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런데 왜 그렇게 태연해?”
천우희는 그가 깨어나면 적어도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힘들어할 줄 알았다.
아무리 강호인이라 하더라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되돌아왔다면 태평한 모습일 수 없으니까.
하지만 저 표정을 보아라, 마치 일상적인 것을 겪은 듯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삼 년간 어두운 비동 속에서 버텨내다 보면, 대부분의 일은 무덤덤해지기 마련이지.”
“…뭐?”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곤 잠시 그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탄식을 내뱉었다.
“무황의 비동!”
“정답이다.”
천우희는 그제야 일련의 이야기가 이해되었다.
끄트머리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와 궁기의 싸움은 자신조차 감히 끼어들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라면 아직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토록 무공을 얻었는지, 그리고 사신무 중 하나인 청룡신공을 익혔으면서 왜 그 전승은 하나도 전해 듣지 못했는지 아귀가 맞아 들었다.
“들어갔던 사람은 모두 죽었다고 들었는데…….”
무황의 비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세 세력의 싸움으로 인해 무너져 내렸고, 그대로 막히게 되었다.
아무렴 당시 강호의 큰 화제였으니 모를 수가 있을까.
일 년이 더 지난 시점에서 탐사대는 전원 사망 처리되었고, 강호에는 한동안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재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아직 그 입구를 찾으려 노력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설마 그 생존자가 자신의 앞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삼 년 동안 검으로 땅을 파고 나왔지.”
“미친…….”
태연스럽게 말해오는 그 태도에 천우희는 무심코 욕지거리를 입에 담았다.
말이 삼 년이다. 그 시간을 어둠 속에서 홀로 지내야 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무언가 초탈한 느낌인가 했더니.’
그것은 깨달음이나, 원래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비동에서 있었던 삼 년간의 생활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런 걸 말해줘도 괜찮은 거야?”
무황의 비동에서 생존자가 나왔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전 강호 무림의 관심을 끌어모을 터.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평범한 삶은 보내지 못하게 되리라. 하지만 주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렴, 몸도 섞은 사이인데.”
예상치 못한 그 대답에 천우희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진정됐을 때, 그녀는 가쁜 숨을 참으며 제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까불지 마. 분명 하룻밤만의 관계라고 말했지?”
“그런 것치고는 일어날 때 상당히 아쉬워하던데.”
“…그건 네 기분 탓이고.”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천우희의 대답에선 분명 살짝 주저함과 망설임이 서려 있었지만, 주호는 그 이상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사람에게는 제각기 사정과 사연이 있는 법이니.
“그나저나, 내가 누워 있은 지 얼마나 됐지?”
창밖으로 보이는 햇살을 보아하니 이제 막 아침이 된 듯했다.
지금이라도 서둘러 출발한다면 학관에 늦지 않고 도착할 수 있을 터.
그렇기에 통증을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려던 찰나, 가만히 있으라며 어깨를 눌러오는 그녀의 손길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아직 사흘밖에 안 됐어. 최소 일주일은 정양해야 할 상처라더라. 그러니까 한동안은 푹 쉬어.”
“…기껏 얻은 직장에서 잘리게 생겼군.”
사흘이란 말에 주호는 신음을 흘렸다.
목숨을 걸 만큼 절실하진 않았으나, 그 자신에게도 책임감이 있었다. 더욱이 단철량의 추천서까지 받아가며 들어간 곳이 아닌가.
좀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 경험해보라는 배려를 받아 들어간 곳에 학기 초부터 결근이라니.
더군다나 요 얼마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보냈던 시간이 꽤 재미있었다.
다만, 지금의 소란으로 잘리게 된다면 다시 그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조금 아쉬울 따름이었다.
“걱정하지마. 천후를 통해 학관에 이야기를 전달해놓았어. 사흘간 몇 명이나 당신을 찾아왔다고?”
천우희는 그가 누워있던 침상 옆에 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무엇이 그리 수북이 쌓여 있나 했더니 무슨 과일이나 한약 종류의 약재가 대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당신, 의외로 인망이 좋네.”
의외라면 의외라고 생각했다.
주호 정도로 젊은 나이에 그 정도에 경지에 오른다면 자신의 신념이 확고하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그렇다는 것은 즉,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필요하다는 소리였지만, 지금껏 겪은 바로는 인망이 좋은 듯싶었다.
‘뭐, 저 얼굴에 무공까지 고강하니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주호는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있는 방명록을 살폈다.
제일 위, 천후부터 시작해서 남궁연, 선우연, 위천강 등등…….
그의 가르침을 받는 후기지수뿐만 아니라 같은 교관들의 이름까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수석교관이라는 작자도 찾아와서 말을 남겼어. 푹 쉬고 상처가 모두 나은 다음에 출근하라고. 참나, 살다 살다 도호(刀虎)의 전령 짓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런가.”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험난한 강호 생활을 하던 자신에게는 사뭇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그 궁기라는 자는?”
“이쪽의 지원이 오자 물러났어. 아무래도 같은 경지의 사신수와 정면 대결을 펼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겠지.”
“궁기, 아니 사흉수라는 자들은 모두 그렇게 강하나?”
그 물음에 천우희는 잠시 입을 닫고 주호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심중으로 한 말인가. 하지만 이내 시퍼런 정광이 피어오른 두 눈동자를 보곤 작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당연히.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같아. 그리고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의 수뇌도 마찬가지겠지. 강호에 초고수는 적지 않아.”
“…그런가.”
주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황의 무공을 익히고 강호로 나와 어느 정도 실력에 자신이 생겼다.
동년배는 물론이고 근처에서 자신과 적수를 이룰 수 있는 이는 극히 손에 꼽을 정도이리라 생각했지만, 강호는 넓었고, 고수는 그보다 조금 더 많았다.
