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궁지에 몰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유 넘치는 대답이 돌아오자 천우희는 한결 마음이 풀렸다.
참으로 특이한 사내였다.
자신 때문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까지 와서도 저리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니.
‘…만약, 살아남는다면.’
비록 만난 시간은 짧지만, 그 역시 같은 생각이라면 조금 더 깊은 관계가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그 부푼 생각은 앞쪽에서 들려온 궁기의 싸늘한 목소리에 끊어지고 말았다.
“여유가 넘치는군. 사지가 잘려나간 뒤에도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하구나.”
“…역시 근본 없는 것들이라 그런지 살벌한 소리를 하네.”
천우희는 가까스로나마 여유를 되찾았다. 그러곤 주호 옆에 나란히 서며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괴한들과 마주했다.
-내가 길을 뚫을게. 당신이라도 도망쳐.
-내공의 낭비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도록.
“재미있군.”
궁기는 돌연 검을 거두었다.
그러자 찬란하게 휘몰아쳤던 핏빛 검강이 사그라들었고, 어둠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사혈룡.”
궁기의 부름에 네 명의 인원이 그 뒤에 나타나 부복한다. 혈룡이라는 이름처럼 핏빛 무복을 입은 그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제압하라.”
“존명.”
간결한 명령에 군더더기 없는 대답이 나옴과 동시에 사혈룡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들의 등장과 동시에 재빠르게 상태창을 소환해 그들의 내력을 읽어나간 주호는 옆에 있던 천우희에게 외쳤다.
“네 명 다 절정 고수다! 절반씩 맡아!”
사혈룡이라 불린 네 명의 무인은 모두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다행히도 아직 초입이라 부를 수 있는 수준이어서 어렵지 않게 상대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는 궁기를 비롯해 수많은 고수의 기운은 둘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우릴 양식으로 삼으려는가.”
궁기의 의도를 짐작한 천우희가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나서지 않은 채 굳이 수하들을 부린다는 것은 실전 경험을 쌓게 하려 함일 터.
치욕적인 상황이었으나, 그녀는 오히려 그것을 기회라 생각했다.
‘이쪽에서 녀석들을 인질로 잡으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을 터.’
파바바밧-!
사혈룡은 네 명 모두 검을 사용하는 검수였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죽여 제 능력을 증명하고 싶은 것인지, 처음부터 망설임 없는 살수를 뿌려왔다.
무복과 같은 핏빛 검기가 사방을 베어 갈랐다. 그와 동시에 주호와 천우희는 언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반대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웅-.
주호는 빠르게 승부를 보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청룡신공의 절기를 보였다.
시퍼런 귀화가 검을 뒤덮는다. 그것은 곧 맹렬하게 허공을 떨쳤고, 세찬 검기가 쏘아졌다.
서걱-!
어둠을 찢어발기며 쇄도한 푸른 검기가 혈룡들의 몸을 스쳤다.
살이 쩍 갈라지고 그 위로 피가 솟구쳤지만, 둘을 동시에 노렸기 때문인지 유의미한 결과를 끌어내지 못했다.
탁, 타닷-!
하지만 주호는 낙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공격은 저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
땅을 박찬 그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혈룡들에게 오히려 달려들었다.
“……!”
정면에서 맞붙으면 서로 큰 상처를 입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그보다 주호의 검이 한 발자국 더 빨랐다.
‘일단 하나.’
지금을 위해 일부러 반푼의 힘을 숨겼었다.
혈룡들은 아까의 공격으로 자신의 무공을 가늠했을 터.
그리고 그 반푼의 차이는 아주 치명적인 틈이 되었다.
쐐애애애애액-!
“빌어먹을!”
하지만 주호는 곧바로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혈룡들의 사이로 거대한 기운이 그의 목을 노리고 쇄도해온 것.
하수들이나 쓰는 수법인 뇌려타곤까지 사용한 뒤에야 가까스로 그 공격을 피해낸 주호는 흉흉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땅을 구른 탓에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다.
진기마저 흐트러져 잠시 정돈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지척에 있던 두 혈룡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듯 다시금 날카롭게 이빨을 세웠다.
‘아주 장난감으로 보고 있군.’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궁기의 모습에 주호는 절로 이가 갈렸다.
나설 것이면 확실하게 나설 것이지 이런 수치를 주다니.
캉-!
