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헉헉…….”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때 시작된 대련은 거의 한나절 동안 이어졌다.
악비산을 처음으로 천후까지.
일곱 명의 인원이 쉬지 않고 주호와의 대련을 이어나갔다.
기어코 이 각을 끝까지 버텨낸 천후가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져 내렸을 때, 주호는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강의의 끝을 고했다.
“다들 수고했다. 내일부터는 다시 정상적으로 강의를 진행하는 것으로 하지.”
그 말에 연무장 바닥에 몸을 뉜 이들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지금도 끔찍한데 얼마나 더 굴릴 작정인가, 저 괴물은.”
주호가 떠나가고 난 뒤, 헐떡거리던 숨을 겨우 진정시킨 당천유가 거의 우는 것처럼 울먹거리며 말했다.
주호가 배려한 탓인지 외상은 없다. 하지만 전신을 난자하는 오싹한 살기와 죽음 직전에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서늘한 감각을 수도 없이 맛보았다.
더욱이 점차 그 상한선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매번 한계를 넘는 힘을 쥐어 짜내야 했고, 매일 스스로 놀라움이 들 정도의 성장을 갱신하는 중이었다.
모두 그것을 알기에 뒤에서는 불평불만을 내뱉지만, 정작 대련 때에는 더없이 진지하게 참여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주호와의 대련은 매일 같이 찾아오는 기연과도 같았다.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의 출신이라 하더라도 사문에서 역시 이러한 기회를 얻기 힘들지 않은가.
하지만 힘든 것은 힘든 것이었다.
“…어쩐지 나만 더 괴롭히는 것 같지 않나?”
선우연은 저릿한 팔을 부여잡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입관식 때에 벌였던 소동으로 앙금이 남아 있을 것이라며 투덜거렸지만, 그것을 귀담아듣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이들도 선우연과 별다를 바 없는 상태였으니.
“괴롭히는 거라면 저쪽이 제일 심하지 않나?”
과묵하기 짝이 없던 철대환이 연무장 한쪽에 누워 실신한 듯 쓰러져 있던 천후를 가리켰다.
“…….”
그 말에 다들 공감한 듯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 중 누가 제일 잘 싸우는지 콕 집어서 말하진 못하겠지만, 제일 치열하고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피 튀기는 싸움을 하는 것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견은 없었다.
“…하아.”
보이지 않는 손가락으로 지목을 당한 천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따라 손에 든 도가 그토록 무거울 수가 없었다.
천애 고아였던 그를 거둬준 것이 스승인 천우희였다.
그러던 차, 우연히 무공에 재능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그 밑에서 정식으로 무공을 사사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주작신공을 완성했다고 느꼈기에 강호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좀 더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치며 경험을 쌓기 위해 정천학관에 입관했지만, 결국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했을 따름이었다.
고작 여섯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주호에게 손가락 하나 쓰지도 못하는 꼴을 보아라.
그간 주작의 후계자라고 설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더더욱 괴로워졌다.
‘거기에…….’
천후는 원래 천우희를 어머니나 누나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정신이 성숙해졌고, 점점 그녀를 연모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주호가 스승을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괜스레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괜한 기우일 것이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괜한 기우가 절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십 년을 넘는 세월을 같이 보내온 자신에게조차 보여준 적이 없던 얼굴을, 그의 스승은 하고 있었다.
더욱이, 병상에 누워있는 주호의 옆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키며, 극진히 가호하는 그 모습에 천후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하긴, 그 얼굴에 무공까지 뛰어난데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지.’
애초에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스승이 행복하면 그것으로 된 것이리라.
세상에 여자는 많았으니, 언젠가 다른 인연이 닿으리라 생각하며 쓰디쓴 눈물을 삼켰다.
“저기.”
그때, 천후는 자신의 위로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스승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세상에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처음 그녀를 본 순간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궁연.’
새하얀 눈이 내리 앉은 것 같은 투명한 피부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그 매력적인 외모에 빠져들지 않은 남자는 없을 것이다. 일각에선 검화라고 부르며 칭송하는 것이 당연하여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오?”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절로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사랑, 그것은 어느 봄날에 시작된 이야기였다.
