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43화 (43/300)

#43화

“…음?”

깊은 밤.

자신의 관저에 앉아 홀로 서찰을 들여다보고 있던 설우진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잠깐이나마 저 멀리에서 자신을 자극하는 무언가를 느꼈다.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을 열자 선선한 밤공기가 들어온다. 고개를 내밀어 밖을 바라보았음에도 다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한 연무장에 있던 주호는 떨리는 호흡을 감추지 못한 채 깊은숨을 들이 내쉬었다.

‘이건…….’

담우양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했던 대련이 오히려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간 많은 심득을 얻긴 했다.

학관에 들어온 뒤로 여러 인사와 대련을 나눴고, 설우진에 이르러선 가벼운 심득을 전해 받기까지 했으니.

‘결정적인 것은 궁기와의 싸움인가.’

목숨이 위태로운 실전을 겪으며, 큰 과정을 하나 지나왔다고 생각했다.

어제 깨어난 직후 상태창을 확인한 후에도 많이 놀랐다.

갑작스럽게 경지가 몇 단계 이상 상승해있을뿐더러 전에 없던 기능이 몇 개가 더 추가되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이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영향을 끼치리라곤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그렇기에 여념 없이 그것을 흡수하는데 정신이 없었고, 곧 다시 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진 뒤였다.

“…….”

고개를 드니 담우양 역시 여전히 그 앞에 서서 새로 올라온 경지의 여운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대충 자신의 상태를 살핀 주호는 굳어 있던 몸을 풀고 앞으로 걸어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담 형.”

“…어어, 아?”

순식간에 깨져버린 집중에 담우양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새어 나왔다.

깨달음의 순간은 그야말로 마약을 사용했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주호는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만끽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었다.

“기분은 알겠지만, 한 번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정리하는 것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차분히 곱씹어도 늦지 않았다.

오히려 성급하게 이 자리에서 전부 취해버린다면 당장 성취감을 더 맛볼 수 있겠으나, 상승경지를 향한 감각은 희미해져 버릴 터.

“…그런가.”

곧 감정을 추스른 채 담담히 내뱉어진 대답에 주호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담우양은 더 없는 호인(好人)이었다.

만약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왜 방해한 것이냐고 불평을 내뱉었을 터.

하지만 담우양은 잠깐의 아쉬움만 보였을 뿐 그러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지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담 형.”

주호는 담담히 축하의 말을 전했다.

이제 막, 일류를 벗어난 경지지만, 몇 해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던 그에겐 더없이 기쁜 일 일터.

곧 자신의 상황을 깨달은 담우양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주호의 손을 맞잡았다.

“다 자네 덕분일세! 자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간의 설움이 담우양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과분한 별호에 비해 부족한 경지가 못내 마음에 걸렸던 그다.

동년배들은 대부분 벽을 넘어서서 그 위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자신은 언제까지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남에게 도움을 구하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었으니.

하지만 그것도 모두 옛말이 되었다.

아직 초입에 불과하나, 가로막은 벽을 뛰어넘은 이상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충만한 자신감이 그의 마음속에서 샘솟았다.

“그런 자네도 무언가 있는 듯한데.”

담우양은 은근한 눈길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벽을 뛰어넘었을 때, 주호의 몸에서 일어난 공명을 느낀 것이었다.

벽에 가로막혀 있었더라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아주 작디작을 것이었다.

그것에 주호 역시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작은 깨달음을 얻어서 말입니다.”

“좋은 일을 하니 복을 받은 걸세.

마음 같아선 술이라도 진탕 퍼붓고 싶지만…….”

담우양은 아쉬운 눈치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호 역시 기쁘기는 매한가지였다. 비동에서부터 가로막혀 있던 경지를 단숨에 깨부술 수 있게 된 것이니.

하지만 날이 너무 늦었다.

남은 시간이라고 해봐야 고작 몇 시진 정도.

잠잘 시간 따위는 없었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 만큼 몸을 적응시켜놓아야 했기에 아마 밤새 검을 휘둘러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축하연은 연무장에서 수련으로 대신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군.”

