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천후는 처음 주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신수와 그 전승, 그리고 청룡의 실전에 관해선 어렸을 적부터 질릴 정도로 들어왔었다.
그러던 와중 갑작스럽게 청룡의 진전을 이은 계승자가 나타났다고 하니 그로서는 미심쩍어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것도 전부터 자신이 입관하게 될 것이라 여기던 정천학관의 교관이라니.
첫인상은 딱히 나쁘지 않았다.
수려한 외모, 건장한 체격, 진중한 분위기까지.
솔직히 말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세가 아니었더라면 어딘가의 귀공자가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스승님은 주호의 경지가 근소한 차이로 자신에 미치지 못할 것이리라 예상했다.
처음엔 청룡의 위엄이 상하지 않도록 그렇게 말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그와 마주하니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의 실력을 알고자 벌인 칠대 일의 비무.
한 번에 덤비라는 그 도발에 다들 어처구니없어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스승님을 생각해보면 이들 정도는 가볍게 찜쪄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전력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으나, 주호는 너무나도 손쉽게 자신들의 공격을 막아 냈다.
심지어 검을 뽑지도 않았으니.
천후는 그것이 못내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기에 지금 대련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최소한 주작의 이름을 잇는 후계자의 위명에 부끄럽지 않은 무위를 선보이리라.
“…큭.”
하지만 그것은 오만이자 자만에 불과했다.
천후는 그 누구보다 더 볼품없는 모양새로 주호의 공세에 밀려 나갔다.
제 자랑인 주작 도법을 펼칠 시간조차 없었다.
비무를 시작한 직후, 말 그대로 눈 깜짝할 틈도 없는 공격이 사방에서 쇄도했으니.
주호는 여전히 검도 뽑지 않은 채 장과 권으로만 자신을 상대했지만, 그는 그저 그 간격을 피해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며 막아 내거나 피해내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더 발악해라, 더 발버둥쳐라. 네 스승의 도는 이렇게 가볍지 않았다.”
“…….”
스승까지 들먹이며 자신을 도발하는 그 모습에 천후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비무라는 생각은 버린다.’
전심을 다 하지 않는다면 단지 바닥을 구르다 이각이 지날 판이었다.
후-.
깊고 낮은 숨이 그의 잎에서 내뱉어진다. 그 직후, 이전까지와는 다른 기세가 천후의 전신을 휘감았다.
탁.
그는 과감히 발을 내디뎠다.
빼앗긴 흐름을 되찾아오려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법. 이른바 살을 주고 뼈를 취하기 위해 도를 쥔 손에 힘이 가득해졌다.
‘제법이군.’
순식간에 뒤바뀐 천후의 분위기에 주호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제 스승의 것과 비교하자면 미적지근하지도 않았던 열양지기가 후끈하게 달아오르며 주위를 데우기 시작했다.
“엄청난 상승 도법이군.”
비무를 관전하고 있던 선우연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자신의 이십사수 매화검법에도 뒤지지 않는 수준으로 보였다. 이토록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도법이라니.
“…….”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이었다.
더욱이, 주호의 몸놀림은 지금까지와는 더욱 거세지 않은가.
자신이었더라면 십 초식을 넘기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을 터.
하지만 오히려 제 기세를 부풀려 맞서 싸우는 천후의 모습에 분함까지 느낄 정도였다.
‘나도 아직 멀었는가.’
특히 선우연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제 사형인 화산의 신룡을 이어 소신룡이라 불리며 함께 화산을 이끌어갈 인재라 추앙받았던 그였다.
하지만 강호에 출두한 자신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인에 불과했고, 비슷하거나 더 강한 이들이 수두룩했다.
고작 여섯 살 연상인 주호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의 고수였으니.
같은 후기지수인 천후는 출신이나 사문에 특별함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보아선 분명 자신의 위가 분명했다.
‘가진 재능을 가지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자부했거늘.’
그저 우물 안의 개구리였을 뿐.
물론 그것은 둘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남궁연이나 악비산, 그리고 당천유와 철대환 역시 마찬가지인 심정이었다.
위천강만이 홀로 흥미로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그렇게 이각이 모두 흘렀고, 많은 이의 마음을 어지럽혔던 비무는 천후가 주호의 마지막 공격에 쓰러지는 것으로 끝을 맞이했다.
***
시간은 순식간에 훌쩍 지나갔다.
주호에게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여전히 강의가 끝날 때쯤엔 예외 없이 숨을 헐떡이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얼핏 보면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듯했지만, 주호는 내심 감탄을 담아 자신 앞에 널브러진 이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재능은 무섭군.’
후기지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를 알려주면 그 몇 배가 되는 것을 가져갔다.
정작 그 당사자들은 그것마저도 성에 차지 않은 듯 이를 악물며 발악했지만, 주호가 보기엔 그것만으로도 눈부신 발전이었다.
“모두 수고했다. 다음 주부터는 비무와 더불어 다른 방식의 교육도 진행하도록 하겠다. 자세한 건 그때 공지해주지.”
“…….”
그 말에 천후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도 강의가 끝나면 기력이 다해 하루를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 다른 교육이 추가로 진행된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
‘제길, 내가 미쳤지.’
당천유는 원하지도 않은 강행군을 하게 되어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사천당가의 직계인 그가 부족할 것이 무에 있겠는가.
