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호북으로 간다고?”
“예, 그쪽에 볼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거 아쉬운 소리군. 섬서였으면 크게 대접해주었을 텐데.”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교관들의 집무실.
첫 학기의 종료일이 밝았다.
남은 업무를 끝낸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고, 담우양 역시 막혔던 경지에 올라서자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던 고향에 얼굴을 비추고자 하였다.
그간 주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예정이 없다면 자신과 동행하자고 권유해왔지만, 선약이 있다는 소리에 아쉬움을 흘렸다.
“나는 학기가 시작되기 보름 전에 이곳으로 돌아올 예정인데, 자네는 어떻게 되나?”
“저는 아마 며칠 전이되어야 돌아올 것 같습니다.”
담우양의 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사신문의 일 이후에 남궁세가로부터의 초대도 있지 않았던가.
상당히 바쁘고 긴 여정이 될 것 같은 기분에 벌써 피곤해진 듯했다.
“그간 몸 성히 지내게.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하지.”
그런 주호에게 담우양은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교관들 역시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런 조금 늦었군.’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진 탓에 가족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조금 지나버렸다.
그렇기에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미리 정리해둔 짐을 챙기고 학관의 입구를 나갈 찰나, 그 앞에서 서 있던 익숙한 얼굴에 발걸음을 멈췄다.
“교관님.”
“…천후?”
벽에 기대서 있던 것이 명백히 자신을 기다리던 모양새였다.
무슨 용무냐는 듯 시선을 보내자 천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가족분들은 예정된 대로 스승님께서 모셨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우희가? 예정대로라고?”
느닷없는 이야기에 주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에 천후 역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스승님께서 서로 간에 약조된 것이라 했습니다만, 제가 잘 못 알고 있는 겁니까?”
“…빨리 가지.”
주호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재촉했다.
천우희와 이야기가 된 것은 가족의 의사를 물은 뒤, 호북에 있는 사신문으로 떠날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이곳에서 충분히 여독을 풀고 관광을 즐긴 후에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는 서로 정한 것과 달리 먼저 접촉한 것인가.
‘혹시라도.’
주호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좋지 않은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손가락 하나라도 댄다면…….’
만약 가족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사신문이고 사신수고 모두 없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더욱이 서로의 관계는 이제 끝날 터.
“…….”
천후는 그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발걸음을 빨리했고, 종래엔 거의 뛰어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윽고 목적지인 객잔으로 도착했다.
천후보다 먼저 주호가 막, 그곳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찰나.
“크하하하하하하!”
술에 취해 벌건 얼굴로 대소를 터트리고 있던 제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녀석이 어디서 이런 참한 아가씨를 데려왔을꼬. 이럴 게 아니네, 당장이라도 혼인을 올려야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아이를 묶어 놓을 수 있겠지.”
“어머, 이이도 참.”
전세를 낸 듯 텅 빈 객잔 가운데 주가장의 사람들만 자리하고 있었다.
술판이 벌어진 지 시간이 꽤 흐른 듯 이미 탁자 위엔 몇 개의 빈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다.
호위를 서는 무사들을 비롯해 주씨 일가 대부분 취기가 잔뜩 올라 흥겨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천 소저의 의향은 어떠한가.”
“저는, 그것이 아버님의 의향이라면.”
그리고 그 가운데, 평소와는 달리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아 입을 가리며 호호 웃는 천우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후…….”
주호는 자신의 등 뒤로 따라 들어온 천후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긴 한숨을 내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주호 역시 허탈한 표정을 지었고, 인기척을 내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제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던 주산이 그의 등장을 눈치채곤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형님!”
흥겨운 술기운에 올라있던 장내 사이로 침묵이 내리 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문가로 쏠렸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주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큼.”
주한진은 헛기침만 내뱉었다.
술기운이 올라 반가운 마음이 앞섰지만, 멀쩡히 장성한 아들의 모습을 눈앞에 두자 하고 싶었던 말이 모두 쏙 들어간 듯했다.
그렇기에 그저 머쓱한 얼굴로 입맛만 다셨을 뿐.
