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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귀환-47화 (47/300)

#47화

“더 있으셔도 되는데.”

“아니다, 네 아비 말처럼 오랫동안 집안을 비워놓지 않았느냐.”

어머니의 말에 주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여드레째 아침. 주씨 일가는 그동안의 여행을 끝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오가는 시간에 비하면 짧은 체류였지만, 더는 가문을 비워 둘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주산 역시 아쉬운 표정으로 후일을 기약한다며 이별을 고했고, 그렇게 주씨 일가는 다시 고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설레는 기분이네요.”

다만, 주예향만은 주호의 곁에 남았다.

다른 이들은 가문의 일 때문에 돌아가야 했지만, 그녀는 아직 그런 책무에서 자유로운바.

이렇게 된 것 좀 더 바깥 경험을 쌓고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실 주호는 미안한 소리지만, 제 동생을 좋은 말로 타일러 돌려보내려고 했다.

가족 전체가 함께 이동한다면 돌아갈 때 자신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겠지만, 사신문의 일정 이후에 남궁세가의 초대 건도 남아 있었다.

산동까지 동생을 데려다주고 간다면 시간이 모자랐으니.

“내가 가지 뭐.”

하지만 천우희의 개입에 활로가 열렸다.

본문으로 복귀 후 산동 근처에 임무가 있을 예정이라면서 그녀는 흔쾌히 주예향과 함께 주가장으로 가겠다 약조했다.

주호는 잠시 고민했으나, 가족과 돌아가는 것보다 절정의 고수와 동행하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겠는가.

주한진은 처음엔 격렬하게 반대했다.

주호는 그래도 제 한 몸 건사할 줄 아는 사내자식이었다. 하지만 주예향은 아직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이 아닌가.

하지만 주호의 보장에 긴 한숨을 내쉬며 허락했고, 그렇게 주씨 남매의 호북행이 결정되었다.

“향아, 사실 우리는 관광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 정도는 이 소녀도 눈치채고 있었어요.”

주예향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두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천우희는 이내 깔깔거리는 주호의 어깨를 툭 쳤다.

“천성이 무림인인데?”

“…….”

주호는 인상을 쓰며 천우희를 노려보았다.

이 강호가 얼마나 험한지 그들 자신이 더 잘 아는바.

그렇기에 이런 순수하고 어여쁜 동생이 그런 것에 선망을 가지는 자체가 거부감이 들었다.

“동생, 아 동생이라 불러도 되지?”

“네, 저도 언니라고 부를게요!”

순식간에 사이가 좋아진 두 여인의 모습에 주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우희는 원래 낯을 가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주예향 역시 잔뜩 사랑을 받고 잘아 구김살 없는 성격에, 호감을 얻기 쉬운 성향이었으니.

“거, 언니라고 부르기에 나이 차이가 조금…….”

“…….”

벌써 들러붙는 모양새가 아니꼬워 주호는 슬쩍 이죽거림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을 들은 그녀의 싸늘한 눈초리에 금세 입을 닫고 말았다.

“스승님께 춘추 이야기는 금어입니다.”

그 옆에 있던 천후가 못 말린다는 듯 작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쉬익.

그와 동시에 한줄기 파공성이 허공을 가른다. 숙련된 살수가 던진 암기처럼 쏘아진 나무젓가락 한쪽이 주호와 천후의 사이 정중앙의 벽에 정확히 꽂혔다.

웅웅.

내공까지 담았는지 벽을 반쯤 파고 들어간 그것은 아직도 여력이 남은 듯 그 끝이 부르르 떨어댔다.

“…….”

천후의 뺨을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직후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스승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뭘 그리 쑥덕거려. 제자야, 너도 다른 임무가 있잖니, 그 준비는 끝났을까?”

“…빠, 빨리 떠나겠습니다!”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싸늘한 목소리에 천후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더니 경직된 표정으로 크게 외쳤다.

그러곤 다른 이들에게 작게 인사를 한 후 후다닥 뛰어나갔고 주호만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오라버니.”

