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곧 오대 일의 싸움이 일어났다.
그 중 가장 맹렬한 기세를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악비산이었다.
창을 다루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호언장담은 허언이 아닌 듯 그의 창은 거칠게 허공을 찢어발겼다.
“자넨 하지 않는가?”
“난 당가의 출신이지 않소. 저렇게 붙어 있으면 한 명에게만 독을 쓰기도 어렵지. 더군다나 나는 독보단 암기가 특기요. 선형이 하고 있는 것처럼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지. 그 이후엔 한순간의 틈을 노려서, 콱.”
당천유는 제가 나서면 주호 정도는 금방 쓰러뜨릴 거라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선우연으로서는 한심스럽게 보였을 따름이었지만.
주호를 맞서 싸우는 후기지수들은 각자 나름대로 유망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처음 합을 맞춰보는 것임에도 공방의 배치가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것에 당할 주호가 아니었으니. 오히려 자연스러움에서 일어난 흐름에 편승해 강물을 거꾸로 헤엄쳐 오르는 연어처럼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퍽-!
그의 일수가 사방에 작렬했다.
일순간 피하기 힘들 정도로 매서운 공격이었다.
전부 가까스로 정면에서 두드려 맞는 것은 피했으나, 제대로 흘리지 못해 몇 발자국이나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큭.”
더러는 가볍게 기혈이 꼬일 정도였으니.
심한 내상은 아니었지만, 다섯이 함께 공격했는데 이렇게 터무니없이 밀렸다는 것에 다들 자존심이 상했다.
“대체 무슨…….”
악비산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 자신은 진심으로 창을 휘두르지 않았는가.
그의 창술은 악가의 가주가 칭찬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주호 앞에서만 서면 그 커다란 창은 가느다란 갈대만도 못하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꽈아악.
자존심이 상한 것은 남궁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호가 강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손대중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격차가 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섯이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을 뽑게 만들지도 못하게 하였지 않은가.
“계속 그렇게 지켜보기만 할 거예요?”
그렇기에 등 뒤에서 멀뚱히 서 있던 두 사내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화들짝 놀란 선우연과 당천유는 그제야 대련에 합류했고, 드디어 주호가 말했던 것처럼 칠대 일의 상황이 이루어졌다.
‘대단하다.’
일행의 제일 앞에서 주호에게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는 천후는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실전됐던 청룡의 진전을 이은 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아무리 스승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반신반의했다.
사신문에서도 손꼽히는 기재였던 스승님보다 몇 해는 더 어린 나이에 그 정도 경지에 오르다니.
주작의 이름을 이어받은 천우희가 얼마나 강한지는 천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시뻘건 불꽃이 일어날 때면, 언제나 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은 여지없이 타들어 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주호를 칭찬했다.
단순히 삼백 년 만에 나타난 청룡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강한 무인이라고.
그렇기에 그 밑에 들어가 배움을 청하고, 돈독한 관계를 쌓으라고 자신을 보낸 것이었다.
‘이 정도인가.’
관생들이 그를 보며 각자 다른 감상을 가슴에 품고 있을 때, 주호 역시 가라앉은 두 눈으로 제 앞에 선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번 손속을 나눈 것으로 이미 모두의 실력을 완벽히 파악했다.
제일 뛰어난 것은 천후, 그리고 그를 근소한 격차로 뒤따르는 것이 위천강이었다.
그다음부턴 고만고만했는데 선우연이 그다음이었고, 남궁연과 악비산이 거의 동수를 이루었으며, 당천유와 철대환이 그 뒤에 자리했다.
‘역시 강호는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곳인가.’
학관의 수석을 차지한 남궁연이 무려 네 번째 순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나.
챙!
주호가 밀어낸 악비산의 창이 남궁연의 검을 튕겨낸다. 적지 않은 내력이 실린 그 공격에 그녀는 이를 악물며 반동을 견뎌냈다.
외모에 가렸지만, 그녀 역시 검에 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재였다.
