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계속 이야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들은 곧 식사를 시작했다.
도시를 떠난 지 첫날이기에 객잔에서 싸 온 음식으로 허기를 채웠고, 말들이 체력을 회복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렸다가 움직일 생각이었다.
“흠.”
잠시 산책을 하러 주위를 둘러보던 주호는 저 멀리서 천우희와 밝은 얼굴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기분 좋은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랑일 때, 주호는 근처에 있던 나무에 등을 기대곤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상태창.”
오랜만에 부르는 이름이었다.
학관에 있을 땐 상태창을 호출할 일이 없어 굳이 사용하지 않았으니.
다만, 예전에 본가에 들렸을 때 이후로 동생의 상태창을 확인한 적이 없어 조금 살펴둘까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상태창이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이건.”
[상태창]
이름: 주예향
별호: -
직업: -
나이: 열아홉
소속: 주가장
무공: -
경지: -
잠재력: 上中
호감도: 上上
원래 있던 항목에 변한 것은 없다. 다만, 그 위로 없던 것이 새로이 나타났다.
삐빅-
마치 주예향의 전신을 축소 시켜 놓은 듯한 형상이 상태창에 자리했다.
그 주위로 여러 가지 실선이 그어져 현재의 상태를 나타냈지만, 아쉽게도 무슨 글씨인지 읽을 수 없었다.
‘이건 좀 더 공부가 필요하겠군.’
상태창을 바라보던 주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의미하다 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였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문득 무언가가 머리를 스쳤다.
[상태창의 개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자신을 궁기라고 칭한 사흉수의 고수에 의해 목숨을 잃기 전, 수많은 알람이 그의 귓가를 때렸다.
상태창의 개화.
그때 일어난 변화가 상태창에 영향을 끼친 것이라 주호는 짐작했다.
“무어라 쓰인 것이지.”
기괴한 모양의 도형과 함께 읽을 수 없는 문자가 그곳에 쓰여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남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결국, 혼자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에 주호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그의 시선이 상태창의 항목으로 향한다. 잠재력의 수치에 상중(上中)이라 적혀 있는 것을 본 주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내 동생이로구나.”
자신의 밑에 있는 후기지수로 따지자면 상상(上上)인 남궁연에겐 미치지 못하나, 천마신교의 소교주인 위천강이나 주작의 후계자인 천후와 같은 수준이었다.
즉, 자신이 조금만 이끌어준다면 대성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일 터.
“문제는 무슨 무공을 가르치느냐인데.”
상태창에는 수많은 무공이 기록되어 있었다. 가볍게 세어 백 개가 넘어갈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합쳐도 청룡신공의 반절도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청룡신공을 가르쳐줄 수는 없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한계였다.
청룡신공을 익히기 위해선 아주 특별한 과정이 필요했고, 지금으로선 그것이 불가능했으니.
“아.”
문득 천우희가 예전에 했던 말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사신문에서 무공을 가르쳐준다고 했었나.”
청룡신공과 주작신공은 어디에 내놓아도 신공절학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모자람이 없는 무공이었다.
그런 신공절학의 기원이 되는 문파의 무공이 평범할 일은 없을 터.
“남매가 나란히 강호의 고수라.”
내년, 주예향이 정천학관에 입관 시험을 치르는 광경을 잠시 생각해보았다.
자신은 이루지 못했던 꿈이다. 마침 그녀의 뜻 역시 이와 같아 알맞은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호쾌한 실력으로 보기 좋게 심사를 통과한 그녀, 그리고 그 옆에서 손뼉을 치며 축하해주는 자신. 그보다 보기 좋을 광경은 없을 듯했다.
“오라버니! 언니가 슬슬 출발하자고 해요!”
자신을 부르는 주예향의 목소리에 주호는 상상의 나래에서 빠져나왔다.
“…가지
그러곤 헛기침을 내뱉곤 기대있던 나무에서 등을 떼곤 그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호북 무한.
며칠을 이동한 끝에 그들은 사신문이 위치한 곳에 도달했다.
줄기줄기 이어진 산등성이 앞에서 마차는 속력을 늦췄고,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천우희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이동해야 해. 마차로는 산을 오를 수 없으니까.”
그 말에 제일 신난 것은 주예향이었다.
곧 마차가 멈추자 그녀는 제일 먼저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다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이 높네요.”
“장관이로군. 정상에서 본다면 절경이겠어.”
주예향의 말에 주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흘렸다.
흔히 중원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산을 오악(五岳)이라 칭했다.
동쪽의 태산(泰山), 서쪽의 화산(華山), 남쪽의 형산(衡山), 북쪽의 항산(恒山), 그리고 중부의 숭산(嵩山)까지.
물론 눈앞의 산이 그런 오악들에 비견된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사신문이 위치한 곳은 천와(天窩)라 불리는 산이야.”
“하늘의 둥지라. 사신문의 기원이 된 곳이니 적당하다고 해야 하나?”
“그거야 작명한 고인들만 알고 있겠지.”
자신이 익힌 무공의 기원이 된 곳으로 향하는 주호의 심정은 살짝 미묘했다.
무황이 창조한 것으로 생각했던 청룡신공이 사신무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니.
사신문으로 올라가기 위해 산의 초입으로 막 발을 내디뎠을 때, 낯선 기운들이 주호의 감각을 건드렸다.
“……?”
즉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상태창 위로 새로운 글귀가 떠올랐다.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해석을 시작합니다.]
갑자기 멈춰선 그의 모습에 주예향이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지만, 주호는 눈앞에 떠오르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건…….’
시야가 점멸하는가 싶더니 산의 전체적인 모형도가 그 앞에 투시되었다.
주호가 느낀 낯선 기운은 이곳을 중심으로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산 곳곳에선 사람을 뜻하는 빨간 점이 새겨졌다.