모종의 이유로 독을 사용하지 않고 암기를 중점으로 사용해 별종이라는 시선을 받았으나, 암기 하나만으로 이름을 떨칠 자신이 충분했다.
더욱이 당천유가 정천학관에 온 것도 인맥을 쌓으며 정보를 얻으려 함이었다.
그에겐 평생을 걸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심력과 시간 모두 필요로 하는 일이라 적당히 학관 생활을 보내며 과제에 집중하려 했지만, 주호와의 대련이 있는 날이면 기진맥진한 탓에 할당량을 채우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싸움을 좋아하는 악비산 같은 무식한 놈은 모르겠지만.’
악비산은 요즘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했다.
처음엔 자신 때문에 얼떨결에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두들기며 단련시켜주는 주호에게 완전히 매료된 모양이었다.
그가 원한다면 자신의 쓸개마저도 빼줄 기세였으니.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그 누구 하나 군말 없이 계속 강의를 듣고 있지 않던가.
한 명이 나가면 따라나갈지언정, 먼저 시작을 끊기엔 사천당가라는 이름의 자존심이 너무 컸다.
“강의는 이상이다. 주말 간 몸을 회복하고 다시 만나지.”
강의를 끝낸 주호는 여느 때와 같이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이후 딱히 특별한 일정은 없었으나, 담우양의 말로는 또 교관들끼리 술자리가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정말로 술을 좋아하는 이들이로군.’
오죽하면 주호는 이들의 몸에 피 대신 술이 흐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해보았다.
“…저, 교관님.”
연무장을 나와 강의실로 돌아가려 할 찰나,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주호는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강의를 제외하고 먼저 말을 건 적이 없던 천후가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우물쭈물한 태도로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 내일 보자고 기별을 넣으셨습니다.”
“내일?”
“예.”
그 말에 주호는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건가?’
천우희는 임무 때문에 복귀한다며 다음에 만나는 것은 아마 달포쯤 뒤가 될 것이라 말했거늘, 벌써 돌아왔다는 것인가.
“그리고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천후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스승님과는 되도록 술자리를 가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말에 주호는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제 스승을 사모하는 것인가.’
확실히 천우희의 용모는 미려하기 짝이 없었다. 후계자라곤 하나 그 밑에서 무공을 익혔다면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었을 터.
하지만 천후는 그 생각을 읽었는지 시뻘게진 얼굴로 강하게 부정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부정은 하지 않는군.”
“…스승님은 술을 좋아하심과 동시에 또 주량이 매우 강하십니다. 어찌나 강하신지 지금까지 그분을 이긴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천우희와 술로 대작한 사람 중에서 멀쩡한 정신으로 걸어간 이는 없다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임무를 끝내셨으니 한 사흘간은 술독에 빠져 계실 겁니다. 마음 같아선 저도 동석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학관 규정상 자정이 되기 전까지 돌아와야 하니 말이죠.”
정천학관의 정문은 학기가 시작함과 동시에 상시 개방이 되어있다.
그렇기에 언제든 드나들 수 있었지만, 학관의 규칙에 따르면 자정이 지나는 순간부터 출입이 통제되었다.
‘뭐, 유명무실한 규칙이라고 들었지만.’
주호는 뺨을 긁으며 천후를 바라보았다.
출입이 통제되는 것이지 밖에 나가 있는 것까진 무어라 하지 않았다.
아예 좀 더 기다렸다가 동이 트고 들어오면 되었기에 많은 이들이 그렇게 외박을 하곤 했다.
하지만 주호가 지금까지 봐온 천후는 고지식의 결정체였다.
규칙은 철저하게 따르며 조금의 티끌조차 용납지 않았으니.
“조언 고맙게 받아들이지.”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은 언제 어디서 들어도 모자람이 없는 것. 그 자신도 술을 좋아하긴 했지만, 사흘 밤낮을 술독에 빠져 지낼 만큼은 아니었기에 적당히 자제하면 되리라.
분명,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약 일곱 시진 후.
“…후우.”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주호는 감았던 눈을 떴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비빌 찰나, 그는 천장의 모습이 왠지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스럭.
동시에 몸을 덮고 있던 이불 속에서 이질적인 느낌이 느껴졌다.
“……?”
취기 때문에 멍한 머리를 붙잡고 조심스레 그것을 들추니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자신의 품속에서 편안한 얼굴로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둘 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허.”
주호는 다시 이불을 덮었다.
허리를 감싸오는 그녀의 손길에 몸을 움찔했지만, 구태여 그것을 밀어낼 정도로 그는 어리지 않았다.
주호는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사이 얼마나 술을 마셨던 것인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알딸딸한 정신과, 품 안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취뿐.
부스럭.
다시 한 번 이불이 요동쳤다.
주호는 조심스레 그 끝을 들어 올려 제 몸을 덮으려 했지만, 그것보다 먼저 천우희의 얼굴이 그 안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일어났어?”
잠에서 덜 깼는지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품에 매달려왔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지만, 전과같이 아름답다는 감상이 절로 나왔다.
천우희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조금만 더 자자고 웅얼거렸지만, 천천히 이불을 끌어 올린 채 그녀의 머리를 덮어버렸다.
“…….”
천후에게 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벌써 걱정이 드는 주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