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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귀환-44화 (44/300)

#44화

“사신문에 초대하고 싶은데.”

천우희는 가끔 주호에게 권유해 깊은 밤까지 술잔을 나누곤 했다.

서로 하는 이야기라곤 각자 살아온 인생에 관한 시시껄렁한 것들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성격의 주제를 꺼냈다.

“…….”

하지만 이미 술에 가득 취한 주호는 별 반응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 담담한 태도에 천우희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 달이면 학기가 끝나지? 그 이후에 어때?”

“다음 달이라.”

머리끝까지 차오른 취기에 고개를 한 번 흔든 주호는 곰곰이 일정을 살폈다.

그러던 중 가문에서 온 서신을 떠올리곤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본가에서 가족들이 올라온다고 했다. 당장은 무리일 것 같은데. 더군다나 동생과 한 약조가 있다.”

본가를 떠나기 직전, 동생인 주예향에게 강호 구경을 시켜준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정천학관에 자리 잡은 뒤로 자주 오가는 서신에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어, 결국 생일 선물로 허락의 뜻을 보냈다.

원래라면 학관의 한 학기가 끝나고 휴식기에 들어갈 때, 직접 본가로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시점에 맞춰 온 가족이 하남으로 올라온다고 하지 않는가.

“끄응.”

부모님에 생각이 미치자 주호는 속이 쓰려왔다.

사실 본가에 돌아왔을 때, 두 분께서 자리를 비웠다는 말에 살짝 안심했던 그였다.

어릴 적부터 이어진 마찰 끝에 가출하듯 뛰쳐나오지 않았는가.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었기에 어떤 얼굴로 다시 마주해야 할지 고민이 있었지만, 다행히 잠깐의 유예가 생겼었다.

하지만 이번엔 부모님과 두 동생이 모두 손을 잡고 하남으로 올라온다고까지 했으니.

“호오.”

가족 모두가 하남으로 올라온다는 말에 천우희는 눈을 빛냈다.

그러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그 약조가 분명 강호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이야기였지?”

“그렇다.”

“그러면 같이 사신문으로 가는 것은 어떨까?”

“…같이 가자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주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것에 천우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사신문은 그리 빡빡한 곳이 아니야. 가족 두세 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들여보낼 수 있어. 원한다면 무공도 가르쳐주고.”

문파가 아니라 작은 도시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말에 주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정도 규모일 줄은 몰랐군.”

“물론 미리 보고는 해야 하지만 말이야.”

“흠…….”

주호는 제 동생인 주예향을 생각했다.

자신의 어릴 적과 마찬가지로 강호를 동경하는 모양새였다. 그렇다고 피 튀기는 전장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당히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관광이나 하려던 찰나, 사신문의 권유는 제법 흥미가 동하는 이야기였다.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지만…….’

걸리는 것은 사신문의 존재.

정말로 신용할 수 있는 곳인지는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일단 그쪽에 이야기만 부탁하지. 결정은 가족의 의사를 따라야 하니.”

“맡겨둬.”

***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

주호는 강의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그는 교관들의 집무실에서 밀린 보고서와 잡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집무실의 문이 조금 열리며 익숙한 인영이 그곳에 발을 내디뎠다.

“주 교관님,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남궁연의 등장에 사내들만 자리해 어두컴컴하고 칙칙했던 집무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하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보고서를 적어나가던 한 교관은 붓을 툭 떨어뜨리며 멍한 표정을 지었고, 한 교관은 그녀가 누구를 찾아온 것인지 가늘어진 눈으로 내부를 살폈다.

“…….”

머지않아 내부의 시선이 모두 주호에 향했지만, 그는 그런 것들을 가벼이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아하기는 주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제외하면 이때껏 개인적인 용무로 찾아온 적은 없지 않은가.

“무슨 일이지?”

“잠시 독대하고 싶어요. 시간이 되신다면 좋겠네요.”

집무실에 맴도는 묘한 분위기에도 남궁연은 아랑곳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주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들에게 잠시 이야기 좀 하고 오겠다며 말하곤, 그녀의 뒤를 따라나갔다.

‘혹, 남자의 문제 때문인가.’

검화의 철벽은 학관 내에서도 유명했다.

한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녀에게 연심을 고백했다가 차인 사내가 부지기수라 했으니.

그 중엔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의 유명한 후기지수도 있었으며, 이름 높은 고수의 제자로 알려진 후계자도 있었다.

하지만 무공이 강하든 약하든, 돈이 많든 적든 그녀는 그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거절의 의사를 내뱉었다.

옆에서 지켜본단 주호가 질릴 정도였으니, 그녀에게 가중되는 부담은 상당한 것일 터.

다행인 점은 남궁연이 남궁세가의 직계라는 것이었다.

삼 년 전 비동에서 후계자를 잃은 사건으로 조금 흔들거리긴 했으나, 남궁세가라 함은 천하제일세가로 칭송받는 곳.

감히 그곳의 금지옥엽을 함부로 건드릴 간 큰 위인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오늘 그 얼굴을 보니 필시 문제가 생긴 듯싶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집무실 옆에 있던 응접실로 자리한 둘은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남궁연은 살짝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주호가 말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녀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게, 저희 아버님께서 교관님을 세가로 초대하고 싶다고 하시는 바람에…….”

“…뭐?”

