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정오가 조금 지났을 때.
사신문의 사람들은 분주히 무언가를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작전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제 거처에 틀어박혀 수련에 몰두하던 사신단은 물론이고, 다른 조직들 모두 사신문의 대전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장관이로군.”
한쪽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주호가 나지막하게 감탄을 흘렸다.
사신단, 네 개의 정예 단원들의 기세는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의 정예들과 견주어보았을 때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전체적인 규모를 보았을 땐 그들 중 두, 세 곳은 합쳐 놓아야 겨우 구색을 갖출 수 있을 정도로 보였으니.
그리고 그 뒤로 사신문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중진들이 자리했다.
각 조직의 수장들을 비롯해 출중한 기세를 지닌 고수들이 당당히 입장했고, 제일 마지막으로 하월벽과 장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모두 어젯밤에 술잔을 나눴던 사이였지만, 동네 어르신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적어도 그들 모두 나와 동수거나 그 이상인가.’
주호의 눈앞에는 십수 개의 상태창이 떠올라 있었다.
각기 다른 인명의 정보를 나타내고 있는 그 위에는 주호보다 낮은 경지에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저들이.’
그리고 그 가운데, 특출난 기운을 내뿜는 이들이 있었다.
척.
제각기 사신수를 상징하는 색의 정복을 입은 무인들 앞에 세 명의 고수가 앞으로 나왔다.
주호의 시선은 천우희를 넘어 그 옆에 있던 중년인들로 향했다.
‘백호와 현무.’
둘 다 초절정에 달하는 초고수들이었다. 특히 백호는 초절정에서도 끝에 다다른, 입신지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경지였으니.
“음?”
찬찬히 그들의 상태창을 살피던 주호는 짤막하게 의문성을 내뱉었다.
‘제 상태가 아니군.’
궁기와의 싸움에서 진화된 상태창엔 여러 부가 기능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대상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백호의 상태창엔 그의 신체 몇 군데를 가리키며 부상의 척도를 알리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 골절에 기혈 역류를 비롯한 내상까지.’
큰 싸움이 있었는지 부상이 적지 않다. 무슨 일인가 싶던 주호는 이내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했다.
‘그때였나.’
사신문과 접촉하기로 했던 날, 정보가 유출되었는지 사흉수가 습격해오지 않았나.
자신을 궁기라 말하는 고수에게 압도적인 격차로 농락당하며 맥없이 사로잡혔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중에 감사 인사라도 따로 해야겠군.’
상태창에 표시된 부상들은 그때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때부터 꽤 시일이 지났음에도 회복이 되질 않을 정도였으니.
사신문의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조상들의 염원을 기리는 의식부터, 그간의 공적과 노고를 위로하는 공치사까지.
“잠시 앞으로 나와주겠나?”
그것들이 모두 끝난 후, 하월벽은 대전 앞으로 주호를 호명했다.
“…….”
미리 들은 이야기는 없었다.
주호는 내색하지 않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짐에도 평정을 유지하며 그 앞에 섰다.
“본 문에 있어서 사신수란 이름은 특별한 것이라네. 그런 만큼 그 이름을 계승하기 위해선 시련을 통과해야 하지. 물론 선택은 자네의 몫일세. 설사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자네를 친구로 대접할 것을 약속하지.”
“만약 제가 이 시련에 통과한다면 무엇을 얻게 됩니까?”
“사신문의 인정, 그리고 증표일세.”
주호는 조금 오기가 생겼다.
그 인정이 무엇이기에 자신을 위해 이런 휘황찬란한 행사까지 진행하는가.
그리고 사신문 정도 되는 곳이라면 증표 역시 범상치 않은 물건일 터.
“여기까지 온 이상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지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범한 모습으로 말해오는 주호의 모습에 하월벽을 비롯한 사신문의 고수들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사신문에서 청룡이 갖는 의미는 특별했다.