외부의 평가는 물론 스스로 자신도 있었다.
가주인 아버지 역시 머지않아 새로운 검후가 탄생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만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일격마다 낭패를 보고 있는 자신에 비해 다른 이들은 아직 여유가 있는 모습. 수석 입관이라는 명예가 너무 허무해지는 듯했다.
‘더, 더 강해지고 싶어.’
남궁연의 가슴속에 처음으로 간절함이 깃들었다.
***
휘릭!
주호는 대련을 끝내고자 했다.
그렇기에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몸놀림으로 몸을 뒤집었고, 곧 일곱 명의 후기지수들은 모두 가슴에 일장을 얻어맞은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윽…….”
큰 상처는 아니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기혈이 살짝 꼬인 정도이기에 얼마간 운기조식을 하면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은 일곱 명 전부가 나서도 주호의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모두가 축 늘어진 얼굴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때, 주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략적인 실력은 파악했으니, 앞으로의 강의는 오늘과 같이 비무 형식으로 진행하겠다. 다만, 지금처럼 다수 대 일이 아닌 일대일의 형식으로. 나는 너희와 같은 수준의 무공만을 사용하지. 다른 이들은 그 대련을 보며 감상을 생각해두도록. 대련이 모두 끝나면 그 내용을 토대로 점수를 매기겠다.”
강의를 언제 끝낼 것인지는 교관의 재량이긴 했지만, 이미 한 시진이 훌쩍 지난바. 새파랗던 하늘이 어느덧 누렇게 저물어갔다.
첫날치고 너무 진지하게 한 것이 아닌가 들었지만, 이들의 표정이 의기양양했던 전과 달리 의기소침해져 있는 것을 보곤 작게 웃음을 머금었다.
“오늘 강의는 이쯤에서 마치지. 내일부터는 대강의 시간을 빼면 이곳으로 모이면 된다, 이상.”
강의 종료를 선언한 주호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곧 적막해진 연무장 위로 일곱 명의 관생들만이 덩그러니 널브러진 채 자리할 뿐이었다.
“…빌어먹을, 진짜로 괴물이로군.”
당천유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하자 다른 이들 역시 그에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술이나 한잔해야겠군. 자네들도 어떤가. 패배자들의 위로연도 할 겸.”
주호에게 얻어맞아 욱신거리는 가슴을 문지르던 악비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술이란 소리에 다들 마음이 동했는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술 좋지, 남궁 소저도 어떠십니까.”
씩 미소를 지은 위천강이 제 옆쪽에 있던 남궁연에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당연히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대련의 중간, 은밀하게 자신에게만 전해져 왔던 주호의 전음이 생각나 말을 삼켰다.
-무엇이 그리 조급하지? 검에 여유를 가지도록.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상투적인 말은 하지 않겠다. 다만, 조급한 마음은 시야를 좁힐 뿐이다.
‘여유라…….’
문득 남궁연은 자신의 주위에 벗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세가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친구라기 보단 가족이 아니었던가.
“허튼수작만 부려오지 않는다면 좋아요.”
“…….”
그녀의 말에 몇 명이 몸을 움찔했다.
그중 하나였던 위천강은 이내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어찌 소저에게 그러하겠소. 자자, 갑시다.”
앞으로 최소 반년 동안 함께할 이들이었다.
“나도 가지.”
남궁연이 간다고 하자 선우연은 망설임 없이 제 의지를 표명했다.
천후와 철대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자리에 있던 일곱 명 모두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첫 강의를 성공적으로 끝낸 주호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사실 상태창으로 무공을 익힌 자신이 다른 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까 걱정이 조금 들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대련이 끝난 이후 각자의 표정을 보니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과 더불어 무언가 얻어 가는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
실전의 이해라는 강의 이름만큼이나 어울리는 수업 방식이 아닌가.
앞으로도 이렇게 대련 위주로 하면 어렵지 않으리라.