인생은 갑작스러운 일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과는 전혀 다른 주제에 주호가 잠시 입을 다물었을 찰나, 남궁연은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심려를 끼치게 되어 죄송해요.”

“정말로 그렇군.”

“저도 아버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이리된 것은 자신의 의사가 아니었다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전에 안휘에서 있었던 일로 아버님께서 교관님께 큰 관심을 보이셨거든요.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한테는 은인을 데려와서 대접하지 못할망정 그대로 보냈냐고 질책까지 하셨어요.”

“…그런가.”

당시 주호는 고향 생각에 다른 번잡한 것들을 눈에 담을 여유가 없었다.

그런 자신 때문에 질책까지 들었다는 말에 죄책감은 아니지만, 살짝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가 여기에 와서 교관님이 계시다고 연락하니 학기가 끝나면 한번 모셔오라고 말씀하셨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초대에 응해주시면 좋겠는데…….”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보는 남궁연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살짝 붉어져 있었다.

주호는 그런 남궁연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학기가 끝난 이후에는 선약이 있었다.

가족들이 산동에서 이곳으로 올라오고, 또 사신문의 건도 있으니.

하지만 남궁연의 말은 마냥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검제(劍帝) 남궁찬.

남궁세가의 당대 가주로 천하제일세라 불리기까지의 가세를 일으킨 입지적인 인물.

검을 든 자로서 검제라고 칭송받는 고수와 마주할 기회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으니.

“학기가 끝나고 선약이 있다. 아마 한 달 정도는 걸릴 듯한데.”

“그러면 그 이후에 저와 같이 안휘로 가서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돌아오면 되겠네요.”

하지만 남궁연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정대로라면 그렇겠지.”

설마 중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정천학관의 교관도 모자라 남궁세가와 인연을 트게 된다니.

“그러면 한 달 뒤쯤으로 생각하고 있을게요.”

“…그러지.”

그 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

정천학관은 전반기에 석 달, 후반기에는 넉 달로 나뉘어 운영했다.

오늘로 벌써 학기가 시작된 지 석 달 차.

즉, 학기의 마지막 날이었다.

“흡!”

휴식기에 들어가기 직전, 모든 걸 쏟아내려 하는 것인지 주호의 강의를 수강하는 관생들은 이를 악물어가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모두가 학기 초보다 월등해진 무위를 보였다.

질풍처럼 날쌘 선우연을 시작으로 당천유와 악비산이 각자 화려한 무공을 펼치며 짓쳐 들었다.

철대환과 남궁연이 그 뒤를 따랐고, 관생 중 제일 강한 위천강과 천후가 그 뒤를 장식했다.

마지막 날인 만큼 각자의 성취를 평가받는 날이었다.

시험 방식은 간단했다.

이때까지와 같이 일곱 명이 동시에 주호를 상대하는 것.

익숙함에 속아 고단함을 잊는다고 했던가. 평소 해왔던 것과 다를 바가 없기에 다들 자신만만했다.

성장한 자신들이라면 분명 뛰어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진심으로 공격해오라는 그 말에 관생들은 정말로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전력을 토해냈다.

뽑아든 검에는 검기가 넘실거리고, 찔러진 창끝은 주호의 심장을 꿰뚫을 듯했다.

떨어지는 시뻘건 도는 주호의 머리를 쪼갤 듯했으며, 내질러진 주먹은 집채만 한 바위라도 부술 거력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주호 앞에선 무력해졌다.

진심이란 말은 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는지 후조의 기세는 역시 지금까지와 차원이 달랐다.

절정의 벽을 뛰어넘은 그다.

아직 일류에서 기껏해야 초일류에 달하는 이들을 찜쪄먹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헉, 헉…….”

그들은 정말 잘 싸웠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냈고, 정면에서 부딪혔다.

하지만 고작 이각이 흐른 후, 누구 예외 할 것 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거친 숨만 들이 내쉬게 됐을 뿐이었다.

탁탁.

검을 거둔 주호만이 연무장 한가운데 서서 먼지 묻은 손을 털어냈다.

“훌륭하다. 모두 합격이다.”

“…….”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주호의 말에 모두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

시험에서 합격했음에도 누구 하나 기뻐 보이는 표정을 짓는 이들이 없자, 주호는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그것을 읽은 선우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처참하게 깨지고 합격이란 소리를 들어봤자 기쁠 수가 있겠습니까.”

“음…….”

그 말에 주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학기를 마무리하는 시험이라 나름대로 작심하고 손을 썼다.

그래도 어느 정도 여유를 두긴 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낙심하는 모습을 보일 줄 몰랐기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른 교관님들은 마지막이라고 관생들과 식사라도 한다던데.”

그때, 위천강이 툭하고 내뱉듯 말했다.

다른 이들 역시 그것에 동조하듯 침묵을 지키며 시선을 모아왔다.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자신을 바라봐오는 일곱 쌍의 눈동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가.”

애초에 남을 가르치는 일은 처음이었다.

말로 설명하면 의미가 퇴색될까 싶어 실전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으니.

힘든 와중에 누구 하나 불평 부리거나 탈락하는 일 없이 무사히 강의를 끝마쳤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식사뿐이겠나. 술 정도는 마셔야지.”

오늘 하루는 자신이 전부 사겠다며 호언장담을 하자 관생들 사이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주호는 그런 이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몇 달 치 월봉에 달하는 금액에 달하는 술을 먹어 치우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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