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정오가 가까워진 시각.
두 대의 마차가 하남 근교를 달리고 있었다.
그중 뒤쪽에 자리한 마차의 창이 슬쩍 열리더니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여기가 하남인가요?”
“향아, 위험하단다.”
밖을 내다보는 동생의 행동에 주사는 난감한 얼굴로 타일렀다.
그들은 주씨 일가였다.
첫 번째 마차에는 주가장의 장주인 주한진과 그 부인인 적가혜가, 그리고 두 번째 마차에는 둘째 주산과 막내인 주예향이 자리했다.
말에 단 채 마차 주위를 호위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주가장의 무사들이었다.
주씨 일가 전체가 장원을 벗어나 외부로 나온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 때문에 주한진은 장에서 제일가는 정예로 호위대를 꾸렸고, 산동에서부터 무사히 하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점심은 도시에서 먹을 수 있겠네요.”
그간의 여정에 지쳤다는 듯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녀석, 마차로 이동하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어떻게 강호로 나가겠다는 것이냐.”
“피곤해하는 게 아니라 지루한 겁니다, 오라버니. 저도 나름대로 단련은 하고 있다고요.”
그러면서 허공에 홀로 익힌 무공을 선보였고, 그 기세가 사뭇 날카로운 것을 본 주산은 감탄을 흘렸다.
“제법이구나. 그보다 그 결심에는 변함이 없느냐?”
주예향은 일찍이 첫째 오라버니인 주호처럼 강호에 출도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약관이 되는 내년, 곧바로 정천학관에 입관 시험을 치르러 갈 생각이었다.
이번 강호행은 그것을 위한 초석.
우연하게도 주호가 학관의 교관직을 맡게 되면서 그 계획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학관에 들어가면 첫째 오라버니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죠? 오라버니도 보셨잖아요. 그때, 혈사문의 무인들을 순식간에 해치워버리는 무공을.”
“그렇지, 못 본 사이에 형님은 대단한 고수가 되신 것 같구나.”
주호의 무위는 한동안 주가장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지금은 완전 박살이 났지만, 혈사문은 요 몇 년간 주변에서 세를 떨치던 문파가 아니었던가.
주호는 단신의 힘으로 그것을 전부 정리했다.
일류 고수인 혈사문주를 단숨에 쳐죽이고, 홀로 혈사문에 쳐들어가 남은 문도들까지 전부 휩쓸었으니.
주가장의 사람들은 주호가 대체 얼마나 강한 것인지에 대해 갑론을박을 다투기까지 했다.
주산 역시 그 이야기를 흥미 깊게 지켜본 바가 있었다.
그 자신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에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적어도 주호가 범상치 않은 실력을 지녔다는 것은 확실했다.
“뭐, 그에 관한 이야기는 형님과 만나면 자세히 해보자꾸나.”
“빨리 뵈었으면 좋겠어요!”
하남에 입성한 주씨 일가는 곧 식사를 위해 도시 외곽에 자리 잡았다.
이런 도시는 중심지로 갈수록 물가가 비싸졌다.
물론, 주가장은 돈이 궁하지 않았으나 쓸데없는 지출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한진의 판단이었다.
“와!”
하지만 하남 시가지의 풍경만으로도 주예향의 시선을 끌 만했다.
주가장이 위치한 곳은 산동에서도 비교적 구석진 위치. 번화가에 가자면 이곳과 비교해 부족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다른 도시에서 받는 신선한 느낌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녀석, 그리 좋으냐.”
주산에겐 어차피 다 같은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행여나 동생이 엎어져 다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뒤를 바라보며 굳은 얼굴로 입을 여는 인영이 있었다.
“멀리 나가지 말도록 하여라. 움직일 때는 필히 장의 무사와 동행하도록 하고.”
주가장의 장주 주한진.
그를 묘사하자면 바위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상계 가문의 출신인 것과는 다르게 강골의 소유자로, 커다란 풍채에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무림인이라 착각할 수 있었고, 인상이라도 쓴다면 위압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당신, 표정 좀 풀어요. 오랜만의 나들이인데.”
그런 주한진 옆에서 핀잔을 주는 온화한 기품의 여성은 주가장의 안사람인 적가혜였다.
독불장군이자 다혈질의 성격인 주한진에게 무어라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남편과 같이 상계에 능통해 장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총관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했다.
“큼, 누가 인상을 쓴다고 그러시오.”
“이이도 참. 옆에서 보면 산적이 따로 없다니까요.”
“사, 산적.”
주한진은 상당한 애처가였다.
그렇기에 자신보고 산적 같다는 그 말에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을 찰나, 옆에서 숨죽여 웃고 있던 무사들을 발견하곤 두 눈을 부라렸다.
“……!”
장주의 눈빛이 살벌해진 것을 눈치챈 무사들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몇 년 만에 보는 아들인데, 밝은 얼굴로 가야죠.”
“큼.”
그 말에 주한진은 불편해진 심정을 대변하듯 콧김을 내뿜었다.
주호가 아버지와의 만남을 불편해했던 것같이 주한진 역시 아들과의 재회가 못내 불편했다.
어릴 적부터 강호를 동경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셈법보단 산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하고, 제 홀로 나무를 깎아다가 목검을 만들어 수련하는 것을 종종 보아왔으니까.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차라리 무가에서 태어났다면 무인으로서 소성(小成)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주가장은 엄연한 상계 가문.
가전 무공이라고 해봤자 삼류를 겨우 면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주호가 출가를 선언하며 뛰쳐나갔을 때는 심장이 덜컥 내리 앉는 듯했다.