사방신에서 그러하듯, 사신수의 수좌의 자리를 의미하며 앞으로 그들을 이끌어 갈 권한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주호에게 자격을 물었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시련이라고 했지만, 간단한 것이네. 본 문의 가장자리로 나아가면 망량환혼진이라는 절진이 펼쳐져 있지.”
사신문에 내려오는 절진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고절한 것이라며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시련은 망령환혼진에 들어가는 것이라네. 그 자세한 내용은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역대 사신수의 계승자들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시련을 받았지.”
띠링.
하월벽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오랜만에 듣는 소리가 주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임무]
사신문의 시련인 ‘망량환혼진’을 파훼하시오.
보상: 청룡의 계승자, 청룡신검(靑龍神劍)
실패했을 때의 조건이 없는 임무였다. 하지만 주호의 두 눈은 보상의 두 번째 항목에 고정되었다.
‘청룡신검이라.’
검의 길을 걷는 자로서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천마검, 군자검과 더불어 강호 삼대 신검으로 인정받은 유명한 이름이 아니던가.
설마 그 청룡이 사신문과 연관되어 있을 줄은 몰랐기에 놀라움이 적지 않았다.
‘신검이 보상이라면 절진에 뛰어드는 것쯤은.’
하월벽의 말대로라면 목숨이 위험하다든가 그런 종류의 절진은 아닌 듯싶었다.
일전 사신문으로 향할 때 천우희의 말을 떠올려보자면 정신을 현혹하는 진법이라고 하지 않았나.
곧 그들은 시련을 위해 사신문의 입구로 나아갔고, 그 뒤로 수많은 이들이 따라붙었다.
대전에 있던 사대 조직을 비롯한 사신문의 정예 고수들은 전부 동행한 듯했다.
“…오라버니.”
그들 사이로 수심이 가득한 얼굴의 주예향이 주호의 소매를 잡아 왔다.
“향아”
그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제 오라비가 위험한 곳으로 향하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소매를 붙잡고 있는 그 여린 두 손을 떨쳐내는 것은 숨 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지만, 주호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금방 끝내고 나오마.”
“…조심하세요.”
단정히 빗어낸 주예향의 머리를 쓰다듬어 헝클어트린 주호는 몸을 돌려 망량환혼진 앞에 섰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기감이 끊임없이 위험을 알리며 더는 전진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망량환혼진은 육체보다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절진이네. 그러니 무공의 고하에 상관없이 정말 위험해질 수 있어. 그래도 괜찮겠는가?”
도인같이 허연 수염을 기른 현무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오래 기다리시지는 않을 겁니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발을 빼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일. 그렇기에 그 담백한 말을 마지막으로 주호는 앞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불특정 진법에 진입하였습니다.]
[분석 중…….]
[3할…6할…7할…9할…….]
[…분석 완료.]
[망량환혼진]
[대상의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했던 기억을 반복합니다. 종래엔 스스로 그 굴레에 빠져 정신이 파괴되는 형식의 절진입니다.]
[생로(生路)를 탐색합니다.]
[실패.]
[생로(生路)를 탐색합니다.]
[실패.]
.
.
.
[생로(生路)를 탐색합니다.]
[…성공.]
모월 모일.
무림맹 벽보 앞에 수많은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
막, 경계 근무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던 주호는 무슨 사고라도 일어났나 싶어 슬쩍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잠자코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찰나, 곧 그 무리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단 노인.”
“오, 주호 자넨가. 복장을 보니 근무를 끝내고 돌아가던 길이였나 보군.”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주호의 말에 단 노인은 벽에 붙은 공지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무 중이라 보지 못했겠군. 마침 어떤가. 나도 적적하던 차였는데.”
아직 저녁이라 부르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한잔하러 가자는 이야기였다.
“좋습니다. 마침 어제가 월봉 날이었으니 제가 한턱내죠.”
“하하, 사실 알고 한 이야기라네.”