오랜만에 재회하는 자리이건만, 대체 무슨 태도를 보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옆쪽에서 짧게 한숨을 쉰 적가혜가 그런 그에게 모범을 보이듯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주호에게 향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어머니.”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주호를 안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주한진보다 더 속앓이한 것이 바로 적가혜였다.
“…….”
주호는 자신을 안은 어머니의 두 팔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기에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신도 어머니의 등 뒤에 손을 둘러 그저 품에 안았을 뿐이었다.
“몸 성히 있어서 다행이다.”
주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적가혜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주가장의 다른 사람들 역시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으로 모자의 감격스러운 상봉을 지켜보았다.
“큼.”
주한진 역시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큰 소리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곤 제 아내처럼 아들에게 다가가긴 했지만, 쭈뼛거리는 것을 보아 한세월이 지나도 도착하지 못할 듯싶었다.
“그…….”
“오래간만의 재회인데 소싯적의 연애할 때처럼 쭈뼛거리지 말고, 한 번 안아주시지요.”
그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적가혜가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주한진은 어찌할 바를 하지 못한 채 얼어붙었고, 주호 역시 두 눈이 방황하며 시선을 둘 곳을 찾아 헤맸다.
“후.”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던가.
억척스러운 손길로 수줍어하는 두 사내의 손을 이끌어 서로의 몸을 감싸도록 했다.
온몸이 간지러워질 정도로 어색한 모양새. 잠시간의 포옹이 끝나자 매무새를 정리한 주호는 제자리에 엎드려 양친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간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괜찮다, 호야. 건강히 돌아왔으면 되지 않느냐.”
적가혜는 방긋 웃으며 제 아들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주한진 역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우물거렸으나, 옆구리를 푹 찔러오는 아내의 손길에 입맛을 다시곤 그 끝에서 툭 내뱉듯 퉁명스레 한마디를 던졌다.
“심려한 적 없다.”
주한진은 주호를 찾기 위해 정보 조직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가문의 돈에 손을 대진 않았지만, 그가 가진 개인 재산의 절반이 넘는 금액이 아니던가.
이미 동생인 주산에게서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 소녀는 보이지 않으신 건가요!”
극적인 부자의 상봉이 끝난 후,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었다 느낀 주예향이 그들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몇 달 사이에 부쩍 키가 자랐지만, 여전히 앳된 티를 벗지 못한 모습이었다.
주호는 그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어찌 보지 못할 리가 있겠느냐? 천만금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바꾸지 않을 우리 주가장의 보물을.”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손길에도 불구하고 주예향은 웃음을 흘렸다.
그간 고난의 나날이었다.
부모님은 몸져눕고, 사방에선 자신들을 물어뜯으려는 승냥이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착하디착한 둘째 오라버니가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힘들었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주가장의 자리를 지켜주는 가신들에게도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차에 실종되었던 첫째 오라버니가 나타나 그 모든 갈등을 해결해주었으니, 어찌 아니 좋을 수가 있을까.
주씨 일가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밀린 회포를 풀었다.
간간이 그 주위에 있던 무사들이 끼어들어 추임새를 놓았고, 웃음소리는 밤새도록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그 위층.
주씨 일가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안주 삼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사내가 있었다.
“…….”
창밖을 바라보는 천후의 표정은 아련하기 짝이 없었다.
‘가족이 있다면 저런 것일까.’
천애 고아인 그에게 부모가 있을 턱이 없었다.
설령 있었더라도 까마득한 과거의 기억. 기억조차 나지 않았기에 씁쓸한 마음만 감돌았다.
턱.
그런 그의 머리 위로 작은 손이 올려졌다.
“안아줄까?”
“…애도 아니고, 됐습니다.”
툭 던져진 스승의 농에 천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족이 원한다면 만들면 된다. 너는 아직 앞날이 창창하지 않으냐.”
“그런 스승님께서는 어떠신지요. 마침 좋은 배필도 근처에 있지 않습니까.”
