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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귀환-37화 (37/300)

#37화

주말의 첫날, 시간이 저녁에 가까워지자 주호는 천후가 건네준 약도를 따라 구석진 골목에 있는 주점을 찾아갔다.

“오랜만.”

안쪽으로 몸을 들이자니 텅 빈 실내의 중앙에서 한 여인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보는 듯한 허물 없는 그 모습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래 봐야 며칠이지 않나.”

“여자는 하루하루가 다른 데, 그런 것도 모르는 거야?”

천우희는 히죽 웃으며 제 앞자리에 손짓했다.

그 놀리는 말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자리에 앉은 주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삼십 대가 가까워진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은 외모로군.’

이제 막 약관에 이른 남궁연보다 한두 살이 많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청초한 외모였다.

“…….”

다시금 술잔을 기울이던 천우희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 시선을 알아챘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한테 반하지 마.”

“…풉.”

갈증이 났기에 냉수를 따라 마시던 주호는 느닷없는 그 말에 사레가 들렸다.

몇 번을 컥컥거리며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자니, 그녀는 짓궂은 미소를 지어왔다.

“나도 알아. 내 얼굴이 정도껏 반반해야지. 한눈에 반했느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려면 고이 접어서 저기 밖에 던져놔.”

“…자의식이 강하군.”

“하하, 그런 말도 많이 들었어. 하지만 어떻게 해? 지금까지 날 한 번이라도 만났던 사람 중에, 나에게 사랑한다며 고백해오지 않았던 남자가 없었는걸.”

당신은 어떨까, 라며 묻는 그 진한 미소에 이번엔 주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가를 닦았다.

“그러면 내가 그 처음이 되겠군.”

“어머, 내 쪽을 함락시킬 자신이 있는 거야? 자신만만하네.”

실없는 이야기였기에 가볍게 흘려 넘긴 주호는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어째 헛소리를 많이 하는가 싶더니 텅 빈 채로 굴러다니는 술병이 벌써 일곱 개나 되었다.

곧게 세워져 있는 여덟 병째도 반쯤 비어있는 것이, 곧 새것으로 교체될 듯싶었다.

“저녁, 아직이지? 만든 지 조금 돼서 식긴 했는데 맛있을 거야. 여기 주인장이 솜씨가 제법 좋거든.”

“…같이 들지.”

천우희가 다시 술을 따라 마시는 사이, 주호 역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녀 말대로 음식은 식었지만, 맛은 제법 훌륭했다.

“한데 다음 만남까지 달포쯤 걸린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거 말이지. 당신과 함께 조사한 것을 보고했더니 좀 더 두고 보자는 소리가 나왔어.”

“그런가.”

주호의 입장에서는 설우진이 변절자라는 것은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 때문에 사흉수인지 뭔지가 아니라는 무혐의가 입증되었으면 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자 하니 조금 시일이 걸릴 듯했다.

“원래라면 임무가 끝난 시점에서 바로 복귀했을 거야. 그런데 당신 이야기를 위쪽에 전하니까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라? 복귀를 중지하고 당장 당신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난 어디 도망가지 않는데 말이지.”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삼백 년 만에 나타난 청룡이니 위쪽에선 그러지 않은 모양이야.”

자신을 너무 막 굴린다며 천우희는 불평을 내뱉었다.

“며칠 전에 출발했다니까 늦어도 내일에는 본문에서 사람이 도착할 거야. 당신이 정말로 청룡의 계승자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거겠지.”

“그게 중요한 일인가?”

“우리에겐 중요하지. 나야 뭐, 외부인인 당신에게까지 우리 사정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는데, 위쪽의 고리타분한 전통을 지키고 계시는 분들의 생각은 모르겠네.”

“그런가.”

어쩌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다, 슬쩍 그런 의미를 담아 이야기한 것이었지만, 주호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그녀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생각이라…….”

주호는 잠시 입을 닫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지금은 그저 학관의 교관으로 지내며 많은 이들을 만나며 경험을 쌓고 싶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관주인 설우진, 그리고 매화선풍검 남사일과 했던 비무에서 얻은 깨달음을 전부 소화하지 못했다.

최소한 이곳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아는 이상, 당장 어디로 떠날 생각은 없다.

그러니 갑자기 사신문이니 계승자이니 하는 이야기를 해와도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밖에.

“누가 올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다른 사신수 중 한 명이 오겠지. 워낙 사명감이 투철하신 분이라 당신을 보면 네 운명을 피하지 말라는 등 이상한 소리를 할 테지만, 너무 미워하진 말아줘.”

다 옛날 사람들이라 그런지 무언가 환상에 젖어 있는 것 같다며 천우희는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참고하지. 물론 장담은 하지 못하겠군.”

“뭐, 그래도 저들은 중원에 있어 꼭 필요한 존재야. 당신이 우리가 하는 일을 알게 된다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는 것에 이 술 한 잔을 걸게.”

그녀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들고 있던 술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러곤 다시 그것을 채우려 했지만, 술병이 텅 비어버렸다.

“더 마실 건가?”

장정이라 해도 이 정도로 술을 마셨다면 진즉에 나가떨어졌을 터.

괜찮냐는 뜻으로 물은 그 물음에 천우희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 주점은 오늘 내가 전세 냈어. 주인에게 요리랑 술을 넉넉히 준비해달라고 했으니까 안쪽에 들어가면 있을 거야.”

돈은 자기가 냈으니 가져오라는 이야기였다.