‘호오.’
생각지도 못한 기능에 주호는 속으로 감탄을 터트리며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곤 곧 그 푸른 기운으로 뒤덮인 공간에 진법이 펼쳐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해석 완료]
주호는 다시금 새로이 떠오른 글귀에 손을 가져갔다.
가볍게 그것을 누르자 곧 여러 개의 표가 허공에 떠오르며 해석한 정보를 표시했다.
[이름 불명(不明)]
개체명 ‘천우희’가 펼쳤던 것과 칠 할가량 흡사한 진법으로 보입니다.
[파훼법]
一. 들어간 시점에서 우로 일보, 좌로 삼보, 오행의 역방향을 따라 칠보 움직인 후 그대로 직진하면 순리의 역행을 관통해 진법을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二. 진법의 축을 이루고 있는 사방위와 중심의 역할을 맡은 구조물을 파괴하면 진법 자체가 파괴됩니다.
三…….
파훼법까지 적힌 상태창의 내용에 주호가 살짝 입을 벌릴 찰나, 앞서가고 있던 천우희가 멈춰선 그를 보곤 다가와 물었다.
“왜 그래?”
“…곳곳에 진법이 펼쳐져 있군.”
“그게 느껴져?”
주호의 말에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천와산은 오악에 포함된 산들처럼 명산은 아니어도 천혜의 요새로 불릴 법한 곳이었다.
지형도 험난한 데다 사시사철 계절을 가리지 않고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짙은 안계는 그야말로 자연이 펼쳐낸 절진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신문은 거기에 더해 사흉수 같은 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대로 내려오는 절진을 산 곳곳에 설치했다.
절진은 아주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기에 어지간한 고수라도 직접 당해보지 않고 진법이 펼쳐져 있다 눈치채기 힘들었다.
“본문에서 펼친 절진이야. 외부에서 침입자를 막는 용도로 쓰지. 평상시엔 약초꾼 같은 민간인도 산을 오르니 살상력은 없애놓은 상태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은 진법이 아니라 상태창이 보인 새로운 기능 때문이었으니까.
그들은 그대로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선두에서 천우희가 방향을 잡았고, 그 뒤로 주예향과 주호가 따랐다.
중턱쯤 올라가니 짙은 안개가 주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
시야가 막히자 불안해진 주예향은 제 오라버니의 옆으로 붙어서서 그 손을 꼭 붙잡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반 시진쯤 그렇게 산을 오르자니, 갑작스럽게 안개가 걷히며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탁 트인 경관이 그들을 반겼다.
“어? 정상은 더 위일 텐데.”
주예향은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체감상 꽤 걸어온 듯해 보였지만, 아직 산 중턱에도 오르지 못했을 터.
주호 역시 마찬가지인 표정이었기에 천우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쪽을 가리켰다.
“진짜 산밖에 없었다면 어떻게 사신문이 자리 잡을 수 있겠어.”
잠자코 따라오라는 말에 주 씨 남매는 신기하단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곧 탁 트인 경관 사이로 거대한 벽이 보인다. 숫제 작은 성이라 부를 법한 그 외관에 주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건 문파라기보단 숫제 하나의 성이 아닌가.’
아무래도 사신문에 관한 생각을 크게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없네요.”
거대한 규모와는 달리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예향은 의아한 듯 연신 주위를 살폈지만, 주호의 두 눈은 정확히 벽 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최소 수천 명이다.’
벽 안쪽에 수많은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천우희 역시 그것을 눈치챘는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뺨을 긁으며 슬쩍 그의 눈치를 봐왔다.
“삼백 년 만의 청룡이라 다들 들떠서 그런 거야.”
변명이라고 내뱉은 말은 궁색하기만 할 뿐이었지만, 주호는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저리도 열렬히 환영해주는데 어서 들어가 봐야지 않겠나.”
주호가 제일 먼저 다가가자니 커다란 문이 거친 소음과 함께 열려갔다.
쿵. 쿵. 쿵.
그와 동시에 무언가를 바닥에 찧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뭐예요?!”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주예향은 천우희의 등 뒤로 숨었지만, 곧 열린 문 사이로 드러낸 안쪽의 풍경에 숨을 들이켰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수천, 아니 어쩌면 만 명이 넘는 인원이 내뱉는 함성이 천지를 울렸다.
각양각색의 기운을 가진 이들이 제 병장기로 땅을 두들기며 주호 일행의 방문을 환영했다.
‘이들이.’
절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광경이었다.
누가 알겠는가, 어릴 적 읽었던 영웅담에서나 나오는 신비 세력이 이렇게 버젓이 존재할 줄은.
주호는 설렘을 숨기지 못하며 문 안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천지를 메울 듯 진동했던 함성이 잦아들기 시작했고, 곧 사방은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뒤,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한 중년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인가.”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말이었다.
주호는 고개를 돌려 자신 앞에 선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격이 다른 고수다.’
절정의 완숙에 올랐음에도 감히 그 경지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고수였다.
아마 무림 맹주인 단철량과 비슷한 수준의 경지일 터.
“주호라 합니다.”
주호는 그저 진중한 태도로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흠.”
그를 바라보던 중년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사신문에 들어간 천우희의 보고엔 자신과 주호의 차이가 고작 한 수 정도라고 하였다.
‘잘 못 읽었군.’
하지만 이건 고작 한 수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격차가 아니었다.
이십 대 중반에 불과한 나이에 절정의 완숙에 이르렀다니.
“본인은 당대 사신문의 문주를 맡은 하위벽이라 하네.”
하위벽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주호를 바라보았다.
“사신문에 온 것을 환영하네, 당대 청룡이여.”
마지막 청룡이 모습을 드러낸 지 정확히 삼백이십칠 년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