곧 혈룡들이 양옆에서 쇄도해왔다.
궁기의 공격을 피하려고 억지로 진기의 흐름을 비튼 탓에 진기의 흐름이 흐트러진 와중, 거친 공방이 이어졌다.
쐐애액-.
그들은 합공에 익숙한 듯했다.
마치 쌍둥이처럼 마음이 통하는 듯 피하기 힘든 궤적으로 가슴을 찔러오는 검에 주호는 헛바람을 내뱉으며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휘리릭.
두 자루의 검 끝이 그가 만들어낸 흐름을 따라 빗겨나간다. 하지만 그 위에 서려 있던 기운들이 거칠게 흔들려 옷가지가 길게 베였다.
이화접목의 묘리를 이용한, 찰나의 임기응변.
그 절묘한 수법에 두 혈룡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너희 우두머리는 이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더냐?”
귀히 얻은 찰나의 여유에 호흡을 정돈한 주호는 입가를 비틀며 다시금 검을 떨쳤다.
청룡검법 일 초식
청룡잠운(靑龍潛雲).
청룡신공의 정수가 그의 검 끝에서 터져 나왔다.
마치 용이 구름을 노닐 듯 유려한 궤적으로 갈라지는 수 개의 검기에 혈룡들이 헛바람을 내뱉으며 황급히 검막을 펼쳤다.
시뻘건 혈기가 어둠 위에 수놓아진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볼 주호가 아니었다.
퍽-!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힘껏 땅을 박찬 그는 이내 두 혈룡인 사이로 파고들었다.
“…엇?!”
쏟아지는 검기를 막고 있던 그들은 찰나에 이루어진 그 쇄도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후웅.
이번 역시 혈룡들이 막기 벅찬 공격이라 생각했는지, 궁기가 나섰다.
미증유의 공력이 담긴 일격이 맹렬한 기세를 흩뿌렸고, 그의 몸을 갈가리 찢을 듯 닥쳐왔다.
“…….”
일순간, 주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전과 같이 정면에선 막기 벅찼지만, 몸을 날리며 피하고자 하면 피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 정도는 예상했다.’
하지만 주호는 그대로 발을 내디뎠다.
올곧은 시선으로 눈앞을 바라보았고, 뻗는 팔, 휘둘러지는 검, 순환하는 내력의 흐름 모두 한 점의 흔들림 없이 그 의지를 행했다.
청룡검식
회귀(回歸)의 검, 청룡(靑龍)
한계까지 쥐어 짜낸 청룡신공의 기운이 그의 검에서 빛을 발했다.
“……!”
당연히 주호가 그것을 피하려 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자신의 공격에 맞서오자 궁기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동시에 가볍게 뻗은 가볍게 뻗은 그의 검 위로 새로운 기운이 덧씌워졌다.
파멸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뻘건 검강이 일렁거리며 단단함을 더했고, 무엇이든 베어버릴 듯한 예기를 내뿜었다.
[경고]
상대와의 격차가 너무 큽니다.
공격의 회피를 권합니다.
[경고]
큰 피해가 예상됩니다. 속히 전장을 이탈하는 것을 권합니다.
[경고]…….
주호는 시야 한 편에 잔뜩 떠오른 상태창의 경고성에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으로 내가 네게 가르침을 주겠구나.”
검을 다잡는 그의 두 눈에 결연한 각오가 서렸다.
“남자라면, 때로는 결과가 명확하더라도 물러날 수 없는 순간이 도래하는 법이니.”
그는 이를 악물며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이때까지와는 밀도가 다른 시퍼런 기운이 검 위에 휘감긴다. 검 위에 서린 불꽃은 어둠을 베어 가름과 동시에 그 앞을 가로막았던 두 혈룡인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 직후, 회귀의 묘리를 이용해 코앞까지 닥쳐온 궁기의 기운을 부드럽게 감쌌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그것을 빗겨내어 제 뒤로 흘려버렸다.
“…컥.”
하지만 서로 간에 격차가 너무 큰 탓인지 수법이 완벽하지 않았다.
더욱이 무리하게 검식을 이어 전개했기에 기혈이 뒤틀리고 피가 토해져 나왔으니.
치솟은 내상이 머리에 닿은 것인지 이내 눈의 핏줄이 터지며 시야의 초점까지 흔들려왔다.
캉-!
