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정말이지 남자들이란.”
문밖에서 자신을 거론하며 주량 운운하는 소리를 들은 천우희는 피식 웃었다.
‘누굴 술꾼으로 알고 있네.’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 더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보태준 것도 없지 않은가.
“자, 우리도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그녀는 주예향을 데리고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연회 때만큼은 아니었으나 곧 먹음직스러운 식사가 준비되었고, 덕분에 주예향은 조금 전과 달리 부담 없는 모습으로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첫째 오라버니는요, 옛날부터 특이한 구석이 있었어요. 저랑 둘째 오라버니는 안에서 독서를 하거나 글공부에 취미를 두었는데, 첫째 오라버니만 무공 수련이나, 기연을 찾는다, 라면서 하루가 멀다고 밖을 쏘다니곤 했죠.”
식사하는 도중 그녀는 다른 의미로 입을 쉬지 않았다.
신난 모습으로 이것저것 말해왔는데, 가족이라곤 사신문의 이들이 전부인 천우희로서는 재미있고, 또 신기한 이야기였다.
“향이는 오라버니를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당연하죠, 제 자랑스러운 오라버니들인데. …갑자기 출가했을 때는 좀 미웠지만 말이에요. 아, 이건 오라버니께 비밀이에요?”
“당연히 지켜줘야지. 여자들끼리의 이야기잖아.”
“그래도 너무 심했다니까요. 글쎄, 말도 없이 출가했지 뭐예요? 서찰 하나 딸랑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져 버리다니.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버님 건강이 나빠지신 것도 다 그것 때문이었을 거예요.”
천우희는 주예향이 투정부리는 모습까지 귀여웠다. 자신에게 동생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첫째 오라버니랑은 언제 혼인하실 거예요?”
“푸!”
재잘거리는 주예향의 이야기를 들으며 막, 반찬을 넘기던 천우희는 기습적인 공격에 사레가 들렸다.
몇 번 기침을 토해내고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고, 황급히 물을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소리니. 결혼이라니?”
하지만 당황한 모습은 감출 수 없었다. 평소 능글맞던 분위기는 어디 갔는지 살짝 말을 더듬기까지 했으니.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보통이 아니었는데요. 이거는 동생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촉감이에요. 뭐라고 하지? 아, 애틋하다?”
그 당돌한 말에 천우희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쬐끄만 게 눈치가 보통이 아니네.’
그러곤 이내 표정을 정비하며 태연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이 하고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그이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의심스러운데요?”
“…티 많이 나?”
이번엔 주예향이 어이없어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럴 마음이 없다면 아버님이 왔을 때 그런 태도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이내 모습을 바로잡곤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향했다.
“언제부터였어요?”
“언제부터긴…….”
술을 진탕 퍼마시고 그 흥취를 못 이겨 하룻밤을 같이 보냈을 때라곤 순진무구한 주예향에게 절대 말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잠시 호흡을 고른 천우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첫 만남에서였지. 사실 네 오라버니 얼굴이 좀 그러잖아? 그걸 보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맹인이나 동성애자겠지.”
“하긴, 오라버니 얼굴이 그렇긴 하죠. 동생인 제가 말할 처지는 아닌 것 같지만,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머리 안쪽은 몰라도.”
“…진짜로 네가 할 말은 아니네.”
“그래도 싸요. 삼 년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 한 번도 없었으니.”
천우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마 무황의 비동에 갇혀 있었던 공백 기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자신을 제외하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주예향이 모르는 것도 당연한바.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기에 그녀는 짐짓 공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는 순조롭게 끝났다. 주예향은 오래간만에 맛있게 먹었다며 배를 두들겼고, 천우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동생은 무공을 익혀서 무엇을 하고 싶어?”
대략적인 개요는 이곳에 오면서 대충 들었다. 천우희가 물은 것은 좀 더 구체적인 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주예향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장 생각나는 건, 전에도 말했듯이 정천학관에 입관하는 것이겠네요. 가서 첫째 오라버니랑 같이 학관 생활도 하고, 좋은 신랑감도 찾고요.”
둘째 오라버니에겐 미안하지만, 자신은 가문의 일에는 재능이 없어 뜻을 두고 있지 않다며 그녀는 혀를 쏙 내밀었다.
“그 오라버니에 그 동생이구나.”
“피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죠.”
천우희가 헛웃음을 토해낼 찰나, 바닥을 울리는 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오라버니가 왔나 보다.”
그녀는 작게 웃으며 방문을 열었지만, 곧 자욱하게 풍겨오는 술 냄새에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당신, 얼마나 마신 거야?”
주호는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듯 마른 세수를 하며 안으로 들어온 그는 한쪽에 앉아 있는 동생을 보곤 밝게 웃었다.
“우리 예쁜 막내.”
주호는 그대로 걸어가 자신의 뺨에 주예향의 얼굴을 비비며 애정 표시를 했다.
“윽, 술 냄새나요!”
평소라면 좋다고 마주 얼싸안았을 그녀였지만, 얼마나 독한 술을 마셨는지 코를 찌르는 그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며 오라버니의 몸을 밀어냈다.
“…그렇게 심하나?”
동생에게 거절당한 주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제 매무새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겠는지 의문 어린 표정으로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조금?”