주호의 말에 담우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도 어차피 이대로 쭉 수련하려 했다.

하룻밤 정도 잠을 자지 않는 것은 그렇게 큰 지장은 아니었으니.

그렇게 둘의 검무는 동이 틀 때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

다음날.

실전의 이해 강의 중, 주호는 관생들에게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할 것을 이야기했다.

“오늘은 평소처럼 일대일 방식이 아니라, 첫 강의 때처럼 모두 합공하는 것으로 해보지.”

“합공 말입니까?”

오늘도 만신창이가 될 것을 단단히 각오하고 나온 이들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깃들어서 강의 방식을 달리한단 말인가.

“그래. 다만, 전과 달리 막무가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의할 시간을 주겠다. 이 각 뒤에 다시 올 터이니 그동안 어떻게 싸울 것인지 정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주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지만, 관생들은 이제 녹록지 않았다.

순식간에 연무장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어떻게 할 것인지 서로 치열하게 논의했다.

“……?”

그 가운데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주호의 뒷모습을 흘깃거리는 이가 한 명 있었다.

‘무언가 바뀌었는데.’

위천강은 알 수 없는 기시감에 휩싸여 있었다.

어제는 없고, 오늘은 있는 무언가의 변화.

말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목 언저리 끝에서 턱하고 막힌 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네, 뭘 그리 생각하는가?”

그 옆에 있던 선우연이 의아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원래 견원지간이었던 둘은 주호의 밑에서 구르는 동안 묘한 우정이 싹텄다.

거기에 풍류 경험이 풍부한 위천강에 비해 선우연은 본문에서 수련만 열심이던 순수 무인이던바.

그것을 눈치챈 위천강이 그를 음주가무의 길로 끌어들여, 이제 와선 둘도 없는 죽마고우가 되었다.

그러던 와중, 위천강이 꼭 사랑에 빠진 듯한 멍한 얼굴로 주호가 나간 쪽을 바라보고 있자 무슨 일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 교관님이 무언가 바뀐 것 같지 않나?”

“바뀌었다고? 글쎄, 무복을 갈아입으셨나?”

“머리를 조금 자른 것 같기도 한데.”

가볍게 답하는 선우연의 옆으로 악비산이 끼어들어 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천강은 그런 그들을 한심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래, 너희가 무엇을 알겠냐마는.’

자신과 비교하자면 몇 수나 경지가 낮은 이들이었다.

무언가를 기대하기엔 턱없이 모자란바. 이런 이들이 화산의 소신룡이나, 명가라는 악가의 후기지수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위천강은 곧 자기들끼리 이렇다저렇다 떠드는 이들을 떠나 다른 쪽에 있던 천후를 바라보았다.

말이 없기로는 저 과묵한 철대환과 더불어 수위를 다투는 이가 아닌가.

다만, 강의에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토의 중 간간이 입을 열어 다른 사람들과 여러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네.”

“……?”

슬쩍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위천강이 운을 띄웠다.

남궁연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천후는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위천강은 곧 그의 귓가에 은근하게 속삭였다.

“교관님께서 무언가 바뀐 것 같지 않나?”

“교관님이?”

위천강은 내심 기대를 했다.

이곳에 자리한 이 중 자신과 비슷한 수준에 있는 사람은 천후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도대체 어떤 조직이기에 신교의 소교주와 비슷한 후기지수를 길러냈나 싶었다.

그렇기에 사람을 붙여 은밀히 조사해보았지만, 움직임의 제한이 있는 지금은 고작 신비 세력으로 추정한다는 답변밖에 받지 못했다.

신비 세력. 위천강의 관심을 끌기엔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그들을 신교로 끌어들인다면.’

신교는 큰 전력을 얻을 테고, 자신은 큰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교주가 되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조금은 잠잠해질 터.

“글쎄, 잘 모르겠군. 부상에서 회복하셨으니 원래 기세가 다시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나.”

“호오.”