“음?”

그를 위기에서 구출해준 것은 다름 아닌 주예향이었다.

그녀는 호기심이 그득한 눈동자로 제 오라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천 언니가 오라버니보다 강한가요?”

“뭐?”

주호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했기에 제 동생이 이런 질문을 해오는 것인지.

천우희는 슬쩍 피했지만, 둘은 이미 정천학관 내부에서 손속을 나눠본 전력이 있었다.

그때의 우열은 명백한바.

“내가 더 강하다.”

“그때의 난 진심이 아니었는데.”

주호의 말에 슬쩍 옆으로 다가온 천우희가 딴지를 넣는다.

“주작의 불꽃은 두 번 변해.”

“청룡은 굳이 변하지 않더라도 강하지.”

시선 사이에 불꽃이 튈 정도로 신경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주호는 자신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였더라면 분명 우위를 차지하긴 했겠지만,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지는 못할 터였다.

생사결로 갔다면 자신 역시 곤욕을 치렀을 터.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가로막고 있던 벽을 깬 이상 천우희는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굳이 필사의 각오가 아니더라도, 수월하게 승리를 취하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그려지기까지 했으니.

기세를 드러내지 않아 그녀는 아직 모르는 듯했지만, 이미 그사이에 격차는 손으로 짚고 넘어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후였다.

“그리고 당신은 이미 나에게 졌다고 선언하지 않았나?”

“학관에서의 일은 저번에 말했잖아. 주변의 이목이 쏠리는 것이 걱정돼서…….”

“아니, 그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호의 눈동자에 음흉한 기운이 스치자 천우희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내가 그랬다고?”

“어느 날의 밤이었나. 거의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헐떡이면서 패배를 시인했었지, 아마?”

“……?”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주예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천우희 역시 처음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헐떡였다는 대목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순간처럼 무언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 미친……!”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게진 그녀가 역정을 내며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주호는 운룡보까지 밟으며 저 멀리 달아난 뒤. 그들의 호북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무슨 소리지?”

물론, 주예향이 제 오라버니가 한 말의 뜻을 알아차린 것은 한참도 더 뒤의 일이었다.

***

“오라버니, 이 이후로도 계속 마차로 이동하나요?”

객잔에서 출발한 지 몇 시진이 지났다.

점심을 먹어야 했던 터라 마차를 멈춘 뒤, 한적한 길가에 자리 잡아 식사의 준비를 하자니 찌뿌둥한 표정으로 몸을 풀고 있던 주예향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해 왔다.

“어디 불편하느냐?”

“불편한 것은 아닌데…….”

주호의 물음에 그녀는 살짝 머뭇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표정을 보자니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자신 역시 그 나이대에서는 강호를 주유하는 생각을 하곤 했으니.

‘기대한 것과 달라서 그런 것인가.’

어릴 적부터 읽어온 영웅담이나 풍문에 의하면 이 강호는 사건과 사고의 연속이라고 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본 바로는 그런 것은 보통 보이지 않는 물밑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지금은 더욱 주예향이 기대하는 상황이 일어나기 힘들 것이었다.

‘열여덟 명인가.’

범상치 않은 실력의 고수들이 객잔을 나오고 가도를 벗어날 때부터 마차의 주변에서 은밀히 따라오고 있었다.

적들인가 싶어 대비해야 하나 싶었지만, 분명 그들의 기척을 느꼈을 천우희가 평온한 얼굴로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사신문의 무인들이 호위로 따라붙은 듯했다.

일류를 넘어선 고수가 열여덟.

어지간한 문파라도 쉬이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신문의 전력에 새삼 감탄한 주호였다.

“호북에 있는 본문의 영역까지 들어서면 그때부터는 마차에서 내려 움직일 거야. 지루하겠지만, 그때까지만 참아줘.”

천우희가 미안하단 표정으로 주예향의 손을 잡으며 말해 왔다.

“아, 아니에요. 동행하고 싶다고 조른 것은 저니까요.”

