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38화 (38/300)

#38화

다음날의 늦은 오후.

“…후.”

주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에서 깨어나 자리에서 뒤척이기 전까지 전날 있었던 일이 모두 꿈인 줄 알았다.

그간 무공에만 열심이었기에 욕구불만이라도 생겼나 싶었다.

하지만 들썩거리는 이불 안에서 보이는 천우희의 나신은 더 이상의 현실 도피를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천우희는 그런 주호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옆에 누운 채로 손가락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생각보다 아팠어. 누구는 처음부터 기분이 좋을 거라고 했는데.”

“…처음이라고?”

주호는 의외라는 듯 물었다.

그녀 정도의 외모라면 많은 남자가 꼬였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도 옥석을 가리려 했던 것일 터.

마음만 먹었더라면 한둘과 사귀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을 것으로 보였지만, 천우희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 남자랑 연을 가질 생각은 없었다고.”

“…그게 진짜였다고?”

“응. 어릴 때는 무공 수련에 열심히였고, 나이가 차도 딱히 끌리는 상대가 없었으니까.”

그녀 자신도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조금만 더 이렇게 여운을 즐기자며 주호의 몸을 강하게 안아왔다.

“아, 그래도 착각하지마. 어제 말했듯이 하룻밤만의 관계니까.”

“…말이랑 행동이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어젯밤 그 눈동자에 보였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평소와 같은 천진난만함을 가장한 치밀하게 계산된 태도뿐.

주호는 복잡한 여자한테 코가 꿰인 것 같다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후 그 아이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천후? 왜? 남의 제자를 당신이 신경 써?”

“…모르는 건가? 당신의 제자가 품고 있는 마음을?”

“아아…….”

그 말에 천우희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라 그래. 내가 어릴 적부터 돌봐줘서 착각하고 있는 거야. 강호에 더 좋은 여자는 널렸어.”

“…냉정한 소리군.”

“냉정하긴, 더 없이 현실적인 이야기인데.”

천우희는 곧 손바닥으로 주호의 가슴을 팡팡 때렸다.

“그런 귀찮은 이야기는 둘째치고,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거든?”

두 눈을 반짝이며 바라봐오는 천우희의 모습에 그는 피식 웃었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아무래도 침상을 벗어나는 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 될 것 같았다.

***

노을이 진 저녁, 어둠이 완연해져 가는 시각에 주호와 천우희는 도심을 벗어나 교외로 향했다.

이유인즉, 사신문에서 사람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온 것.

“도심지에서 만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글쎄, 내가 알기로 그런 건 없는데. 뭐, 이런 으슥한 곳으로 불러내는 목적이야 뻔하잖아?”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그녀가 경고했던 대로 청룡의 계승자가 맞는 것인지 확인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직접 손을 나눠보는 것일 터.

“절대 방심하지마. 둘 다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고, 산전수전 다 겪은 구렁이 같은 양반들이니까.”

“조언, 감사히 받지.”

곧 둘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시와 멀찍이 떨어져 큰 소란이 일어나도 이목이 쏠릴 위험이 적은 외진 곳이었다.

“……?”

잠시 나무에 기대 잡담을 나누며 상대가 오길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다가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천우희는 혹시나 자신이 위치를 잘못 파악했나 싶어 몇 번이고 주위를 확인했지만, 분명 만나기로 약조한 장소가 틀림없었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이 지났다.

어둑어둑한 하늘 위로 걸린 달만이 청명한 빛을 내고 있을 뿐.

“동이 트기 전까지는 돌아가고 싶군.”

주호의 본업은 정천학관의 교관이었다.

오늘로 주말이 끝나고 날이 밝으면 학관의 활동이 재개된다. 오전에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오후부터는 또다시 강의가 시작되었다.

하룻밤 정도 자지 못하는 것쯤이야 괜찮았으나, 아직 학기 초가 지나지 않았는데 교관이 되어 개인적인 이유로 강의에 빠지는 것은 보기 좋지 않은 모양새가 아닌가.

“…반 시진만 더 기다려보고 그래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돌아가는 게 좋겠네.”

천우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마냥 기다릴 순 없었다.

필시 다른 급한 일이 생겼거나, 무언가의 착오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음?”

산세 사이로 풍겨오는 기분 나쁜 기시감이 주호 기감을 자극했다.

[살기를 감지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시야 한 편으로 수십 개의 붉은 점이 어둠을 넘어 허공 위에 찍히기 시작했다.

‘…이건.’

비동에서 나온 직후 마교와 사도맹의 지부를 부수러 다녔을 때 가끔 본 적 있던 광경이었다.

그 붉은 점이 표시된 곳엔 여지없이 적들이 숨어 있던 기억이 있었다.

주호뿐만 아니라 천우희 역시 그것을 느낀 것인지 서로 시선을 맞추며 얼굴을 굳혔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지만, 사신문의 무인들은 이렇게 음침한 기운을 내뿜는가?”

“그럴 리가. 폭죽을 쏘아대며 화려하게 환영하는 거면 몰라도 이런 건…….”

곧 수풀 사이사이로 괴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젠 적나라하게 그 꺼림칙한 기운들에 천우희는 입을 닫고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척.

잿빛 무복과 얼굴을 감싸는 복면.

그 흉흉한 기세만 보아도 필시 좋은 목적을 가지고 찾아온 것은 아니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본적 없는 집단이다. 내 쪽의 은원은 아니야. 그러면 그녀 쪽에서 이야기가 새어나간 건가.’