제법 그럴듯한 말이 나왔다.

원래라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 자세한 것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스산한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궁연의 시선에 움찔하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야기는 그만하고 의견을 말해주시죠, 위공자.”

남궁연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것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실없는 소리나 하던 이들도 곧 시간이 다가오자 진지한 얼굴로 의견을 내놓았다.

주호와의 대련은 많은 것을 깨닫게 했지만, 쌓인 것 또한 많았다.

자신들이 악을 쓰며 공격을 퍼부어도 모두 예상했다는 가벼운 태도로 피하거나 막아내는 그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주호가 당황하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

그것이 그들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

이 각이 흐른 후.

주호는 연무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음?”

하지만 안쪽에서 보이는 인원의 숫자가 맞지 않았다.

본래라면 일곱 명이 있어야 했지만, 눈에 보이는 숫자는 둘이 전부.

그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주호는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몇 줄기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귀여운 짓을 하기는.’

대비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기습하는 것이리라.

비겁하다고 탓할 생각은 없다. 이것 또한 수련의 일환이었으니.

오히려 제법 머리를 썼다며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쐐애애액-!

왼쪽에선 선우연이, 오른쪽에선 철대환이 각자의 절기를 펼쳐왔다.

검과 주먹 위에 내력이 넘실거리는 것이 전심을 담은 공격인 듯했다.

“어설프다.”

하지만 주호는 그들의 각오가 무색해질 정도로 너무나도 가벼이 그것들을 피해냈다.

단지 한 걸음 크게 앞으로 내디딘 것으로 자신을 향한 공격들을 흘려보냈고, 또 무슨 수법을 써올지 흥미진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쏴사사사사사-!

그 뒤를 이은 것은 바로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수많은 암기였다.

사천당가의 무인은 독과 암기를 주로 연마한다. 하지만 당천유는 독을 등한시하고 암기술을 익히는 것을 택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암기술만으로도 사천당가의 무인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실력이라는 것이었다.

다만, 대련에서는 도망치듯 신법을 밟으며 마구잡이로 던지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지만.

‘어디 이것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당천유는 이 한 수에 자신의 내공을 몽땅 들이박았다.

아무리 주호라 할지라도 촌각의 시간은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파바바바바밧-!

하나하나 강력한 내공이 담긴 암기들이 바닥에 박혀 들었다.

어찌나 강맹한 위력인지 연무장 바닥이 크게 터져나갔고,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이때, 정면에 있었던 악비산과 남궁연이 주호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만천화우는 이미 주위를 휩쓸고 간 지 오래. 그렇기에 힘껏 앞으로 달려나가며 정면을 압박했고, 그 뒤로 위천강과 천후가 각자 검기를 피워 올리며 매섭게 허공을 갈라왔다.

‘제법.’

제법 잘 짜인 연계라 생각했다.

평범한 수준의 고수였다면 당천유의 만천화우에 꼬챙이가 된 채 앞과 뒤에서 닥쳐온 이들에게 온몸이 썰렸을 터.

하지만 아쉽게도 주호는 평범한 수준의 고수가 아니었다.

“그 노력에 화답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우웅.

시퍼런 불꽃이 그의 검에서 피어오른다. 처음 보는 주호의 검기에 그 정면에 있던 악비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싸움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제 기세를 드러낸 주호를 눈앞에 두니, 마치 끝없이 밀려오는 거센 파도와 마주한 것 같았다.

“피, 피해!”

자신은 창을 내지르면서도 악비산은 다른 이들에게 피하라며 큰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기호지세.

다들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러갈 뿐이었다.

“…….”

한 명도 물러나지 않은 가운데, 주호만이 미소를 지으며 검을 휘둘렀다.

청룡검법 일 초식

청룡잠운靑龍潛雲.

일곱 줄기의 검기가 주호를 향해 쇄도하던 일곱 명에 각각 한 줄기씩 들이닥쳤다.

후일, 그 앞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듣길 새된 비명만이 그곳에 울려 퍼졌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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