그들은 곧 자연스럽게 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북적거리는 하남 시내와는 달리 가장자리에 있는 그곳은 아는 사람만 다니는 가게로 조용한 것이 이야기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하늘은 슬슬 노을빛으로 물들어갔다. 창밖으로 그것을 올려다보는 주호의 두 눈 위로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는가?”
“…거, 귀신같으십니다. 잠깐 딴생각한 건데 눈치채시고.”
“살면서 늘어난 것이 남의 눈치를 보는 것밖에 없더군. 뭐, 나이를 먹는 게 그런 것이 아니겠나.”
“후…….”
한숨을 내쉰 주호는 술병을 들어 제 잔을 가득 채웠다. 그러곤 그것을 단숨에 들이키며 잠시간 침묵했다.
“근무를 서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뭡니까. 아,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게 맞을까?”
다시 잔에 술을 따른 주호는 이번에도 단숨에 그것을 들이키곤 말을 이었다.
“무림인이 되고자 강호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각박하더군요. 출신, 혈통, 무공, 재능……. 무슨 벽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노력만 하면 뭐든 될 거로 생각했지만, 그때의 자신이 너무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네는 무얼 하고 싶은 것인가.”
“…그냥,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한 자루의 검을 벗 삼아 강호를 주유하며 여러 사건을 해결하고, 가인을 얻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군.”
“보통 그런 걸 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쉽게도 어릴 적의 저는 꿈이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지만 말이죠. 한 자루의 검만으로 강호를 주유했다간 달포도 버티지 못한 채 어디 뒷골목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는 게 현실 아니겠습니까. 아니, 차라리 시신이라도 성히 남는다면 차라리 다행이겠군요.”
불평이나 불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냉정한 현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무능한 자신에 대한 자조였다.
“어디 하늘에서 기연이라도 하나 뚝 떨어지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옛적 서책이나 풍문에서 보자면 다들 알아서 잘 찾아가던데.”
“운명이란 것이겠지. 그리고 인생에 있어 기연이나 무공은 전부가 아니라네. 물론,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겠다만, 자네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시야를 넓히는 것이 중요하겠구먼.”
“그것도 다 배부른 소리입니다. 세상은 나약한 자를 부르지 않고, 낮은 자를 우러러보지 않으며, 가난한 자를 세우지 않습니다.”
“자네가 바라는 것은 강해지고, 높은 곳에 서며, 큰 부를 쌓는 것인가?”
쿵-!
“저는 그런 것을 위해……!”
주호는 탁자를 내리치며 큰 소리를 냈지만, 이내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자신이 발끈한 이유가 바로 정곡을 찔려서임이 아닌가. 그렇기에 주먹을 아스러질 듯 강하게 쥐고는 고개를 떨궜다.
“…세상에 강한 사람은 많고, 높이 있는 자도 많으며, 부자도 많습니다. 문제는 제가 그것들과 일 푼도 관련이 없다는 것이겠죠.”
단 노인은 그런 주호를 딱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주호는 무공에 있어 특출난 머리나 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요, 신체가 특별한 것도 아니었으며, 무재라고 할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우직하게 노력하는 모습 하나뿐. 그것이 기꺼워 몇 마디 붙인 것이 지금의 인연이 되었다.
조금 더 마음을 쓴다면 무공 정도야 몇 수 알려줄 수 있겠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괜히 어쭙잖은 깨달음을 얻어 어설픈 실력이라도 갖게 된다면, 그것이 주호의 인생에 있어 더 치명적인 독이 됨을 단 노인은 모르지 않았다.
차라리 좀 더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경험을 쌓게 해준다면.
“…자네, 아까 벽보 앞에 왜 사람들이 몰려 있는지 물어봤었지.”
“예? 아, 예. 그랬습니다.”
그렇기에 단 노인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것이 주호의 인생에 큰 변화를 몰고 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혹시, 무황이라고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