곧 그의 지척까지 당도한 궁기가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주호는 애써 검을 들어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상대는 더 이상의 반항은 허락하지 않았다.
“…….”
검은 저 멀리 날아가고, 그의 몸은 실이 끊긴 인형처럼 땅을 뒹굴었다.
“…어리석은, 제 목숨을 희생해 주작을 살리겠다는 것인가.”
궁기는 싸늘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호는 제 앞에 있던 두 혈룡인 뿐만 아니라 방금 흘려낸 궁기의 공격으로 천우희를 압박하던 녀석들까지 한 번에 처치해버렸다.
그 탓에 내상을 입고 치명적인 틈을 만들어버렸지만, 그녀의 기운이 빠른 속도로 이곳을 이탈하는 것이 느껴지자 주호는 신음이 섞인 웃음을 토해냈다.
‘둘 다 살기 위해선 이 방법이 최선이다.’
궁기는 그 둘이 함을 합한다고 하더라도 대적할 수 없는 초고수.
더군다나 그 주위엔 범상치 않은 수하들까지 자리하고 있다.
차라리 한 명이 탈출해 어디 있을지 모를 사신문의 고수들을 불러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터다.
‘물론, 그 확률은 지극히 희박하지만.’
거칠게 피를 토해낸 주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킬 찰나, 궁기는 일그러진 얼굴로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잡고는 그대로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컥, 커억…….”
주호는 육척이 넘는 장신이었으나, 그 발이 땅을 딛지도 못했다. 점차 조여오는 숨통에 그저 신음을 뱉어낼 뿐이었다.
휙-!
주호는 남은 내력을 쥐어짜 궁기의 몸을 가격했다.
하지만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는 호신강기에 가로막혔고, 조금의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생사는 상관없다. 그 계집을 내 앞에 데려와라.”
궁기는 그런 주호의 목을 더더욱 강하게 움켜잡으며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주위에 있던 복면인들이 쏜살같이 사라지며, 달아난 천우희의 뒤를 쫓았다.
“헛된 기대는 품지 말아라. 어차피 네놈들 모두 우리 손바닥 안에 있을 뿐이니.”
“윽, 으윽…….”
숨이 한계에 이르렀다.
눈앞의 광경은 흐릿함을 넘어 색을 잃었고, 이내 가장자리부터 점차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부, 모님……. 산아, 향아…….’
그간 살아왔던 기억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옛 지인, 그리고 학관 생활로 친해진 교관과 제자들까지.
이윽고 그 시야가 완전한 암흑으로 물들었을 때.
[사용자의 생명이 경각에 달했음에 따라 비상 프로토콜을 실시합니다.]
기긱, 기기긱.
주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상태창만은 점차 형태가 바뀌며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온갖 기하학적인 문양과 알 수 없는 글씨가 그 위에 떠올랐고, 머지않아 그 변화는 끝을 맞이했다.
“…쯧.”
궁기는 바닥에 몸을 뉜 혈룡들을 바라보았다.
‘돌아가면 난리를 치겠군.’
사흉수에선 미래가 유망한 후기지수를 혈룡이라 불렀다.
이번 작전에서 경험도 쌓게 할 겸 데려온 것이었지만, 사신수는 사신수라는 것인지 예기치 못한 기습으로 인해 그들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들의 관리는 자신의 몫.
전부 목숨을 잃었으니 면책은 피하지 못할 것이었다.
“이 녀석들은 무조건 데려가야겠군.”
당대 사신수를 구성하는 인원 중 절반인 청룡과 주작을 사로잡아 데려간다면 그만큼 큰 공적도 없을 터.
그렇게 된다면 쓴소리는 어느 정도 상쇄될 것이리라.
“이놈의 몸을 구속해놓도록.”
그렇기에 궁기는 남은 수하들에게 주호의 몸을 던졌다.
의식을 잃은 것은 직접 확인했다. 그 몸 위로 점혈을 해놓았으니, 깨어난다고 해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 터.
하지만 그는 이내 자신의 팔을 타고 올라오는 이질적인 감각에 고개를 휙 돌렸다.
우득.
누군가의 손이 마치 뱀처럼 그의 팔을 휘감아 강하게 뒤틀어버렸다.
속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신음을 삼키며 두 눈을 크게 뜰 찰나, 궁기는 제 앞에 멀쩡히 서 있는 주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