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50화 (50/300)

#50화

안쪽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열기가 주호를 향해 들이닥쳤다.

웃통을 벗고 수련에 매진하던 사내들이 모두 구십구 명.

“…….”

그들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호오.’

보란 듯 자신을 향해 뿜어지는 기세에 주호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터트렸다.

개개인이 최소 일류 그 이상의 고수였다.

초일류도 적지 않았고, 간간이 절정에 이른 이들도 섞여 있었다.

과연, 사신문의 정예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수준의 전력이었다.

청룡 단원들은 들고 있던 검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일제히 그를 향해 몸을 돌리며 포권을 했다.

“청룡을 뵙습니다-!”

청룡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그 목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향이가 있었다면 징그럽다면서 난리를 쳤겠군.’

헐벗은 상체에서 구릿빛 근육이 꿈틀거리는 모습은 생동감이 넘쳤다.

그들은 주호의 등장에 수줍은 태도로 조금씩 앞까지 다가오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들었습니다. 주작과 호각을 다투는 고수시라고.”

“호각?”

어느새 이야기가 퍼진 것인지 그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주호는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라면 처음 만난 이들에게 예의를 차렸겠지만, 특수한 상황이기도 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반짝거리는 눈동자들을 실망시키기 싫었다.

“미안한 소리지만, 그녀는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

“와아아아아아-!”

그 패기 넘치는 대답에 청룡 단원들을 환호성을 질렀다.

같은 소속의 조직이라 할지라도 엄연한 무력 단체인 만큼 서로를 의식하고 있기 마련이다.

주호 역시 무림맹을 비롯해 여러 조직의 소속이었을 때 이미 여러 번 경험해본바.

다행히 그 대답은 정답이었는지 그들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

“어떤 것 같습니까, 청룡단은.”

장산철의 물음에 주호는 쭉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명 한명이 정순하고 강인한 기운을 품고 있다. 더욱이 장산철의 물음에 어떠한 대답이 나올지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주호에게 하나같이 시선을 모았다.

“내 이때껏 강호를 돌아다니며 많은 조직을 보아왔지.”

무림맹에 있으면서 먼발치에서나마 맹의 정예 조직을 마주한 순간이 여럿 있었다.

그땐 말단 무사였기에 그들이 그렇게 위압감 있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다. 청룡단은 그 어느 곳보다 더 뛰어나 보인다고!”

하지만 주호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강호의 물밑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자존심이란 중요한 문제이리라.

그렇기에 그것을 치켜세워주자니 모두가 다시 환호해오며 손뼉을 쳤다. 옆에 있던 장산철 역시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해왔다.

“저희도 청룡을 단주로 모실 수 있어서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다만.”

“다만?”

“청룡단의 대대로 내려오는 규칙이 있습니다. 삼백 년 동안 유명무실한 상태였지만, 모름지기 청룡단주는 청룡단의 모두와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죠.”

주호를 향하던 호감 섞인 시선이 이내 거친 투기로 바뀌었다.

‘모두와 싸워 이겨야 한다, 라.’

주호 역시 강호인이었다.

힘의 우위로 흑백을 가르는 것은 꺼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투기에 흠뻑 젖은 장내의 공기를 음미하며 씩 웃었다.

“좋군.”

그러면서 제 검대에 찬 검 위로 가볍게 손을 올렸다.

하지만 그런 한껏 잡은 분위기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나긋한 목소리에 모두 어긋나고 말았다.

“좋기는 뭐가 좋아. 저녁 식사 준비가 됐으니 얼른 오기나 해.”

팽팽히 맞붙기 직전의 투기가 흩어졌다. 그것에 장내에 있던 모두는 목소리가 들려온 담벼락 위를 바라보았고, 그 위에 걸터앉아 그들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던 한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로, 땀내나는 남자들이란.”

무식하기 짝이 없다며 천우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작을 뵙습니다-!”

주호 때와 마찬가지로 힘찬 목소리가 연무장 안에 울려 퍼졌다.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에 화답한 천우희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이야, 다들. 오늘 그이는 선약이 있으니 청룡단의 그 땀내나는 신고식은 조금 미뤄주지 않겠어?”

오오-.

그녀의 말에 청룡 단원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곤 주호와 천우희를 번갈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보통 관계가 아닌 듯합니다!”

“이거 총각은 서러워서 살겠나!”

짐짓 여유로운 모습으로 등장했던 천우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등 뒤에 매고 있던 시뻘건 주작도를 빼 들자, 그 기세에 눌린 청룡 단원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누, 누구 말씀인데 따르지 않겠습니까! 자, 이놈들아! 오늘은 이만 해산!”

식은땀을 흘리던 장산철이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상황을 중재했다.

“…….”

천우희는 입술을 삐쭉이며 겨우 도를 거뒀고, 청룡 단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아쉽다는 얼굴로 주호를 바라보며 후일을 기약한 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수하들이 전부 연무장을 빠져나가자 장산철도 이만 가보겠다며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내일 의식 잘 부탁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얼마만의 의식입니까.”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대화에 주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천우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던 주호는 이내 장산철의 기척이 사라지자 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의식이 뭐지?”

“환영식 같은 건데, 뭐 자세한 건 내일 알게 될 거야. 미리 말해주면 재미없잖아?”

목소리를 듣자 하니 평범한 것은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아꼈고, 주호 역시 더 묻지 않았다.

그들은 곧 작은 전각에 도착했다.