천후는 지금이 기회지 않냐는 듯 슬쩍 주호를 지칭하며 스승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 말에 천우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 역시 천후와 마찬가지로 천애 고아였다.
부모는커녕 한 명의 가족도 없이 사신문의 무인에게 거두어졌고,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왔다.
“그래, 만들면 되는 것이지.”
그럴 시간이 남아 있으면 좋겠다, 천우희는 가까스로 뒷말을 삼켰다.
***
주씨 일가가 하남에 당도한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밀린 해후를 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남에서 유명한 관광지란 관광지는 전부 둘러보았고, 숙소 역시 천우희의 배려 덕분에 몸 편히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째의 밤.
모두가 여독에 지쳐 곯아떨어진 사이, 주호는 제 아비와 단둘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는 내일 돌아간다.”
“예? 더 머무르지 않으시고…….”
갑작스럽게 나온 말에 주호는 섭섭함을 표했다.
몇 년 만에 만난 그들이지 않은가. 돈과 시간은 충분했기에 조금만 더 이곳에 함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주한진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간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두었어. 요 몇 달간 대충 수습했다고 하긴 했는데,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주호는 아비의 비워진 술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
주한진은 잠시간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것이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한참의 침묵 이후, 그는 이내 무언가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산이에게 들었다. 가문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고.”
“…….”
만나게 된다면 언젠가는 나누게 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주제가 입 밖으로 나오자 주호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혈기에 취해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들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왔다.
그런데도 아직 장자의 위치를 생각해주는 아버지의 모습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장자의 책임은 알고 있습니다. 막중하지요. 하지만 몇 달 전에 가문으로 돌아오니 알겠더군요. 저보다 산이가 그 자리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아버지도 알고 계시지 않냐는 뜻으로 시선을 보내자니 주한진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제 어밀 닮아 똘똘하긴 하지. 하지만 성격이 너무 유해. 사내 녀석이라면 적어도…….”
말을 이어나가다 말고 멈칫했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은 주호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말을 이었다.
“적어도 제 꿈을 이루기 위해 대문을 박차고 나갈 정도는 되어야 한다, 뭐 이겁니까.”
“큼.”
속내를 찔린 주한진이 콧등을 찌푸리자 주호는 한층 진지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강호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 아비도 듣는 귀가 있다.”
“그러니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규모의 확장이 아니라 가진 것의 보신입니다.”
모난 돌은 정을 맞기 십상이지 않냐는 말에 주한진은 고개를 들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지.”
“그것은 역경을 헤쳐나갈 힘이 있을 때나 통하는 말입니다. 제가 없었더라면 주가장은 혈사문이라는 역경에 꺾이고 말았겠죠.”
“음…….”
혈사문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닫았다.
가문 일을 등한시하다 앓아눕게 된 원인이 바로 눈앞의 자식이었지만, 맞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주호가 없었더라면 혈사문의 핍박에 사태가 어찌 됐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모르긴 몰라도 필시 그 끝이 좋지는 않았을 터.
“뭐, 그냥 찔러본 말이었다. 애초에 산이 그 녀석을 후계로 점찍어 두었지. 네가 한다고 했어도 내가 거부했을 것이다.”
전혀 그런 기색이 아니었지만, 주한진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주호는 작게 웃으며 제 아비를 바라보았다.
어릴 땐 그렇게도 커 보였던 그가 지금은 자신과 이렇게 시선을 맞추고 있다.
무림 맹주나 정천학관주와 대면했을 때와는 다른 감정이 가슴 속에 피어올랐다.
“산이 그 아이는 잘해낼 겁니다. 아버지가 없어도, 제가 없어도 홀로 가문을 지켜냈습니다. 혈사문을 상대로 쉬이 넘어가지 않은 것도 강단이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주호는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술잔이나 젓가락이 들리지 않은 빈손.
주한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파아앗-.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히는 선명한 푸른 불꽃이 그 위에 피어올랐다.
“…….”
주한진은 놀란 표정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무공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절대 평범한 경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주가장이 어디에 핍박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강한 힘이 담겨 있는 목소리는,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