주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곤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자니 정말 그녀의 말대로 수북이 쌓여 있는 술병과 접시 위에 담긴 요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이것을 다 마실 생각은 아니겠지.”

제법 술을 마신다는 자신조차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 양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주호는 술 몇 병과 요리 두 접시를 들곤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후.”

주호가 가져온 술과 음식을 먹은 천우희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행복이 뭐라고 생각해?”

“행복?”

또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주호가 천천히 말을 고를 찰나, 천우희는 자신 앞에 놓인 술과 음식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이것들이 내 행복이야. 일이 끝난 뒤에 먹는 맛있는 음식, 좋은 술. 거기에 오늘은 조금 무뚝뚝하긴 해도 잘생긴 미남까지 내 앞에서 대작해주니.”

그녀는 더 바랄 것이 없노라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아까도 말했듯이 나한테 반하지 마. 나는 남자랑 연을 틀 생각이 없거든.”

그래도 당신이 나보다 술을 잘 마신다면 혹시 모른다며 눈을 찡긋해왔다.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도록. 나는 나보다 젊은 여자가 취향인지라.”

주호도 지지 않고 맞서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에 천우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내 나이를 말한 적이 없는데?”

“…….”

주호는 정곡을 찔린 나머지 일순간 대답을 잃었다.

실언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상태창으로 확인한 것일 뿐, 직접 들은 바가 없었다.

“…분위기상으로.”

“흐응?”

겨우 심력을 끌어모아 궁색한 대답을 내뱉자, 천우희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참고삼아서 묻겠는데, 나 몇 살 같이 보여?”

‘…끄응.’

주호는 그간 많은 여인을 경험해왔기에, 그 말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이와 변화는 여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화제인 법. 특히 전자 쪽을 잘못 대답했다간, 가루가 되도록 씹힐 수도 있지 않은가.

‘상태창에 나와 있는 그녀의 나이는 스물여덟. 그렇다면…….’

잠시 말을 고른 주호는 이내 입을 열었다.

“외모 자체로만 본다면 이십 대 초반이겠으나, 무공을 익힌 여인이 그러하듯 피부의 노화가 늦춰졌겠지. 행동거지나 분위기를 고려하면, …스물일곱이 아닐까 싶군.”

“스물일곱이라…….”

앞에 미사여구를 붙이며 원래 나이에서 한 살 줄인 것이 정답이었는지, 그녀는 어깨를 떨며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앞에 있는 주호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스물일곱, 나쁘지 않네. 좋아, 난 오늘부터 스물일곱이야.”

당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주호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묘한 매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강호의 여인을 만나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 앞에선 보통의 여인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천우희에겐 그들에게 없었던 당당함이 있었다.

그리고 주호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당신, 나 혼자만 마시게 할 거야?”

“…한잔하지.”

술자리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제 스승이 술독에 빠지면 사흘 밤낮을 마신다는 천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그녀 혼자가 비워낸 술병이 이제 스무 개를 넘어갔다.

“흠. 당신, 잘 마시네.”

천우희와 대작하고 있던 주호 역시 적지 않은 술을 마셨다.

물론 내공으로 주기를 내뿜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그러한 짓을 하는 것은 상대에게 실례되는 행동이었으니까.

다만, 비동 안에서 환골탈태를 겪은 신체조차 휘청거릴 정도로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

어느덧 대화가 끊긴 둘은 서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깊은 밤의 흥취를 즐겼다.

음식과 술이 떨어지면 주호가 주방에 들어가 준비된 것들을 꺼내왔고,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어?”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술병이 비게 되었을 때, 천우희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흔들었다.

“다 마셨네?”

“밤도 깊었으니 이만 침소에 들지. 내일 사신문에서 사람이 찾아온다고 하지 않았나.”

주호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겨우 이성을 끌어모아 대답했지만, 정신이 아찔하며 손과 발끝은 저릿저릿하기 그지없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푼다면, 당장 자리에서 쓰러질 것 같을 정도로 취기가 올라왔다.

“음…….”

천우희는 그런 주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히죽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

“무엇이지.”

“나랑 잘래?”

“…뭐?”

그 뜬금없는 말에, 주호는 살짝 딸꾹질까지 내뱉었다.

머리가 싸해지며 술기운이 조금 내려갔지만, 이내 자신을 놀리는 것이리라 생각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천우희는 결정했다는 듯 한 번 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올라가자.”

그러곤 무지막지한 힘으로 주호의 손을 잡아 이끌었고, 그가 뭘 하기도 전에 위층에 있는 객실로 함께 들어갔다.

찰칵.

천우희는 주호를 침상 위로 내던지고는 곧바로 방문을 걸어 잠갔다.

건물 자체에 전세를 내었기에 오늘은 둘밖에 없었지만, 잠금의 목적은 외부의 접근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탈출을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자, 잠깐.”

주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퍼뜩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주기를 날려버리고자 내공을 운기 했다.

하지만 천우희는 그보다 더 빨리 주호 위에 올라타 단전 부위를 힘껏 눌렀다.

“하룻밤만의 관계, 나쁘진 않잖아?”

자신의 귓가에 속삭여오는 매혹적인 목소리에 주호는 버둥거리던 것을 멈췄다.

그는 천천히 천우희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우발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것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하지만 그녀의 두 눈은 멀쩡했고, 어딘가 애처로워 보였다. 그렇기에 주호는 차마 그녀의 손길을 밀쳐내지 못했다.

곧, 천우희는 그의 몸을 천천히 안았고, 둘은 이내 한몸이 되었다.

밤은 이미 깊었지만, 둘의 하루는 이제 막 시작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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