주호는 자신과 천우희 그리고 더해봐야 문주 정도만 식사에 자리할 줄 알았지만, 이미 몇 명의 인영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각각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것을 보니 사신문의 중진이라 판단했다.

“오라버니.”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채 구석에서 쭈그리고 있던 주예향이 제 오라버니를 발견하곤 한껏 밝은 얼굴로 손짓했다.

“향아, 너도 와있었느냐.”

“무슨 환영식이라고 해서요. 그런데 나이 드신 분들밖에 없어서 조금 그랬어요.”

뒷말은 나름대로 배려를 한 것인지 가까이 있는 오라버니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췄으나, 장내에 자리한 이들 중 그것을 듣지 못할 정도의 하수는 없었다.

“큭.”

천우희를 비롯한 일부 젊은 고수들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나이가 든 대다수는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대다수가 나이 많은 사람이라는 주예향의 말은 일단 사실이었으니.

“…….”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주호는 그저 무안한 얼굴로 뺨을 긁었다.

“자자, 오늘 자리의 주인공도 왔겠다, 슬슬 식사를 시작하지. 일단, 모두 바쁜 와중에 모여주어서 고맙네.”

손뼉을 쳐서 장내 분위기를 정리한 하월벽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사신문의 고수들은 험상궂은 외모와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들었겠지만, 무려 삼백 년이란 공백 끝에 새로운 청룡이 본문을 찾아왔다네. 경사도 이런 경사가 없지 않겠는가. 의식은 내일이지만, 오늘은 다들 안면을 트게 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네.”

장내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그들 모두의 기세를 마주한 주호는 마치 태산이 자신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을 들었다.

‘이것이 사신문의 저력.’

한명 한명이 자신보다 하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중 대부분은 올려다보아야 할 경지였으니.

“주호라 합니다. 부족한 몸이나마 청룡의 진전을 잇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교관의 신분으로 정천학관에 몸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많은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에도 주호는 담담한 태도로 제 소개를 마쳤다.

“호오.”

그가 아무런 흔들림 없이 자신들의 기세를 받아내자 좌중 사이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왜 그러느냐?”

주변에 집중하고 있던 탓일까.

자리에 앉은 주호는 은밀하게 자신을 불러오는 동생의 부름에 살짝 반응이 늦었다.

뒤늦게 그가 고개를 돌리자, 주예향은 살짝 걱정이 든다는 표정으로 귓속말을 건넸다.

“…다들 오라버니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은데,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 강호엔 다양한 기호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하하.”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주호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녀 딴에는 제 오라버니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인 것이었지만, 장내에 있던 이들은 다시 한번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푸하하하하하!”

천우희는 더 이상 참지 못한 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를 따라 몇 명 역시 실소를 머금었지만, 대부분은 얼굴을 붉히며 민망한 듯 연신 헛기침만 내뱉을 뿐이었다.

기성 고수와 신진 고수가 대면하는 첫 만남은 순진무구한 소녀의 말에 묘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처지이니 질책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겨우 진정한 천우희는 너무 웃어 눈물이 고인 눈가를 닦으며 주예향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동생은 이 자리가 조금 불편한 듯싶은데, 시커먼 남정네들은 알아서 드시라고 하고, 이 언니랑 다른 곳으로 갈까?”

“그게 좋겠군. 미안하네, 작은 소저.”

웃음기 섞인 그녀의 말에 하월벽 역시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아무래도 조금 심도가 있는 것들이었으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주예향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천우희와 함께 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귀여운 아이로고.”

마치 제 손녀를 보는 것 같다며 누군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시커먼 남정네들만 남았으니 편하게들 해보게. 괜히 주름 잡다가 조금 전처럼 망신살 뻗치지 말고.”

“에잉, 문주. 문주가 가장 무게 잡았던 걸 모를 줄 아오.”

“허어, 이 사람이. 아무리 그렇다곤 하나 문주께 무슨 망발인가.”

좌중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내리 앉았던 태산 같은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마실을 나온 동네 어르신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건 조금 놀랍군.’

무림엔 배분이란 것이 있었다.

아무리 친분이 있더라도 서로 간의 예의와 존중을 지키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들은 모두 친우처럼 스스럼없이 서로를 향해 말을 건넸다.

“늙은이들이 조금 실없는 모양새지? 다 가족 같은 사이라 무림의 예의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아서 말이네.”

다들 제각기 떠드는 와중, 멀뚱히 있던 그의 옆으로 한 노인이 다가와 말했다.

“그래도 보기 좋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허례허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하하하, 청룡이 뭘 좀 아는군.”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조금 전까지 주변에서 눈치를 보던 이들이 순식간에 관심을 드러냈다.

“그나저나, 자네 술 좀 마시나?”

“주작에 지지 않을 만큼은 마시는 것 같습니다.”

“호오?”

자신감 넘치는 그 말에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작은 본문에서도 손에 꼽히는 술꾼인데?”

“이미 몇 번 대작해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엔 조금 힘겨웠어도 요즘엔 따라갈 만하더군요.”

그 말에 그들은 씩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아는 데 있어서 술만큼 진솔한 것은 없지. 어떻습니까, 문주?”

“좋지, 오늘 한번 거나하게 달려보세.”

술이란 말에 하월벽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을 불렀다.

곧 탁자 위로 술상이 차려져 나오고 향긋한 주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이로군.’

왠지 학관의 동료 교관들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