주호는 흘깃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당황하고 있는 것이 역력해 보였다.

‘정보가 새어나갔다?’

그렇다면 비상 연락망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기별이 왔어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까지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바꿔 말하자면 누군지 모를 적대 세력이 그만큼 자신들 사이에 은밀히 파고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상태창.’

주호는 속으로 상태창을 호출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에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정보가 부족합니다.]

‘정보가, 부족해?’

처음 보는 대답에 그는 침음성을 삼켰다.

상대 한 명 한 명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일류 남짓한 것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수십 명이 모여 봤자 자신들을 어찌할 수는 없을 터.

‘나 혼자 나선다고 해도 이각 안에 전부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이쪽의 정보를 알고 습격한 것이라면 이 정도로 끝날 리는 없겠지.’

저벅.

그 생각을 입증하듯 괴한들의 무리가 갈라지며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장대한 풍채의 사내였다.

얼굴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범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기괴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우희.”

“…응.”

주호의 부름에 천우희는 경직된 목소리로 답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여유가 있었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설사 정면으로 싸워도 모두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저 사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신수.”

“……!”

마치 동굴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깊게 울리는 그 목소리에 천우희의 목이 움찔했다.

“주작, 천우희 맞는가?”

“남이 누군지를 물으려면, 자신의 소개부터 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

천우희는 기세 싸움에서 지지 않겠다는 듯 도발적인 태도로 외쳤다.

그러자 사내는 껄껄거리며 웃음을 토해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주작이라면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그리고 네놈이 이번에 새로이 나타났다는 청룡일 터.”

“…….”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주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상대의 기세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 아니라면 자신을 훨씬 뛰어넘는 경지에 오른 고수라는 것.

그리고 그 이지선다의 정답은 당연히 후자 쪽이었다.

“우리가 누구냐고 저들이 묻는구나!”

쿵!

사내가 외치자, 괴한들이 박을 구르며 화답했다.

“우리는 핏빛 하늘 아래 세상을 정화할 운명을 지닌 자!”

챙!

사내는 검을 뽑아들었다.

귀가 시릴 정도로 시원한 발검이었다.

웅웅웅-.

눈부신 검기가 검 위로 피어올랐다. 그것은 순식간에 터질 듯 팽창하며 몸집을 부풀렸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듯 한계를 넘어 어느 영역에 이르렀고, 종래엔 하나의 형태를 그려냈다.

“…검강.”

주호는 자신의 옆에서 이를 악물며 내뱉듯 말하는 천우희의 목소리에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눈을 떼지 못했다.

검강.

초절정 경지에 이르러야 겨우 그 편린을 볼 수 있는 초고수들의 전유물이 아닌가.

절정의 완숙을 향해가는 그에겐 아직 요원한 경지였다.

“나는 사흉수의 궁기(窮奇)다.”

사내는 얼굴에 뒤집어쓴 범의 가면을 벗으며, 먹잇감을 바라보는 범과 같은 번뜩이는 눈으로 사나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사흉수라 함은 보통 사방신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

혼돈, 도올, 궁기, 도철.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설화가 많았지만, 이 강호엔 사방신과 더불어 그들의 이름과 형태를 본떠 만들어진 문파가 실재하고 있었다.

‘궁기라니.’

천우희는 검강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는 사내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운이 좋군. 당대 사신수 중 두 명을 한자리에서 해치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야.”

범의 가면을 벗자 드러난 궁기의 얼굴은 기껏해야 이립을 조금 넘은 나이로 보였다.

하지만 고작해야 절정에 이른 그들에 반해 궁기의 기세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정도로 거세기 짝이 없었다.

“…….”

주호는 슬쩍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잘게 떨리고 있었다.

‘상태창.’

그는 혹시 모를 희망을 담아 다시 한번 상태창을 불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익숙한 글귀가 뜨며 상대의 정보가 표시되었다.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상태창]

이름: 천아성

별호: 궁기

직업: 혈천신교 사존(四尊)

나이: 서른다섯

소속: 혈천신교

경지: 초절정(三/十)

무공: 소호검법

잠재력: -

호감도: 下下

“…….”

뚜렷하게 유형화된 그 정보에 주호 역시 입술을 씹었다.

초절정이라 쓰인 글귀를 바라보자 입안에 쓴맛이 맴돌았다.

궁기는 무림 맹주인 단철량보단 약했지만, 정천학관의 관주인 설우진과 비견될 만한 고수였다.

‘저런 놈이 네 명 더 있다는 것이지.’

잘못하다간 이곳이 묫자리가 되게 생겼다.

-혹시 지원을 바랄 수 있나?

-…우리 측에서 눈치를 챘다면 좋겠지만.

확답을 내리지 못하는 그녀의 태도에 주호는 담담히 검을 쥐었다.

가만히 있다가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느니 어떻게든 발악을 해볼 생각이었다.

스릉.

천우희 역시 주작신도를 꺼내 들었고, 옆에 있던 주호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미안해, 설마 정보가 새어나갔을 줄은 몰랐어. 조금 더 의심해볼걸…….”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천우희의 잘못이었다.

조금만 더 확인하고,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궁지에 몰리지 않았을 터.

하지만 주호는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강호에 우연은 없다.

그녀와 만난 것도, 지금 이런 상황이 된 것도 모두 필연이리라.

중요한 것은 이 앞으로부터의 일.

“이해한다. 여유가 없었던 것은 다 내가 너무 절륜했던 탓이니까.”

그렇기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검을 곧추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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