“걸리적거리니까 비켜줄래요?”
…물론, 그 시작은 아직 험난했다.
***
일류의 끝자락.
담우양은 중요한 분기점에 있었다.
섬서검협이란 별호로 불리고 있었지만, 지닌 실력에 비해 과분한 이름이라 생각했다.
주변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하루빨리 다음 경지를 밟고자 꾸준히 노력했다.
허나 어째서인지 그럴수록 제자리를 맴돌았고, 정체되었다는 기분이 강했다.
그렇기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자 고향인 섬서를 떠나 한동안 정처 없이 강호를 돌아보았다.
장장 이 년이란 시간 동안 바깥세상을 돌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
덕분에 보는 눈이 깊어지고 시야가 넓어졌지만, 아쉽게도 무공의 경지는 그대로였다.
슬슬 외부 생활도 지쳤고, 고향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던 도중 정천학관에서 새로이 교관을 뽑는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담우양은 뭔가에 이끌린 듯 정천학관으로 향했다.
필시 운명일 것이리라.
남을 가르쳐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교관 일은 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다.
더욱이 좋은 동료들, 그리고 좋은 제자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싶었다.
특히, 한 사람으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던 그의 눈은 완전히 달라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하면……!’
주호가 검을 잡고 휘두르는 모습은 어느 순간을 보아도 충격 그 자체였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경지가 그곳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것에 도달하고자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평생을 수련해온 검로가 허공에 흘렀고, 몇천 번, 아니 몇만 번을 휘둘러 온 초식이 검 끝에서 피어났다.
하지만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이 부족한지 그는 알지 못했다.
딱 한끝의 차이.
그 간격에서 오는 갈증을 해소할 수 없어 답답할 따름이었다.
“혼자 수련하고 계셨습니까.”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담우양은 검을 내렸다.
어느새 사방은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같이 수련하던 동료 교관들은 다들 돌아갔는지 슬쩍 주위를 둘러보자 넓은 연무장의 위로 자신밖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다른 분들은 다 한잔하러 간다고 했는데, 담 형만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아직 수련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해서 와봤습니다.”
주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담우양은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답답해서 말이네.”
혀끝에 감도는 목소리의 잔향 역시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이 벽에 가로막힌 것이 벌써 몇 년이야. 세상을 돌아보며 별짓을 다 해봤지만,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네. 아니, 요즘엔 오히려 퇴보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
담우양은 주호가 자신보다 몇 수 위의 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무언가 단서를 달라거나, 실마리를 구하는 뜻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부족함에서 나오는 답답함을 한탄하려는 것일 뿐.
“그렇습니까.”
주호는 담담한 태도로 말을 받았다.
그 역시 조언해줄 생각은 없었다.
무인이란 그런 고통과 답답함을 견뎌내어 껍질을 깨뜨리는 것으로 더욱 상승경지에 오르는 것이었으니.
간혹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고수들이 훈수랍시고 몇 마디 툭툭 던져준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일부 경우를 제외하곤 성장의 가능성을 제한해버리는 짓이라는 것을 주호는 잘 알고 있었다.
“저와 대련을 한 번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주호는 대련을 제안했다. 직접 체득하는 것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빠를 터.
“대련 말인가?”
담우양은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진지한 주호의 표정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지만 너무 열중하진 말게. 아직 일해야 하는 몸인지라 골병들기는 싫거든.”
“하하하, 그저 가볍게 손속을 나누자는 겁니다. 내공은 서푼씩만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군요.”
짧게 대화를 끝마친 그들은 연무장 위에 서서 검을 들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면…….’
주호는 담우양이 자신을 가두고 있는 벽을 스스로 뛰어넘을 수 있게끔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가 고민하고 고뇌하는 것은 주호가 이미 비동에서 뛰어넘은 지 오래인 경계.
몇 마디 심득을 던져준다면 담우양은 필시 작은 깨달음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할 것이다.