그녀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주호와 몇 번이고 술자리를 가졌었다.
밤이 샐 정도로 마신 적도 있었지만, 이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것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연회장에서 자리가 있은 지 아직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 지경이 되었다는 것은, 쉬지 않고 술을 마셨던가.
‘아니면 마신 술이 어마어마한 독주라는 것이겠지.’
피식 웃은 주호는 탁자를 짚으며 말했다.
“문주 어르신이 기쁜 날이라며 숨겨둔 명주 하나를 푸셨지. 이때껏 마셔본 술 중에서 가장 독한 수준이더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좋다고 마셨다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그러곤 목이 탔는지 탁자 위에 있던 주전자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것을 전부 비워낸 뒤에야 조금 나아졌는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강호의 노장들을 괜히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어.”
“그렇게까지 힘들면 내공으로 날리지그래?”
“아니, 독하긴 하지만 상당히 좋은 술이었다. 그런 짓은 주도에 어긋나는 짓이지.”
“그건 마음에 드는 소리네.”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곧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랐다.
“오라버니.”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쓴 주예향이 제 오라버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시간에 함부로 여성의 거처에 들어오는 것은!”
“누구 동생인지 참으로 잘 컸구나, 우리 예쁜 향아.”
주호가 그녀의 뺨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찹쌀떡처럼 쭉 늘어난 주예향의 얼굴에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천우희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웃기는 남매네.”
평소에 그 진중한 분위기는 어디 갔는지 헤실헤실한 미소를 지으며 제 동생의 얼굴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그리 우스울 수가 없었다.
“어, 언니!”
아무리 몸부림쳐도 주호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었던 주예향이 도움을 요청했다.
천우희는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겨우 웃음을 그치며 주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애꿎은 동생 그만 괴롭히고 잠자리에…….”
좋은 말로 타이르면 알아들을 것으로 생각한 그녀가 막, 운을 뗄 찰나 주호의 두 눈이 번뜩였다.
“잠자리라, 나쁘지 않지. 향아 밤이 늦었으니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아?”
그날은 여러 명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
“으윽.”
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주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전날 너무 과음한 것인지 머리는 지끈거려왔고, 온몸은 천근만근 무겁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쓸 틈도 없이 속이 타는 듯한 갈증에 인상을 쓰며 탁자 위에 있던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쯧.”
주전자에는 고작 한 모금의 물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혀를 한 번 차고 그것을 내려놓은 그는 전신에서 느껴지는 탈력감에 다시금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음?”
갑작스레 느껴지는 익숙한 기시감에 주호는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원래 배정받은 방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화장대를 비롯해 여러 물건의 형태를 보니 여성의 방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으음…….”
그때, 등 뒤쪽 침상에서 누군가 몸을 뒤척이며 내는 소리에 주호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뻣뻣해진 몸을 돌려 조심스레 이불을 들어 올리자, 새하얀 나신이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으음.”
주호는 작게 신음을 뱉었다.
천우희는 늘 말버릇처럼 자신들의 사이가 하룻밤만의 불장난이며 절대 착각하지 말라며 내뱉곤 했다.
본디 남녀 사이에는 여러 형태가 있는바.
술자리 이후 가끔 동침하긴 했어도, 그러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기에 주호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주었다.
하지만 오늘 이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 아닌가. 그렇기에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필사적으로 전날의 기억을 복기했다.
‘분명 문주가 주는 술을 마셨고…….’
절로 감탄이 나오는 청아한 향에 비해 엄청나게 독했던 술이란 기억은 남아있었다.
그걸 벌컥벌컥 들이키는 노강호 사이에서 더 있으면 정말로 죽을 것 같아 슬며시 자리를 빠져나왔고, 문득 향이가 보고 싶어져 천우희의 거처로 향했다.
“후…….”
그리고 그때부터 기억이 끊겼다.
두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쥐어짜 냈지만, 정작 중요한 부분들은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보이기만 했다.
“잘 잤어?”
“…일어났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주호는 살짝 포기한 태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막 잠에서 깨어난 천우희가 지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비볐다.
“용케도 일어났네. 그렇게 힘을 썼으니 정오까지는 꼬박 누워있을 줄 알았는데.”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지?”
그 말에 천우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난리를 쳐놓고 기억을 못 해?”
“…그건.”
힐난에 가까운 어조였다. 주호의 말문이 막히자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끌어 올려 제 몸을 덮었다.
“향이도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남녀 사이의 일을 이해해주겠지.”
“향이는 아직 이르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호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렇기에 천우희의 얼굴은 또다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오라버니는 난봉꾼에다 짐승인데, 동생에게는 정조를 강요하시겠다?”
“괜찮은 녀석이라면 당연히 두 팔을 벌려 환영하겠지만, 어쭙잖은 녀석이라면.”
말을 확실하게 끝맺진 않았지만, 곤죽을 내버리겠다는 의지는 확실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천우희는 이불 밑으로 불쑥 손을 내밀어 주호의 손을 붙잡고는 그 안으로 끌어당겼다.
“뭐, 그런 가정교육은 오라버니께서 알아서 하시고.”
“읏?”
저항할 틈도 없이 그 옆에 눕게 된 주호를 바라보며 천우희는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일정은 점심 이후부터니까 조금만 더 누워있자.”
짤막한 하품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