“섬서검협 담우양 대협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어 정말로 영광이었습니다!”
막, 그가 연무장을 빠져나와 강의 종료 보고를 위해 교관 집무실로 향할 찰나 다른 쪽에 있던 연무장에서 여러 관생들이 담우양을 둘러싼 채 포권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도 막 강의가 끝난 차인 것 같기에 잠시 벽에 기대 기다리자 얼마 있지 않아 담우양이 나와 그를 반겼다.
“기다려 주었는가.”
“저도 막 끝나서 말입니다. 그나저나 담형은 평판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좋은 아이들이 배정되었네. 대부분 중소 문파의 출신인지라 처음엔 조금 주눅이 든 태도였는데, 그래도 나중엔 다들 잘 따라와 주더군. 학관에 들어온 만큼 모두 우수한 인재이지 않은가.”
“다행입니다.”
“이쪽은 첫 시간이니만큼 서로 알아가는 것으로 강의를 끝냈네. 어찌나 열의가 넘치던지 말로 한 시진을 때운 것은 처음이야. 자네 쪽은 어땠는가?”
“어…….”
그 이야기를 듣던 주호는 살짝 말을 머뭇거렸다.
그도 첫 시간이니만큼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담우양처럼 말이 아니라 몸으로 대화를 나눈 것이 다른 점이었지만.
“…저도 대충은 비슷합니다.”
잠시간의 침묵 이후 나온 그 대답에 담우양은 보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말을 많이 했더니 배가 허하군. 식사라도 할 텐가?”
“한 잔 어떠십니까. 어제는 제가 마시지 못했으니.”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럼, 반 시진 이후에 입구에서 보는 것이 어떤가. 어차피 보고를 마치고 다른 이들에게 기별도 넣어야 하니.”
“저도 만나는 분들에게 권유해보겠습니다.”
내일 역시 강의가 있었지만, 주기 정도야 내공을 돌려 가볍게 배출해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반 시진 뒤, 홀로 입구에서 기다리던 주호는 마찬가지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담우양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없습니까?”
“모두 잔업이라 하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저녁이 지나야 끝날 것 같다고 앓는 소리를 내더군요. 그래도 끝나는 즉시 달려오겠다고 했습니다.”
“내 쪽도 마찬가지일세. 자네나 나나 모두 복 받은 처지군. 그러면 먼저 가서 허기나 달래야겠군.”
담우양은 요 며칠 사이 다른 교관들과 함께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주점으로 주호를 이끌었다.
이 근방에선 제일 규모가 큰 가게로 주 이용 고객은 정천학관의 관생이나 교관들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여러 무리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글바글하군.”
“관생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주호의 말처럼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대부분 관생이었다.
올해 입관한 듯 풋풋한 기운을 가진 이들부터, 어느 정도 관록이 느껴지는 선배들까지 그 연령대가 다양했다.
관생들 사이에 섞여 술을 먹기엔 조금 그렇기에 그들은 이층으로 자리 잡았다.
그곳 역시 여러 관생이 자리했지만, 일층보단 여유로웠기에 그다지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하루 일을 끝내고 마시는 술만큼 맛있는 것은 없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와 술이 나왔다.
담우양은 일단 술을 시원하게 병째 들이켠 뒤, 식사를 시작했고 주호 역시 일곱 명과 동시에 비무를 치러 허기가 진 상태였기에 쉴 새 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얼마가 흘렀을까, 노을이 지던 하늘은 어느덧 새카맣게 물들었고 청명한 달이 그 위로 떠올라 창밖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주호와 담우양은 그런 시간을 즐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덧 빈 술병이 서너 개가 되었을 찰나, 저 옆자리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세 명의 인원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저기…….”
“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주호는 의문성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니 술을 마셨는지 뺨이 살짝 불그스름한 여인들을 볼 수 있었다.
“시, 실례합니다. 주호 교관님 맞으신가요?”
“괜찮다면 합석해도 될까요?”