하지만 주호는 그러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훈수를 두는 것은 성장의 가능성을 깎아 먹는 행위였으니까.
척.
날카로운 두 자루의 검 끝이 서로를 향해 겨눠졌다.
살기가 없다고 하여도 검이란 무릇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도구.
그렇기에 담우양은 전신의 신경을 집중해 그것을 휘둘렀다.
“합-!”
좀 전까지 홀로 춤추는 듯한 검세가 이번엔 주호의 검과 어울려 허공을 가득 채웠다.
쉬익- 캉!
비록 서로 서푼의 힘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공격이 너무 쉽게 막히자 담우양은 이를 악물며 더더욱 강하게 검을 떨쳤다.
‘너무 힘이 들어갔어.’
주호는 천천히 그것들을 모두 받아내었다.
그가 보기에 담우양은 현재 물이 꽉 찬 그릇과도 같은 상태였다.
무언가 작은 계기만 있다면 그 잔잔한 표면에 파문이 일기 시작할 터.
하지만 너무 조급했다.
이전에 남궁연이 보였던 모습처럼 강해지고자 하는 데만 집착해 더 넓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캉-!
“읏?!”
주호는 담우양의 검을 모조리 봉쇄했다.
검이 휘둘러지기도 전에 그 흐름을 끊어놓았고, 애초에 제대로 된 형을 갖추지 못하게 중심을 뒤흔들었다.
“큭!”
담우양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뒷걸음질쳤다.
그만큼 주호의 압박은 거셌으며, 쉬이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이 정도인가…….’
담우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패배를 선언하려 했다.
실력 차이가 명백한 상황에서 더 이상의 대련은 무의미하다 느꼈으니까.
캉!
“억?!”
하지만 주호는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담우양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그 품에 파고들어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방금만 해도 담우양이 순간적으로 내력을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어깨 하나 정도는 내줘야 했을 위력이 아닌가.
담우양은 그런 그에게 무어라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눈 한 번 깜빡일 틈도 주지 않은 채 쇄도해오는 검 끝에 헛바람을 내뱉으며 막아설 수밖에 없었다.
‘막지 못하면 죽는다.’
오랜만에 닥쳐온 죽음의 공포.
잔뜩 힘을 머금은 그의 검이 점차 제풀에 지쳐 느려지기 시작했다.
손은 저릿저릿했고, 호흡은 가빠졌다.
더는 검을 휘두르는 것 자체가 한계일 정도로 몰려 있었다.
그럼에도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의 수련이 헛되지 않았던 것일까.
‘하지만.’
전력의 차이는 명백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체념의 감정이 서렸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손에 힘을 빼고 적당히 검을 들었다.
베고 막는다. 간단한 이치였다.
담우양은 문득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전처럼 사력을 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주호의 공격을 이전보다 더 수월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조급함을 버리니 힘의 낭비가 사라졌다. 불필요한 움직임이 줄어들자 잃었던 효율을 되찾으며 가로막혀 있었던 시야가 넓어졌다.
“…어?”
갑작스러운 변화에 담우양은 의문성을 내뱉었다.
별로 내공을 싣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검은 자연스럽게 주호의 검과 어우러져 한 치의 틈도 없이 그것을 쳐내고 있었다.
“아아……!”
무언가가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당연하였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고, 평생을 생각해온 것이었다.
‘왜 그렇게 조급했을까.’
자리를 멈춘 체 잠깐 둘러본다면, 자신이 이미 그 경지에 발을 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을 텐데.
한 번 얻은 깨달음은 이제 곧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담우양은 이제 자신의 앞에 주호가 있다는 것도 잊고는 제 흐름에 따라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둠을 가르고, 밤의 적막함을 메우는 파공성이 연무장 위에서 울렸다.
“…후.”
천천히 검을 거둔 주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절정의 완숙에 이르렀습니다.]
[상태창]
이름: 주호
별호: 월영사신
직업: 정천학관 일반교관
나이: 스물여섯
소속: 정천학관
경지: 절정(絶頂)(六/十)
무공: 청룡신공(五成)
결실을 얻은 건, 담우양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