“…이대로 누워있을 수만은 없겠군.”
아직, 자신이 가야 할 길은 한참이나 남은 듯했다.
***
다음날.
예정보다 며칠 더 일찍 몸을 추스른 주호는 학관으로 복귀했다.
제일 먼저 한 것은 수석교관의 집무실로 가서 팽대환에게 일련의 사정을 설명한 것이었다.
“처음엔 깜짝 놀랐다네.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니. 자네가 그리될 정도였으면 필시 심상치 않은 놈들이었겠지.”
“그래도 폐를 끼쳐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몸은 이제 괜찮아졌나?”
“예, 다행히 외상이 대부분이라 금방 회복했습니다.”
괴한에게 습격당했다.
천우희가 얼버무린 이야기에 대충 편승하며 복귀 절차를 마무리했다.
팽대환은 별 의심 없이 그것을 믿는 모양새였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주호의 뒷배에는 무림 맹주가 있었으니.
복귀까지 딱 한 주가 지나 새로운 첫날이 되었기에 실전의 이해 과목은 남사일의 주도로 진행되는 합동 교육이었다.
삼백에 달하는 대인원에 강의실에 앉아 그의 강의에 집중한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주호는 동료 교관들에게 붙잡혀 자초지종을 설명하던 중이었다.
“그나저나 보통의 녀석들이 아닌 듯하군. 자네를 그렇게까지 몰아갈 수 있다니 말이야.”
“그러게 말일세. 나나 자네가 있었더라면 십초지적은 되었으려나 모르겠군.”
“어허. 자네와 날 같은 수준으로 엮지 말게. 난 적어도 이십 초는 버텼겠지!”
그들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주호의 쾌유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이미 정이 든 사이라 이대로 헤어지면 아쉬워했을 뻔했다며 우스갯소리까지 해올 정도였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짧게 끝낸 만큼 각 지도 교관의 재량에 따라 이후의 교육을 이어가도록 하겠네.”
남사일은 예정된 시각보다 조금 더 강의를 일찍 끝냈다.
원래라면 그의 교육을 받지 못해 아쉬워했을 관생들이었지만, 학기가 계속되고 학관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강의가 일찍 끝난다는 소리에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각 지도 교관의 재량에 따라 추가 교육을 하겠다고 했지만, 교관 역시 사람이 아닌가.
서로 적당히 타협한다면 일찍 끝마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 눈을 빛냈다.
“난 대충 끝내고 오랜만에 진득하니 수련이나 해야겠군. 자네는 어떻게 할 텐가?”
생각지 않은 여유에 담우양이 밝은 얼굴로 말해왔다.
그간 너무 술만 마셔서 살이 너무 찐 것 같다며 농을 흘렸고, 그 주위에 있던 교관 역시 자신도 이제 뱃살이 잡히기 시작했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영락없이 한잔하러 가자고 할 줄 알았거늘.’
여전히 유쾌한 그들의 모습을 보며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잠깐 제 관생들과 이야기할까 합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며칠 빠졌으니 말이죠.”
“그런가, 수고하게.”
“그러면 수련 끝나고는 한 잔 어떤가? 비웠으면 채워야 하는 것이 깨달음의 길 아닌가?”
“그거 좋은 소리군, 내 오늘만큼은 봉인했던 주도의 벽을 허물도록 하지.”
결국, 이야기가 또다시 술로 귀결되자 주호는 실소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
“일단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다.”
빈 연무장의 위.
주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자신 앞에 선 이들에게 사과했다.
일의 앞뒤가 어찌 되었든 한 주 동안 강의를 빼먹은 것은 교관으로서 실책이었으니.
“괜찮습니다. 그동안 저희는 푹 쉬었으니까요.”
하지만 악비산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간 참느라 근질거려서 힘들 지경이었다며 씩 웃어왔기에 주호 역시 가볍게 마주 웃어주었다.
“그런가. 원래 오늘은 간단한 이야기로 끝내려 했지만, 그렇게 나오니 공백 기간의 벌충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군.”
“비산.”
“…너 이 자식.”
주호의 말에 모두가 악비산을 노려보았다.
벌써 일주일 전의 기억이었지만, 그만큼 주호와의 대련은 고된 것이었다.
분명 하루가 지날수록 무공이 늘어가긴 했지만, 어찌나 고되던지 후오 앞에 서면 자동으로 방어기제가 나올 정도였으니.
오늘까진 조용히 넘어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가벼운 입을 턴 친우 한 명 때문에 고생하게 생기자 모두의 마음속에 시커먼 무언가가 응어리졌다.
“…….”
정작 그 본인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다가올 대련을 기다렸을 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직 몸이 성치 않으시다 들었는데.”
위천강이 조금의 기대를 담아 물었다.
주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면 전처럼 빡빡하게 대련을 이어가지 못할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그들 모두 그것을 깨달았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간 주호에게 당한 것이 얼마인가.
혹시라도, 혹시라도 오늘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지금, 한 방 먹일 유일한 기회이리라.
그나마 가장 그를 잘 상대해낸 남궁연조차 기이한 열망이 휩싸인 눈동자로 바라봐왔을 지경이었으니, 다른 이들의 심중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하.”
주호는 그들의 얼굴에 서린 생각을 읽고 헛웃음을 토했다.
하룻강아지가 범을 걱정해주는 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숨긴 채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뭐, 다들 알다시피 아직 제 상태가 아니긴 하지.”
관생들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진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말에 그들의 표정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듯했다.
“그래서 힘 조절이 잘 안 되니까 미리 양해 부탁한다.”
그들의 스승은, 여전히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