앞으로 마인이 다가와 높게 검을 치켜들었다.
휘둘러지는 시커먼 검광을 보며 주호는 두 눈을 감았다.
“…….”
그러자 그의 눈에 여러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주마등인가.’
이미 몇 번 겪었던 현상이었다. 어릴 적 함께 지내온 가신들을 비롯해 어여쁜 동생들, 그리고 자신 때문에 속앓이했을 부모님까지.
“……?”
그 뒤를 이어 무림에서 만난 여러 친우가 보였고 정천학관에서 만난 동료 교관들까지 차례로 나타났다.
처음 보는 이들이었지만, 어딘가 익숙한 얼굴들. 그리고 그 마지막, 자신을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를 짓는 천우희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주호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하지만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두 발은 땅을 디디는 것이 한계. 설사 몸을 뒤집어 휘둘러지는 검을 피하더라도 고작 한 번이 끝이었다.
검을 쥔 손이 남아 있지 않은 이상 검객으로서의 이름은 유명무실해졌다.
‘…아니.’
꺼져가던 그의 마음에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검을 쥘 수 없다면 스스로 검이 되면 된다. 검신합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호가 바라보는 것은 더 위의 경지.
어릴 적 읽었던 영웅담이 그의 기억을 스쳤다.
[손에 든 검을 버리고 제 마음에서 한 자루의 검을 벼려낸다면, 그것이 바로 심검(心劍)의 경지이니.]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주호는 끊임없이 영웅담에 적힌 글귀를 되뇌었다. 그러자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푸른 글귀가 그의 시야에 떠올랐다.
[시스템 어시스트가 활성화됩니다.]
[일시적으로 초월 상태에 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