백방으로 사람을 써서 그 뒤를 조사했다.
파락호 무리에 들어갔을 때도, 흑도에서 구를 때도 그 소식을 전해 들으며 혹여나 칼침을 맞고 다니지 않을까 매일 노심초사했다.
주한진 본인은 상인이었지만,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강호가 얼마나 험한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당장이라도 돌아오라 하고 싶었으나, 그런다고 해서 고집불통인 아들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부인인 적가혜가 이르길 어렸을 적부터 제 앞가림을 척척 해나가던 똑 부러진 아이니 믿고 맡기자는 말에도 매번 불안함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던 차, 주호가 무림맹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림맹이 어떤 곳인가.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보통의 문파와 세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곳이 아닌가.
제 아들이 그런 곳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주한진은 크게 기뻐했다.
오죽하면 근방의 사람들을 모아 성대하게 잔치를 열었을 정도였으니.
제 아들이 무림맹의 무사가 되었노라 동네방네 자랑을 했고, 더는 마음 썩힐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어느 간 큰 놈들이 무림맹의 무사를 건드리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터무니없는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그리 오래가 지나지 않아서였다.
무황의 비동.
고금제일인이니 천하제일인이니 하는 절세고수의 무덤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전 무림을 강타했다.
주한진은 무인이 아니었지만, 그런 정도의 소문은 곧 어떤 식으로 강호 정세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문을 정비하며 예의주시하고 있을 찰나, 아들인 주호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이후 주한진은 닥치는 대로 정보 조직을 들쑤셨다.
정보로는 천하제일을 다투는 하오문과 통이문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아들의 행적을 조사했고, 곧 무황의 비동에서 일어난 혈사에 연루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삼 년, 무려 삼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주호가 비동에 나와 본가에 돌아왔을 때, 그가 와병 중이었던 것도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동분서주하다 몸 져 드러누운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니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제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언제까지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주가장의 식솔들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핏덩이들이 있었다.
기울어가던 가세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가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찰나, 그는 주호가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주한진은 당장이라도 돌아가 주호를 직접 살피며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쇠약해진 몸을 돌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삼 년 만에 돌아온 아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제 부모의 얼굴도 보지 않고 다시 하남으로 향했다는 서신의 내용이 그리 야속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이 어딘가.
그렇게 석 달이 지난 지금, 모든 채비를 마친 끝에 이렇게 하남에 입성한 것이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아직 남았으니까.”
도시 외곽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시간대라 그런지 객잔은 사람들로 꽉 찼기에, 주한진은 웃돈을 주고 위층에서 제 식솔들과 편히 식사하고자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들이 차례차례 올라왔다.
다들 긴 여정으로 허기가 진 상태이기에 막 식사를 들 찰나, 이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위로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한진을 비롯한 주가장 사람들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들처럼 따로 자리를 얻은 이들로 생각할 뿐, 식사에 열중했다.
하지만 곧 모습을 드러낸 인영에 두 눈을 크게 뜨며 이목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왜 그러느냐?”
“저기 보세요.”
창을 통해 거리의 모습을 구경하며 식사하던 주산은 자신의 소매를 잡아 오는 동생의 행동에 고개를 돌렸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다른 주가장의 무인들 역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주산은 그 직후, 그녀의 등에 매인 커다란 도를 발견했다.
‘무림인?’
여유로운 발걸음이며, 풍기는 기세하며 범상치 않은 내력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그는 황급히 소리가 날 정도로 젓가락을 내려놓았고, 그에 무인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그녀의 발걸음 소리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종착역은 주한진의 앞이었다.
“주한진 대협, 맞으십니까?”
여인은 가벼운 포권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말해왔다.
설마 자신에게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기에 주한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그녀의 포권을 받았다.
“본인의 이름이 주한진 임은 틀림없소만, 대협이라 칭할 만한 사람은 아니오. 그건 그렇고 그쪽은……?”
주호를 제외하고 기별을 넣은 곳이 없었기에 자신들을 찾아올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주한진의 얼굴이 살짝 경직된 것을 본 주가장의 무사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슬며시 제 검에 손을 가져갔다.
여차하는 순간 바로 장주를 비롯해 일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설 찰나, 여인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주 소협의 부탁을 받아 모시러 왔습니다. 그이는 아직 학관의 업무가 남아서 조금 늦는다고 하네요.”
주 소협, 학관.
그 두 단어를 들은 주한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혹시 호, 그 아이를 일컫는 것이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은 질문이었다.
그러자 천우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막 식사를 시작하신 것 같아 죄송하지만, 자리를 옮겨도 될까요? 주 소협이 양친을 잘 부탁한다며 신신당부를 해서.”
더 좋은 곳에 예약해놓았다는 그녀의 말에 모두가 주한진을 바라보았다.
“흠…….”
그는 잠시 동안 침음성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이내 근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이것부터 말해주겠소?”
“편히 말씀하시지요.”
“아들과는 무슨 사이오?”
천우희는 사뭇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양 볼을 붉혔다.
그 자태가 마치 흐드러지듯 피어나는 꽃과 같아 주위에 있던 사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사내와 여인의 관계를 단순히 말로 표현하기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보는 이의 마음이 다 떨릴 정도로 수줍은 그 태도에 주한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으로 충분히 되었소. 자, 가도록 하지.”
주한진의 말에 모두가 짐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우희는 싱긋 미소를 짓는 것으로 그들을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