주호는 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동생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출가 전의 기억에선 그저 조용히 자신과 주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던 아이가 아닌가.

말도 별로 하지 않았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다며 의사를 표현하는 일도 드물었었다.

‘그 조그마하던 것이 이리도 성장하다니.’

아마 가문이 휘청거리니 자신이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해 태도를 바꾼 것일 터.

그저 대견한 마음만 들 뿐이었다.

“그나저나, 동생은 내년에 입관 시험을 치를 생각이라고?”

“네, 오라버니가 계신 정천학관에 지원하려고 했어요.”

“무공은?”

알려준 것이 있냐는 그녀의 시선에 주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출가 이후부터였다.

그전에는 홀로 몸을 단련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남을 가르칠만한 무공을 알고 있지 않았다.

“그게, 저도 혼자 수련한 게 전부라서요.”

“조금 볼 수 있을까?”

천우희의 말에 주예향은 쑥스러운 듯 뺨을 긁었다. 그러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호오, 태극권인가.”

무당의 태극권이라함은 굉장한 절기 같지만, 실상은 기본적인 품새로 저잣거리에서 몇 냥만 내면 구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무공이었다.

“합!”

태극권이 펼쳐지자 평소의 순진무구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절도 있는 기합성과 함께 팔다리가 매섭게 휘둘러졌다.

생각보다 본격적으로 익힌 듯한 움직임에 주호는 무심코 감탄을 흘렸다.

삼초식 이십칠형.

태극권의 기본적인 품세를 모두 펼쳐낸 주예향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어떤가요?”

“…….”

주호와 천우희는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특히 주호는 강호를 향한 주예향의 동경이 그저 그 나이대의 자신이 했던 것처럼 어리석은 소망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웬걸?

그때의 자신보다 더 본격적으로 펼쳐낸 무공에 놀랐을 뿐이었다.

“나보다 네가 낫구나.”

주호는 미소를 지으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예향은 자신의 머리를 헤집는 거친 손길에 고개를 한다면서 웃음을 토해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우희의 눈은 조금 깊어졌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정천학관에 지원하기엔 많이 모자라.”

“…그렇죠. 저는 내가기공도 익히지 못했고, 그저 껍데기를 흉내 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그것을 꼬집는 천우희의 말에 주예향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였다.

“…….”

주호는 그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자신 역시 태생의 한계를 저주하며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주예향의 눈에서 보이는 정광은 올곧은 마음을 가진 자의 것처럼 바르고 맑았다.

‘어찌해야 할까.’

무공은 가능한 어린 나이에서부터 수련을 시작하는 것이 좋았다.

몸에 탁기가 덜 쌓여 있을수록 자연지기를 받아들이기가 쉬우며, 더욱 정순한 기운을 쌓을 수 있으니.

하지만 주예향의 나이는 올해로 열아홉. 내년이면 벌써 약관에 이르게 되었다.

보통의 시선으로 보자면 한참은 늦은 상황이었으나, 그녀에게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내가 있다는 것이지.’

마음만 먹는다면 그러한 벽 따위 일수에 허물어 버릴 수 있는 실력이 자신에게 있었다.

“왜 무공을 배우고 싶은 것이냐.”

“…….”

주호의 물음에 주예향은 미소를 거뒀다. 그러곤 진지한 표정으로 제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꼭 무림인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에요.”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모습에 천우희 역시 흥미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주예향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약하다고 해서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이에요.”

“휘둘리지 않는다, 라.”

“모두가 마음속에 올바름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이상론임을 모르지 않을 정도로 소녀는 어리지 않습니다. 다만, 적어도 저와 제집 안 사람들이 더는 그러한 일로 힘들지 않았으면 해요.”

‘혈사문의 이야긴가.’

양친이 건강의 문제로 쓰러지시고 자리를 비운 와중 가문이 핍박받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본 그녀였다.

그 이후에 주호가 직접 나서서 혈사문 자체를 박살 내버렸지만, 남아있는 상흔은 쉬이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닐 터.

뚜렷한 신념이 담긴 그 눈동자에 주호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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